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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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린 현관 앞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저 사람…… 혹시.”

달리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문 앞의 남자는 달리아가 매일 청소하는 갤러리, 그 넓은 벽면 가장 끝에 걸려있는 초상화의 인물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카를라의 쌍둥이 남동생이자 공작가의 후계자, 막시밀리언 유프겐슐트.

단정하게 뒤로 넘긴 흑발과 가을 하늘이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가 유프겐슐트의 핏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괜한 친밀감에 몸이 튀어 나가려는 것도 잠시뿐, 달리아는 이어진 호통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네까짓 게 감히 나랑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막스가 들고 있던 종이를 북북 찢어 안으로 집어 던졌다.

커다란 어깨가 분노로 인해 쉼 없이 들썩였다. 그 너머로 막스의 우렁찬 목소리와 다른,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간다고 한 적 없어. 각하께서 독단으로 진행하신 일이야.”

“아버지가 미쳤다고 너 같은 등신을 퍼블릭 스쿨에 집어넣어? 무슨 망신을 당할 줄 알고? 개수작 부리지 마. 또 우리 몰래 아버지한테 가서 살살 꼬드긴 거 아냐!”

쩌렁쩌렁한 외침으로 숲의 고요가 부서졌다. 분을 못 이긴 막스가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달리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문 앞을 살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화난 모습을 보니 작은 도련님을 때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여리여리한 몸이 저 커다란 주먹을 버틸 수 있을까.

제발, 작은 도련님. 그냥 미안하다고 빌고 좋게 넘어가세요. 강자에게 굽히는 건 비굴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달리아의 간절한 염원은 이어진 말로 인해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등신이라니 누구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가문 망신은 이미 네가 시키고 있잖아, 막스.”

부스럭, 종이를 줍는 소리와 함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막스가 한 박자 늦게 말을 이해하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머리 나쁜 게 죄는 아니지. 그래도 성적이 그 모양이면 다른 영주들이 유프겐슐트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도 도박과 여자 문제로 잡음이 끊이질 않던데……”

짧은 한숨과 함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자격지심으로 괜히 시비 걸지 마. 귀족이랍시고 너 같은 머저리들만 모여 있는 학교, 갈 필요도 없고 갈 생각도 없거든.”

소름 끼치는 적막이 이어졌다. 입매를 비틀어 인상을 구긴 막스가 빠득, 이를 갈며 일갈했다.

“이 새끼가!”

바람 소리와 함께 막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달리아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주 자그마한 속삭임이 그녀의 고막을 스쳤다.

“마야 오브릭, 잊었어?”

말이 나오자마자 솟아오른 주먹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타격음도, 신음 소리도 없었다. 가쁘게 새어 나오는 막스의 숨소리와 잎새가 스치는 소리만 남아 괴괴한 침묵을 가를 뿐이었다.

막스는 욕을 짓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야 오브릭, 빌어먹을 년. 뭉개진 발음으로 연신 욕설을 내뱉은 막스가 핏발 선 눈으로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작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면 멱살을 붙잡고 있던 막스의 손은 차츰 힘을 잃어갔다. 팽배했던 긴장감은 막스가 손을 떨구고 나서야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작은 피로한 얼굴로 그를 밀어내며 마지막 말을 고했다.

“다시 말하지만 학교는 갈 생각 없어. 네 바람대로 숲에 처박혀서 죽을 때까지 얌전히 살 테니까……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돌아가, 막시밀리언.”

막스의 당혹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발할 때는 언제고 순순히 꼬리 내리는 이복동생의 모습에 막스는 짜릿하면서도 허무한 감각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아이작을 내려다보던 막스는 곧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코웃음을 쳤다.

“주제넘게 굴지 마. 이번 한 번은 봐주겠지만, 또 이랬다가는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기대하라고.”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관을 걷어찬 막스가 서슴없이 몸을 돌려 별채를 나섰다. 발각되면 험한 꼴을 당할 것만 같아서 달리아는 그가 몸을 돌리기 전 재빨리 풀숲에 몸을 숨겼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마저 사라지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정수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훔쳐보는 게 취미인가 보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은 도련님, 아이작은 방금 전의 소란이 무색할 만치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리아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솔직한 감상을 뱉었다.

“제가 좀… 좋지 않을 때 왔나 보네요. 두 분 사이가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보다시피.”

“…소, 소공작님께서 미워서 그러시는 건 아닐 거예요! 저도 동생하고 평소에는 사이좋은데요, 그래도 가끔 싸울 때도 있고…!”

“…….”

“아니, 뭐, 원래 형제자매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니까요.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고! 싸울 수도 있지요!”

말하고 난 뒤, 너무 허물없이 굴었나 싶어 달리아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사용인이 내뱉기에는 다소 예의 없는 화제였지만 아이작은 아랑곳 않고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이런 걸 싸운다고 해야 하나. 그냥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지. 그래도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로는 마주칠 일이 없어서 편했는데.”

