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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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가 돌아온 저택은 나쁜 의미로 활기가 돌았다. 

막스는 실내 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식사가 엉망이라느니 온갖 트집을 잡으며 사용인들을 잔뜩 들쑤셔놓더니 종국에는 사냥을 나간다며 매일 시종을 데리고 아이작이 거주하고 있는 북쪽 숲을 엉망으로 헤집어놨다.

숲지기인 본즈 할아범은 기껏 키워둔 어린 묘목들을 죄다 망가트렸다며 울상인 얼굴로 숲을 돌아다녔다. 평소라면 딱하게 여겼을 사용인들도 막스의 지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늙은 숲지기를 위로할 여유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달리아. 오전 일 다 끝났어?”

상급 하녀인 델마가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달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에 델마가 힘든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인 달리아는, 델마의 손이 직접 자신의 머리에 닿고서야 헤드캡이 삐뚤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야 알아서 잘하니까 따로 검사할 필요는 없겠지. 본관 정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작은 도련님께 좀 갔다 와.”

“전하실 물건이 또 있나요?”

요즘 달리아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심부름을 다녀오고 있었다.

심부름이라고 해 봤자 책과 손수건, 책갈피와 잉크 따위의 소소한 물건들이라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냥 한 번에 시켜도 될 걸 왜 이렇게 자주 오고 가라고 하는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물건을 갖다 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델마가 고개를 저으며 청소 도구가 든 도구함을 내밀었다.

“심부름은 아니고. 요즘 소공작님이 북쪽 숲으로 매일 사냥을 나가시잖아. 시끄럽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해서 작은 도련님의 거처를 좌익관으로 옮겼거든.”

“앗, 그래요?”

다행이다, 하며 달리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유리 같은 소년이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괜히 신경 쓰여 잠 못 이루고 있던 달리아였다.

델마는 이해한다는 듯 입매를 살짝 끌어당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후에는 도련님 방 청소 좀 부탁할게. 좌익관 3층 제일 안쪽에 있는 방 두 개야. 그냥 좌익관 담당하는 애들이 한다고는 했는데 도련님께서는 네가 편하신가 봐.”

편한 심부름을 놔두고 갑자기 청소를 하라니!

다른 하녀였다면 좌절했을 명이었지만 달리아는 샐쭉 웃으며 기꺼이 도구함을 받아들었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쁜 와중에 자신만 심부름으로 근무 시간을 허비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더군다나 청소라니, 도련님에게 자신의 장점을 내보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맡겨 주세요. 금방 끝내고 올게요.”

도구함을 든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달리아는 활기찬 걸음으로 좌익관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가을 햇살이 창문을 뚫고 달리아의 뺨을 은은히 달궜다. 높이 올려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걸음걸이에 맞춰 양쪽으로 부드럽게 나풀거리고. 생기발랄한 막내 하녀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용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들어 본 노래가 귀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게 자신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라는 것을 깨달은 건 방 앞에 다다른 직후였다. 들뜬 기분을 속으로 억누르며 달리아는 짐짓 어른스러운 태도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기운차게 인사를 건네자 그늘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아이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감정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물감처럼 천천히 번져나갔다.

“안녕.”

수줍게 웃으며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아는 그냥 앉아계셔도 된다고 만류하며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가에 걸터앉은 아이작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코끝을 스치는 가을바람 속에서 겨울의 메마른 냄새가 얼핏 스며들었다.

한참 동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다시 고개를 틀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막내 하녀의 모습을 시야에 담고서 아이작은 들고 있던 체스 말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달리아는 언제부터 저택에서 일했어?”

나직한 물음에 침대 시트를 들어 올리던 손이 멈칫했다. 달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곧 석 달이 되네요. 일한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에요.”

“그전에도 계속 하녀 일을 했었고?”

“그렇게 길게 하지는 않았구요. 제가 나이가 어리잖아요. 공작 저에 오기 전에는 멕폰 남작 부인 저택에서 반년 정도 일했었어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명칭에 아이작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

“멕폰 남작 부인… 성정이 꽤 거칠다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힘들었겠네.”

“아… 하하.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달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늙은 남작 부인은 상심한 마음을 하녀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달래는 사람이었다. 기분 나쁘면 빽 소리 지르고, 화가 나면 이유 없이 매질을 당하고.

언제는 구둣발 소리가 거슬린다며 막내 하녀의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는 하녀들 모두가 행여 남작 부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싶어 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까치발을 들고 다녔다.

또 얼마나 깔끔을 떠는지, 장식장에 먼지 한 톨이라도 묻어있으면 가차 없이 추궁이 날아왔다. 어딜 봐도 좋은 직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대부분 일주일이 못가서 관두더라구요. 반년 동안 룸메이트가 다섯 번은 바뀐 것 같아요.”

