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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타인을 지배해 왔던 사람이 충동을 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아버지 외에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유프겐슐트의 후계자라면, 거기에 몹시 다혈질인 성격까지 갖췄다면.
감당하기 힘든 모욕에 막스가 부릅뜬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와인 잔을 잡아끌며 집어 던질까 말까 고민하는 아들의 속내를 한눈에 파악한 공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넌 그래서 안 돼. 아비가 왜 비아냥거리는지는 생각지도 않고 제 울분만 풀기 급급해서는. 후회할 짓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라.”
“…….”
“꼴을 보니 학교에서도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만하구나. 그렇게 매번….”
“아버지는 그래서!”
말을 끊어내며, 막스가 주먹을 움켜쥔 채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멍청한 후계자 대신 똑똑한 사생아 새끼를 같은 학교에 입학시켜서 좋은 성적표라도 받아 보고 싶으셨습니까? 아버지는 늘! 제가 그 새끼한테 밀리는 꼴이 얼마나 우습게 비칠지는 생각도 못 하십니까.”
“막스.”
“위신이니 체면이니 하면서 자꾸 질서를 어지럽히는 건 아버지 본인이시잖습니까! 늘 그렇게…!”
꽉 쥔 주먹이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허무하게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입술을 말아 문 채 분노한 얼굴로 공작을 응시하던 막스는 몸을 비틀어 테이블 바깥으로 벗어났다.
“귀족들 말고는 못 들어가는 학교니 입학원서 받아낸다고 기부금을 꽤나 많이 뿌리셨을 텐데. 어쩝니까, 아버지? 그 원서, 저택에 오자마자 갈기갈기 찢어서 그놈 얼굴에 뿌려줬거든요.”
“막스! 어찌 함부로 아비 일에 손을 대느냐!”
“마침 아이작 놈도 입학할 생각 따위 없다고 했으니까 다 잘된 거 아닙니까. 더 이상! 제발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막스는 제 할 만만 내뱉곤 성큼성큼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던 공작 또한 긴 한숨을 내쉬고서 반대쪽 문으로 나가버렸다.
술을 가져오라는 공작의 외침에 석상처럼 벽면에 머물러 있던 집사장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를 신호로 잔뜩 굳어 있던 사용인들도 작게 날숨을 토해냈다.
그러잖아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그의 퇴장으로 인해 한없이 늪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묵묵히 부자의 싸움을 지켜보던 공작 부인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 잔을 집었다.
“하여간. 오랜만에 얼굴을 봤으면 그냥 반갑다고 형식적으로나마 대해 주면 좀 좋아. 만날 때마다 이러니 정말 난처하구나.”
들릴 듯 말듯 작은 속살거림에 카를라가 한숨처럼 웃었다.
“어머니도 참. 아버지와 막스 성격 아시잖아요. 괜히 형식적인 모습 보여 봤자 또 무슨 가식을 떠냐며 서로 견제하기 바쁘겠죠.”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막스도 막스지만 네 아버지는 정말… 어차피 후계자는 막스인데 왜 그리 그 애를 싸고도는지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다니. 공작 부인의 능청스러운 말에 카를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오묘한 웃음을 흘렸다.
공작이 아이작을 편애하는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아이작을 잠시만 겪어 봐도 알 수 있었다. 막스는 성질이 급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반해, 아이작은 그보다 어린 동생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정을 지녔다.
무엇보다 그 아이는… 그냥, 현명했다.
머리가 좋은 것도 그렇지만 호감을 사기 위해서 상대에 따라 태도와 말씨 등을 달리하는 걸 보면 똑똑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했다. 한없이 순진한 얼굴로 그따위 처세술을 부리니, 제아무리 목석같은 공작이라도 아이작을 총애하게 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그 아이의 진면목을 공작 부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공작 부인은 애써 아이작을 뇌리에서 떨쳐내며 태연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내일 아침 식사도 엉망이 되겠구나. 카를라. 식사 끝나는 대로 막스에게 가 보렴. 네가 달래 주면 그 아이도 금세 마음을 풀지 않겠니.”
“글쎄요. 제가 간다고 딱히 나아질까요.”
“얘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희는 쌍둥이잖아. 달리 마음 터놓을 곳이 카를라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니.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요즘 수도 정세는 어떤지 이야기 좀 나눠 보거라.”
차마 거절할 새도 없이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 걸음으로 다이닝 룸을 나섰다. 시녀가 그 뒤를 따라나서고 다이닝 룸에는 카를라와 식사 수발을 드는 사용인 서넛만 남았다.
지그시 어머니의 빈 자리를 노려보던 카를라는 냅킨을 접고서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한숨이 뒤를 잇고, 카를라마저 사라진 다이닝 룸에는 늘 그렇듯 불편한 침묵만이 남았다.
* * *
다이닝 룸의 뒷정리를 전부 마치자 벌써 한밤중이 되었다. 달리아는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와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몸을 닦은 뒤 침대에 몸을 누였다.
