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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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도련님. 이만 가 볼 테니 편히 쉬세요.” 

청소를 끝낸 달리아가 도구함을 든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창가에 기대 있던 아이작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쳐다보았다.

오기 전에도 깔끔했지만 달리아의 손이 닿은 방은 티끌 한 점 보이지 않을 만큼 청결했다. 가지런히 늘어선 필기도구, 정확한 각도로 맞닿아 있는 의자, 판에 찍어낸 듯 똑같은 모양으로 커튼에 매달려 있는 리본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방을 훑는 모습을 바라보며 달리아가 뿌듯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도련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말에 혼신의 힘을 다해 청소에 공을 쏟았다. 청소에 까다로운 자신이 봐도 이렇게 깨끗하니 분명 다른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하게 여겨질 터였다.

그리고 역시나. 이어진 말에 달리아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반듯해서 눕기가 좀 아까운데.”

난처한 듯 눈썹을 추어올리며 아이작이 침대를 가리켰다.

각이 딱 잡힌 침대 위에는 수건으로 만든 예쁜 강아지가 놓여있었다. 저건 뭐냐고 물으니 ‘리본 만드는 부업을 했는데 그때 배운 거예요’ 하며 달리아가 수줍게 웃었다.

“그럼 가 볼게요, 도련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히 부르세요.”

“얼마 전에 빌려준 책은 다 읽었니?”

“아… 책이요…”

읽은 지는 한참 됐지만 선뜻 돌려주기가 어려워 계속 방에 두고 있었다. 그저 책만 훌쩍 갖다주는 게 민망해서 어떤 이유를 붙여 도련님께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설마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생각이 미치자 달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다 읽었어요! 지금 당장 돌려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니, 아니! 급한 건 아닌데.”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외려 놀란 아이작이 목덜미를 쓸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감상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 읽었으면 다른 책도 빌려줄 테니까 괜찮다면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 줄래?”

아이작은 혹시 지난번처럼 사양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운을 뗐다. 다행히도, 달리아는 거절하는 대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뒤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복도로 나온 달리아는 문에서 손을 떼자마자 들고 있던 도구함을 바닥으로 툭 떨궜다.

“으……!”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 위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곤혹스러움이 들어찼다.

“나 오늘… 너무 바보 같지 않았나?”

지나간 모든 이야기의 흐름을 되돌이켜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핑핑 도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냥 묵묵히 청소만 하면 될 것을 괜히 말대꾸를 이어가 도련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부모님 얘기는 왜 해서! 책은 왜 여태 안 돌려줘서!

화제가 나올 때마다 멈칫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창피해서 사지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후, 하, 후, 하 빠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도련님은 관대하시니까. 날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스스로 다독이며 다시 도구함을 집어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청소 도구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달리아는 다음부터는 절대 말실수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 * *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이틀에 한 번꼴로 이루어진 책 교환 덕분에 달리아는 도련님에 대한 서먹함을 조금이나마 거둬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친밀한 사이라고 말할 정도까지 되지는 못했지만,

“도련님. 별채에서 혼자 지내시면 외롭지 않으세요?”

이 정도는 스스럼없이 물을 정도의 사이는 되었다.

카드를 셔플하던 아이작이 손을 멈추고 짧은 침음을 흘렸다. 눈가에 머물러 있던 나른한 기색이 씻은 듯 사라지고 곧 선명한 이지가 떠올랐다.

“글쎄. 이제는 익숙해져서… 게다가 후버가 있으니까 혼자는 아니지.”

“맞다. 후버 씨가 있었죠. 어, 그러고 보니 후버 씨가 도련님의 시종이라고 들었는데 좌익관에 안 계시네요?”

“후버는 별채에 남아 있어. 나랑 같이 있어 봤자 공작 부인에게 괜한 트집이나 잡힐 테니 그냥 두고 오는 게 나아.”

아이작은 반으로 나눈 카드 더미의 끝을 조심스레 밀어 넣어 셔플을 계속하다가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물고 있는 달리아를 보고 미간을 슬쩍 들어 올렸다.

“배려하지 않아도 돼. 이 집 사람들이 나 싫어하는 거 익숙하니까.”

“…도련님도 가족들이 싫으세요?”

“어떤 것 같아 보여?”

“어… 그게.”

아이작은 가늘게 휜 눈으로 달리아를 힐끔 쳐다본 뒤 카드 더미를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능숙하게 카드를 뒤섞은 뒤 여덟 장의 카드를 골라 달리아 앞에 들이밀었다.

잠시 고민하던 달리아는 제일 오른쪽 카드를 뽑아 뒤집었다.

과연 이번에도 무슨 카드인지 맞출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달리아의 얼굴과 달리 아이작은 손목을 가볍게 흔들어 남은 카드들을 단번에 회수한 뒤 표정 없는 얼굴로 달리아가 들고 있는 카드를 쳐다보았다.

“딱히 싫지는 않아. 스페이드 A.”

달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카드와 아이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잿물로 하얗게 튼 손끝에 스페이드 A 카드가 들려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표시라도 해 두셨어요?”

“그럴 리가. 새 카드 갖고 온 사람이 달리아 너였는걸.”