“달리아도 그렇게 관둔 거였어?”

“아뇨. 부인께서 병에 걸리셔서 저택을 처분하고 남부로 내려가셨거든요. 그때 소개장을 받아서 공작 저에 온 거예요.”

‘설마 공작 저에서 일하게 되다니 운이 좋았죠.’ 하고 덧붙인 뒤 달리아가 서툰 미소를 끌어올렸다.

“물론 남작 저에서 일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저 같은 구빈원 출신의 여자애를 써 주는 곳은 무척 드물거든요. 돈을 보내려면 어쩔 수 없이 버텨야죠.”

“돈을 보내다니. 어디로?”

달리아는 대답 대신 신기한 눈빛으로 눈앞의 소년을 응시했다.

결코 경험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달리아가 겪은 귀족들은 사용인들을 가구나 기물 따위로 생각하고는 했다. 즉, 사용인들의 기분이나 일상 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으니 아이작이 고개를 기울인 채 의아한 시선을 되돌렸다. 하얀 이마 위로 그와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그 선연한 모습을 눈에 담자, 달리아의 눈시울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둥글게 휘었다.

예쁜 사람 앞에서는 원래 이렇게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까. 속으로 생각하며 말문을 이었다.

“구빈원으로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진료비랑 약값을 보내고 있거든요. 천식이라서 꾸준히 요양해야 한대요.”

아이작의 새까만 동공 속으로 놀라움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네. 원래는 부모님도 계셨어요. 전쟁으로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요.”

“전쟁이라면 우브랑 내전?”

“……네.”

걸레를 쥔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는 게 느껴졌다.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던 과거가 텅 빈 뇌리에 해일처럼 차올랐다. 요란한 폭격음과 군인들의 고함소리, 까맣게 타버린 집과 무너진 벽 아래 튀어나와 있던 가느다란 엄마의 팔.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못 낸 채 어린 로렐을 둘러업고 하염없이 뛰었다. 참으로 혹독한 겨울이었다.

고향을 도망쳐 나온 이후로 달리아는 약한 모습 따위 일절 없는 밝고 야무진 아이가 되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 겨울의 기억을 떠올리면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열 살짜리 달리아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처절하고 한없이 우울하기만 한 애 같지 않은 아이, 달리아 벨로흐로.

미처 수습하지 못한 감정이 툭툭 불거져 나와 달리아의 얼굴을 울상으로 만들었다. 괜한 말을 꺼냈구나 하고 속으로 후회하며 입술을 씹었던 순간이었다.

“대단하네, 달리아.”

뜻밖의 한 마디가 젖어 드는 우울감을 단박에 희석했다. 떨군 시선을 위로 향하자 담담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아이작의 얼굴이 보였다.

“우브랑 내전… 민간인도 가리지 않고 섬멸했다지. 무척 참혹했다고 들었어. 거기서 살아남은 생존자였구나…”

“…….”

“비극이니 뭐니 떠드는 건 쉽지만 막상 비극을 겪어 본 당사자들은 말을 아끼지. 너 같은 어린 애가 양친을 잃고 동생까지 거두고 살았다면… 정말, 정말 힘들었을 텐데.”

동그랗던 눈매가 천천히 가늘어지더니 숱 많은 눈썹이 위로 들리며 처연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작은 서글픈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해. 애썼구나.”

애썼구나.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전혀 다른 울림으로 와닿는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달리아는 눈가가 움찔거리는 걸 느끼고서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별말씀을요, 하고 대답하려 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아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차오르는 감정을 달래기 위해 들고 있던 걸레로 가슴을 꾹꾹 짓눌렀다. 찰나가 흐르고, 달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건넸다.

“저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 살아남았으니까…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죠.”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지만 달리아는 빙긋 웃으며 태연히 말을 매듭지었다. 애늙은이 같은 대답에 아이작이 보일 듯 말듯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네. 닮고 싶을 만큼. 달리아처럼 열심히 살면 나도 좋은 일이 좀 생기려나.”

“그럼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잖아요. 도련님께도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침대 시트를 들추며 달리아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스스로 내뱉은 말이 격려가 된 듯 달리아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열심히 청소에 몰두했다.

아이작은 한쪽 무릎을 끌어당겨 턱을 괸 채 흥미로운 시선으로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고생 따위 하나도 한 적 없을 것처럼 생겨서는, 그 전쟁의 생존자라니.

앞치마 대신 드레스를 입혀놓으면 이복누이인 카를라보다 훨씬 예쁠 것 같은 하녀는 신중한 얼굴로 빗자루질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여간 골몰하고 있는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우스워 아이작은 무릎에 입술을 묻고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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