은은한 램프 빛 위로 작은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건너편에서 치맛단을 꿰매고 있던 에디나가 픽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 피곤했지? 원래 식사 수발드는 게 좀 까다로워.”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서 조금 놀랐어. 원래부터 두 분 사이가 안 좋아?”
“주인님과 소공작님?”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나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말을 이었다.
“원래는 괜찮았는데 5년 전에 작은 도련님을 데려오면서부터 사이가 나빠졌다고 하더라. 뭐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나도 우리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형제라고 누굴 데려오면 엄청 속상할 것 같긴 해.”
‘아빠도 실망스럽고, 아빠가 데리고 온 자식은 더 싫을 거야’ 하며 열변을 이어가던 에디나가 눈매를 찌푸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작은 도련님이 없었으면 저택도 훨씬 평화로웠을 텐데. 주인마님께서 짜증 내시는 것도 대부분 작은 도련님 때문이잖아. 피곤해 죽겠어.”
“주인마님이 화내시는 게 왜 작은 도련님 때문이야?”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말을 받아쳤다.
주인마님의 괴팍한 성격으로 인한 불만이 어떻게 작은 도련님의 잘못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납득되질 않았다.
“작은 도련님은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야 뭐 잘못한 건 없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주인님께서 작은 도련님만 예뻐하시니까 이 사달이 난 거 아니야. 오늘만 해도 그래. 소공작님처럼 자존심이 센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에게 차별받는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
에디나의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못마땅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달리아는 눈썹을 추어올린 채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았다.
차별당하는 건 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그렇게 윽박지르고 때리려는 모습은 달리아의 기준으로서는 합당치 못한 짓이었다.
그뿐인가. 막스야 후계자로서 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내내 평온하게 살았겠지만, 혼외 자식으로 태어나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작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의 폭거를 감당해야 하는 건지.
합당치 못한 일이었다. 동시에 아이작이 무척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에디나. 소공작님도 딱하지만 작은 도련님이야말로 무슨 잘못이 있겠어. 누군들 좋아서 사생아로 태어났을까.”
“그건 뭐…”
“주인님께서 도련님을 감싸시는 이유도 그래. 주인님 말고는 달리 감싸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원래 누군가를 포용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막스가 조금 더 어려운 선택을 했더라면, 아이작을 밀어내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였다면 저택의 분위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와서는 전부 쓸데없는 가정일 뿐이다. 달리아는 자조 섞인 미소를 떠올리고서 흘리듯 말을 이었다.
“…어렵다. 이렇게 잘 살면 가족끼리 사이좋을 줄 알았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서로 물어뜯는 걸까.”
돈 때문에. 그 잘난 돈 때문에 달리아는 하나뿐인 동생을 버리려고 했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세상에 단둘만 남은 혈육이라는 건 말할 수 없이 애틋한 감정으로 서로를 보듬게 했다. 달리아는 누구보다 동생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그런 애정도 현실을 맞닥뜨리자 서서히 가치를 잃어갔다.
로렐은 정말 자주 아팠다.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삯 바느질을 하고 심부름을 하며 돈을 모아도 로렐을 보살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묵묵히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왔지만 마음이 꺾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약값이 모자라서, 호흡기를 고칠 비용이 부족해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발작으로 병수발을 드는 것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어린 달리아에게 하나뿐인 동생은 어느덧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 버렸다.
곁에 없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자신의 핏줄이 죽어서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하고 변화하는 꼴이라니.
달리아는 그때 진리를 깨달았다.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하는구나. 사람은 원래부터 선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때의 자괴감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앞으로는 절대 그런 생각 따위 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잘 사는 사람들은 서로 아끼고 화목하게 살겠지’ 하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오늘 저녁 식사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왜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돈이 있다고 모두가 화기애애한 건 아니구나…
공작가가 유난히 우울한 걸까, 아니면 다른 귀족 집안도 이런 분위기인 걸까. 엎드려 턱을 괸 채 고민하던 달리아가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묘한 눈길로 달리아를 쳐다보던 에디나가 머리빗을 협탁에 내려놓곤 쭉 팔을 뻗어 달리아의 볼을 콕 찝었다.
“어이구, 달리아 아가씨는 참 순진하기도 하지. 돈만 많으면 다들 하하호호 하면서 살 줄 알았구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잘살든 못살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지. 아니, 아니다. 가진 게 많으니까 서로 뺏으려고 더 안달 내는 것도 있어.”
잠이 몰려오는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에디나가 침대에 몸을 묻었다.
“저택에서 일하다 보면… 귀족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아. 행동은 고상하지만 여기저기 비틀린 건 우리 집이나 여기나 똑같다니까.”
혼잣말처럼 투덜거린 에디나가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자라며 커튼을 치고 램프 등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은 허공에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코끝을 간질였다.
달리아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커튼이 일렁이는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에디나의 마지막 말이 묘한 울림으로 머릿속을 떠돌았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었건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 오전에 들었던 말과 아주 흡사했다.
‘귀족이라고 해도 별거 없어. 그냥 똑같은 인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