아까 하트 퀸을 맞췄을 때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묘수를 부렸길래 보지 않고도 카드를 맞출 수 있는 걸까.

‘한 번 더’를 외치자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재차 카드를 섞었다. 그렇게 카드 하나를 고르자, 아이작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다이아몬드 8이네.”

맙소사, 중얼거린 달리아가 떡 벌린 입술을 더듬거리며 어설프게 말을 토했다.

“도련님… 혹시 마법 쓸 줄 아세요?”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물어도 아이작은 오묘한 미소를 떠올린 채 외웠을 뿐이라고만 대답했다. 카드를 외우다니, 겹치는 순서까지 모두 줄줄이 외운다는 건가 싶어 고민하던 달리아는 고민 끝에 그냥 마술사들의 트릭 중 하나일 거라 결론을 내렸다.

창문 틈으로 늦가을의 무르익은 향취가 흘러들었다. 달리아는 주머니에 꽂아둔 먼지떨이를 툭툭 건드리다가 문득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했다! 오늘 오후에 본관 대응접실 가구들을 바꾼다고 했는데. 빨리 가봐야겠어요!”

“가구를 또 바꿔? 얼마 전에 바꿨잖아.”

“요즘 카를라 아가씨 약혼 일로 손님들이 많이 오시잖아요. 주인마님께서 실내 장식을 자주 바꾸라고 명하셨어요.”

“카를라가…… 아, 그래. 올해 사교계에 데뷔했지.”

막 피어나기 시작한 18살, 더군다나 유프겐슐트 공작가의 후광을 지닌 카를라라면 그 배경만으로도 물밀 듯이 약혼자들이 밀려들 것이다.

카를라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아이작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카드를 팔걸이에 툭툭 쳤다. 카드를 투영하고 있던 칠흑의 동공이 달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문밖으로 향하는 달리아의 뒷모습에서 이복누이의 처연한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과연 그녀는 약혼을 기대하고 있을까. 속된 호기심 너머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가구 배치는 순식간에 끝났다. 요즈음 여러 번 해 온 일이기에 하녀들과 하인들 모두 능숙하게 커버를 교체하고 가구 아래에 천을 덧댄 뒤 기존의 가구들을 창고로 옮겼다.

초록 일색이던 방이 순식간에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빨랫거리까지 정리한 뒤 다들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응접실 안에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여기, 손 비는 애들 좀 와서 도와줘!”

“왜? 뭔데?”

“양장점에서 아가씨 옷이 왔거든. 드레스는 우리가 나를 테니까 너희들은 구두랑 나머지 좀 들고 와 줄래?”

평소라면 싫은 내색을 하며 마지못해 끌려갔을 하녀들이 드레스라는 말에 화색을 띠고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분위기를 보니 자신도 가야 할 듯싶어 달리아 또한 서둘러 하녀들의 뒤를 따랐다.

총천연색의 드레스들이 하녀들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몸에 대 보기도 하고,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며 감탄하던 하녀들은 카를라의 방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잖은 태도로 돌변해 고개를 숙였다.

다갈색 일변인 카를라의 방은 드레스가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던 듯 옷걸이와 토르소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녀들이 옷을 내밀자 시녀와 전담 하녀가 신중한 눈으로 옷을 살폈다.

“이거랑 이거, 저 드레스까지 다섯 벌은 여기 빼놔.”

옷들을 점검하던 시녀가 소파를 가리키며 하녀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화장대에 앉아 드레스를 훑어보고 있던 카를라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도 드레스도 싫은 건 아니었는데 매일 하니까 지겹네. 앤지, 내일모레 다과회에 입고 갈 드레스부터 골라 봐.”

“다과회라면 안뜰 정원에서 하실 테니 화사한 게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이 연보라색 드레스는 어떠세요?”

“…진심이야?”

“저번 야유회 때 입으셨던 드레스랑 비슷해서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카를라가 표정을 구긴 채 차가운 시선을 쏟아냈다.

“그때는 늦여름이니까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곧 겨울이니까 너무 화사한 색은 촌스러워. 와인색 드레스 먼저 갖고 와.”

“아가씨께서는 피부가 고우시니까 밝은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실 텐데…”

꿍얼거리면서도 시녀인 앤지가 착실히 와인색 드레스를 들고 와 카를라의 앞에 내밀었다.

얇은 모슬린을 겹겹이 덧대 만든 드레스는 무거운 색감과 어울리지 않는 나풀나풀한 자태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라의 마음에는 썩 차지 않았다. 카를라는 어두운색의 드레스들을 더 갖고 오라 명했다.

짙은 회색 드레스와 검은 드레스, 진녹색 드레스까지 꺼내 들었지만 어떤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고 있던 가운 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카를라는 구석에 서 있던 달리아를 보고 살짝 눈을 키웠다.

저 애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짓궂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카를라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달리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떤 드레스가 가장 나은 것 같아?”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었으리라 생각지 못한 달리아는 주변을 휘휘 돌아보다가 대화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저요?”

“그래. 너. 뭐가 제일 괜찮아 보여?”

굳이 시녀를 놔두고 자신에게 묻는 이유가 뭘까. 눈치를 살피던 달리아가 쭈욱 늘어서 있던 드레스들을 한번 쳐다보고서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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