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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께서는 예쁜 바다색 눈동자를 갖고 계시니까, 저기 걸려있는 진청색 벨벳 드레스는 어떨까요.” 

엉뚱한 곳을 가리키며 달리아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나와 있는 것 중에 고를 줄 알았는데 그녀가 고른 건 드레스 룸 안쪽에 걸린 칙칙한 드레스였다. 시녀인 앤지가 코웃음을 치며 쓴소리를 터트리려던 순간 카를라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이런 드레스도 있었나?”

“일전에 만찬회용으로 맞추셨던 드레스를 다시 가봉한 건데요. 왜 그, 색이 너무 어두워 아가씨께서 뒤로 물리셨던 드레스인데.”

“아… 맞아. 기억나네.”

드레스를 내려다보던 카를라가 묘한 눈으로 달리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호기심과 오만함이 한데 뒤엉켜 있는 시선이 달리아의 콧잔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다색 눈하고 어울리는 드레스라.

카를라의 입가에 언뜻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달리아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카를라가 하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드레스 고르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만 다들 나가봐. 앤지, 너도.”

“저도요? 드레스 시착하시려면 제가 도와드려야죠.”

“저기 드레스 골라 준 애한테 시킬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시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마.”

단호한 어조에 앤지는 반박할 생각도 못한 채 못마땅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하녀들도 전부 나가고 방에는 카를라와 달리아 두 사람만 남았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던 달리아는 이어진 명령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해? 드레스 갖고 오지 않고.”

카를라가 가운을 벗어 내리며 턱짓으로 드레스 룸을 가리켰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려던 달리아가 그대로 몸을 굳힌 채 경악에 치뜬 눈으로 카를라를 봤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달리 카를라의 얼굴 아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알몸뿐이었다.

서슴없이 드러난 나신에 달리아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허둥지둥 드레스를 갖고 왔다. 리본을 풀고 레이스를 정리하는 손길이 영 서툴렀지만 카를라는 재미있다는 듯 다리를 꼬고 앉아 그 모습을 관찰했다.

달리아라고 했던가.

풀 네임을 들은 것 같은데 성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차피 하녀들의 성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지만.

하녀 중에서 가장 어린아이라고 들었는데 몇 살 정도 되었을까. 열다섯? 열여섯? 나이를 가늠하며 카를라는 반짝거리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다갈색 머리카락은 칙칙한 평소의 색과 달리 햇빛 아래에서 유난히 밝은색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렌지색이라기에는 애매한, 금발에 가까운 신기한 머리카락.

그 아래 머리카락보다 연한 색의 눈썹과 속눈썹이 있고, 초봄의 새싹을 연상케 하는 초록 눈동자는 동공에 가까워질수록 짙은 청록빛을 띠며 다채로운 색감을 뽐냈다.

가느다란 체격도 그렇고 색 조합도 그렇고 마치 어린 묘목을 떠올리게 하는,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넘치는 아이였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보드라운 뺨을 직시한 채로 카를라가 비웃음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와 막스를 조심하라고 했더니 그보다 더 위험한 놈에게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달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카를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네 또래가 없다고 해도 그 애랑 친해지면 어떻게 해. 어머니께서 아시면 아주 난리가 날 텐데. 저택에서 쫓겨나고 싶어?”

말의 전모를 이해한 순간, 무구하던 달리아의 얼굴 위로 차가운 긴장이 서렸다.

매일 아이작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좌익관을 드나들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의 하녀들뿐이었다. 게다가 방에 오래 머무른 적도 없고 친밀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데 아가씨가 어떻게 도련님과의 사이를 아는 걸까.

협박하려는 걸까.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 달리아는 입을 다문 채 눈치만 살폈다. 바짝 굳은 달리아와 달리 카를라는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들어 올렸다.

“드레스 들어. 시착만 하고 벗을 거니까 속옷은 필요 없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달리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 시중을 도왔다.

매듭을 다 묶을 때까지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카를라가 옷매무새를 확인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응시하던 푸른 눈이 한결 가느스름해졌다.

“어울리는 것 같아?”

“아, 네, 네. 무척 잘 어울리세요.”

“색이 칙칙해서 별로일 것 같았는데 막상 입으니까 차분해 보여서… 응. 좋네. 다과회 말고 다음 주에 있을 만찬회 때 입는 게 낫겠어. 가슴이 이렇게나 파여 있으니 사내놈들이 좋아하겠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카를라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가슴 계곡을 어루만졌다.

하얀 손가락 끝에 그보다 더 뽀얀 살결이 뭉클 잡혔다. 선정적이면서도 가학적인, 어딘가 낯부끄러움을 유발하는 태도에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달리아.”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놀란 달리아가 입을 벌리고 카를라를 마주 보았다. 아가씨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작은 기쁨은 이어진 물음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아이작의 별명이 왜 유령인지 알아?”