방학인가 봐,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하얗고 곧은 손은 보기와 다르게 무척이나 힘이 셌다. 엉망이 된 치맛자락을 손으로 툭툭 털고 있으니 아이작이 헝클어진 머리를 손수 정리해주었다.

“막스와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자들에게 손버릇이 안 좋거든. 특히 신입 하녀들에게는.”

달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아이작의 말을 상기했다.

손버릇이 안 좋다니.

방금 전 아이작에게 악다구니를 쓰던 모습도 놀라웠는데, 피해자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소공작에 대한 불순한 소문들이 모두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초상화로 보던 막시밀리언 유프겐슐트는 근엄하고 선량한 이미지의 귀족이었다. 물론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어린 달리아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공작 저의 사람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프겐슐트니까. 귀족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고귀한 태생이니까.

“귀족이라고 해도 별거 없어. 그냥 똑같은 인간이지.”

속내를 꿰뚫는 말에 달리아가 흠칫 눈을 들어 올렸다.

숲을 바라보고 있던 새카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달리아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내내 입꼬리에 머물러 있던 웃음기는 어디로 가고, 씁쓸한 무표정이 그의 얼굴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래. 똑같아.”

담담한 말과 함께 표정 없는 얼굴 위로 가늠할 수 없는 허무가 덧씌워졌다.

주어가 불분명한 말은 달리아에게 하는 말이 아닌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 같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입을 다문 채 검은 머리카락 위에 쏟아지는 햇볕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 * *

침침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던 우익관이 평소와 다른 환한 빛으로 밤을 밝혔다.

후계자의 귀환으로 저택은 평소보다 훨씬 활기를 띠었다. 공작 부인과 아가씨, 단둘만 오가던 다이닝 룸에 공작과 소공작이 합세하니 시중을 드는 사용인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달리아 또한 굳은 얼굴로 시종들의 잡무를 도왔다. 평소에 만날 일 없는 공작가의 일원을 전부 조우하니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식기를 준비하는 풋맨의 어깨 너머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잔 더.”

막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와인 잔을 치켜세웠다. 테이블 매너 따위는 내팽개친 듯 방만한 모습에 공작이 작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가족이 전부 모였지만 식탁 위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숨 막힐듯한 정적 아래,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분위기를 희석하고 있었다.

빈말로라도 화목하다 할 수 없는 분위기였지만 앉아 있는 네 사람에게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유프겐슐트라는 허울로 모여 있는 그들에게는 사실, 분위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보일 필요는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의 넓은 도량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공작 부인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학기가 끝나려면 아직 일주일은 더 남지 않았니.”

공작 부인이 그릇을 물리며 막스에게 말을 걸었다. 연거푸 포도주를 들이켜고 있던 막스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학교에서 웃기지도 않는 말을 들었거든요. 도저히 방학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어야 말이죠.”

막스는 남아 있는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켠 뒤 일그러진 얼굴로 공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사생아 새끼를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한 사람이 정말 아버지였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던 공작 부인이 뒤늦게 뜻을 이해하고서 홉뜬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당신, 그게 정말이에요?”

“아버지께 물어보실 필요 없어요. 제가 직접 입학원서를 확인했으니까.”

느물거리는 아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기를 더욱 괴롭혔다. 배신감을 이기지 못한 공작 부인이 체면도 잊고 빽 소리를 질렀다.

“당신 미쳤어요? 어떻게 그 아이를 퍼블릭 스쿨에 보낼 생각을 해요! 아무리 싸고돌아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그런 애를 귀족들만 있는 곳에…!”

“막스.”

내내 묵묵부답이던 공작이 관심을 보인 곳은 부인이 아닌 막스였다. 찬기가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위압적인 기운을 머금고 아들을 투영했다.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아이작의 일에는 왜 참견하느냐.”

막스는 공작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가슴을 폈다.

주눅들 필요 따위는 없었다. 잘못한 건 아버지였지 막스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게 참견할 일이 아닙니까? 가문의 위신이 걸린 일인데. 그놈과 같은 학교를 다니면 제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 체면?”

“퍼블릭 스쿨의 로열 클럽은 저와 같은 고위 귀족 아니면 정부 자제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어떻게, 아무리 유프겐슐트라해도 어미도 모르는 사생아 놈을.”

“막시밀리언.”

공작이 손을 들어 올려 막스의 말을 막았다. 흥분한 막스의 눈에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들어찼다.

“네가 아이작을 싫어하는 건 익히 알지만 본질을 왜곡하지는 말거라.”

“…무슨 말씀을.”

“그렇게 바닥을 기는 성적으로 체면 운운하고 싶더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막스가 싸늘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입꼬리만 살짝 기울여 웃는 그 모습은 막스가 지독하게 증오하는 그의 이복동생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막스가 천천히 와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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