노래하듯 흥겨운 어조는 협박하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미로웠다. 달리아는 메마른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대답했다.

“그게… 별채에 계셔서.”

“아니. 그 음습한 별채에 살아서도, 처연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 것도 아니야.”

“그럼요?”

“말 그대로. 그 애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잡아먹거든.”

거울을 통해 본 달리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놀란 얼굴이 마음에 들어 카를라가 눈을 휘어 웃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실이야. 아이작에게 상냥한 사람들은 다 죽거나 사라지니까. 요즘은 그 아이의 의지보다는 대부분 어머니와 막스의 의지로 사라져버리지만 말이지.”

“…….”

“경고는 했어. 그럼에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렴. 안 그래도 막스 때문에 저택이 시끄러운데 머리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자, 다시 풀어. 이어진 명에 달리아가 서툰 손길로 매듭을 풀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 자신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 걸까.

혼란스러운 뇌리 속으로 ‘그건 이제 됐고 검은 드레스 갖고 와’ 하는 카를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하얗게 튼 손이 주인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드레스 자락을 추슬렀지만 동요로 가득한 눈동자는 드레스가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유령, 아이작 유프겐슐트를.

* * *

창가에 날아든 새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안을 살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고 안심한 새가 톡톡 튀어 올라 창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대리석 창틀을 배회하던 살굿빛 발이 창틀 옆에 늘어져 있던 손 위로 툭, 튀어 올랐다. 난데없는 이질감에 늘어뜨린 손이 아주 살짝 들렸다가 다시금 대리석 위로 떨어졌다.

“경계심이 없는 아이네. 이대로 잡히면 어쩌려고.”

퉁명스러운 어조와 달리 새를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눈동자만 움직여 새를 보던 아이작은 이대로 움직여 내보낼까 그냥 내버려 둘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손바닥을 이리저리 오가던 작은 새는 따스한 온기가 마음에 들었던지 바지춤까지 기어 올라가 옷자락이 접혀 있던 부근에 몸을 묻었다. 그 앙증맞은 몸짓에 아이작의 입꼬리가 슬쩍 위를 향했다.

무슨 새일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찬찬히 새를 뜯어보던 아이작은 곧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 보드라운 다갈색 깃털은 요즘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는 다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달리아 벨로흐.

내리쬐는 일광 아래 짙은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 제 몸보다 커다란 이불 더미를 끌어안고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얄팍한 몸에는 차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격한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도자기 인형처럼 생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질 않다가 일할 때는 온갖 감정과 활기로 주변을 요란하게 하는, 그 이중적인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가고야 마는 기이한 여자아이.

……모두가 외면하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유일한 여자아이.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혼자가 익숙한 아이작은 애초부터 달리아에게 딱히 깊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기피하지 않는 모습이 흥미로워 자주 찾아오라 지시했지만 명을 내리면서도 그녀에 대한 관심이 오래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아이작의 낙은 달리아가 찾아오는 오후의 한 시간이 유일했다.

남부 억양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맑은 목소리와 꽃잎으로 귓가를 간질이는 것처럼 달콤하게 이성을 현혹하는 웃음소리.

호감 가는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주변 일들을 소곤거리고 있노라면 아이작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가슴 언저리에서 불쑥 튀어나와 그를 놀라게 하고는 했다.

달리아가 꽤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건 일찍부터 인정했지만, 그런 매력이 타인에게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힘까지 갖췄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아이작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아슬아슬한 감이 없잖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한 듯 즐거운 듯 상반된 감정들이 혼재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혼돈마저 기꺼워하게 되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을 알게 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달리아.”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 나른한 기운을 품고 있던 눈동자가 재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앞뒤로 작게 흔들리는 새의 머리통이 무척 사랑스럽고 깜찍했다. 금빛 솜털이 언뜻 보이는 그 머리통이 달리아를 닮아 귀엽고, 사랑스럽고…

……달리아를.

달리아 벨로흐를 닮아서.

길고 곧은 손가락이 아주 느린 속도로 새를 향해 다가갔다. 작은 머리통 위에 긴 그림자가 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 위로 검은 눈동자만이 기이한 생기를 머금은 채 뚫어져라 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붙잡아 움켜쥐면 어떨까. 절대 날아가지 않게…

도망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이렇게, 아주 세게 꽉 쥐면.

“…죽을지도 몰라.”

울적한 낯으로 혼잣말을 읊은 아이작이 다시 입매를 굳힌 뒤 상념을 이어갔다.

아니, 아니지.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힘 조절을 해서, 그냥 사로잡으면 괜찮지 않을까.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이제 이성도 있고 현명하고. 힘 조절도 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호감 가는 사람을 곁에 둬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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