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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공사는 저녁이 이슥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종례까지 끝내자 드디어 기진맥진한 몸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달리아는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기숙사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나 곧, 종례를 끝내고 나온 델마로 인해 걸음이 붙들렸다. 그렇게 구석으로 달리아를 끌고 간 델마가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달리아. 살롱에 있던 쿠션들 전부 세탁실로 옮겼어?”
갑작스레 붙들린 것과 달리 델마가 꺼낸 화제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달리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금사로 수놓은 것들은 업체에 맡겨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만 전해드렸어요. 커버는 전부 교체 했구요.”
“그래. 금요일은 커튼이랑 매트 전부 청소하는 날인 거 알지? 회의실 카펫도 새로 바꿀 거니까 잊지 말고.”
“네.”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응시했다.
달리아는 슬슬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델마의 반응이 영 이상해서 묵묵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달리 중요한 용건도 아닌데 굳이 불러세워서 강조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못마땅한 얼굴로 한 점을 쏘아보던 델마가 낮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아까 별채에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지?”
“네. 아까 다녀온 뒤에 보고 드린 대로예요.”
“도련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별채에 다녀온 뒤, 물건 잘 전해드렸다고 보고했을 때에는 무뚝뚝하게 알았다고만 하더니 왜 다시 묻는지 몰라 달리아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델마는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뜩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 봐.”
늘 철두철미한 모습만 보이는 델마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매듭지은 그녀가 달리아의 등을 툭 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왜 그러나 싶어 다시 한번 돌아봤지만 델마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내일 봐, 하고 뒤돌아설 뿐이었다.
델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달리아는 기숙사에 들어선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녀와의 대화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잠들기 전, 내내 기다리던 편지를 전해 받은 덕분이었다.
“뭐야? 누구 편지길래 그렇게 기분이 좋아?”
침대에 기대 열심히 머리를 빗질하던 에디나가 활짝 웃고 있는 달리아를 보고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달리아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로렐한테서 온 편지야.”
“로렐? 네 여동생?”
“응. 주소 알려 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편지가 왔어. 보고 싶다고 난리네.”
달리아와 장장 8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여동생. 로렐은 처지가 궁핍해 고아원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달리아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꼼꼼하게 종이를 읽어내린 달리아가 재차 편지를 훑고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성유물을 대하듯 편지를 대하는 모습에 에디나가 실소를 흘렸다.
“아무튼 동생이라면 끔찍하네. 건강은 좀 어떻대?”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곧 겨울이니까…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그러게. 폐가 약하다고 했지? 겨울에는 특히 신경 쓰이겠다.”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에 적혀 있는 이름을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로렐 벨로흐. 삐뚤어진 글씨에서 온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 월급 받으면 새 담요를 사서 보내야겠어.”
아기 때부터 천식으로 고생하던 로렐은 체력도 약해서 찬 바람을 쐬면 곧장 자리에 드러눕고는 했다. 특히 겨울이 되면 기침이 심해져서, 약이 없으면 발작을 일으켜 달리아의 속을 퍽 끓게 했다.
구빈원에서는 의식주만 책임질 뿐 로렐의 약값을 댈 만한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달리아는 구빈원 일을 도우면서도 종이 장식 만들기, 삯 바느질 따위의 부업을 밤낮없이 이어가야 했다.
달리아가 이 멀고 먼 헬만 땅까지 온 것도 로렐의 약값을 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봉급을 받는 족족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서는 남는 돈을 전부 구빈원으로 보냈다.
“원장 선생님이 새로운 의사를 찾아본다고 하셨거든. 약도 좋은 걸로 바꿔보겠다고 하셨으니까… 올해는 아프지 않고 조용히 겨울났으면 좋겠어.”
양모 담요는 비싸겠지? 덧붙이며 달리아가 침대 위에 발랑 드러누웠다.
고생이다,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옆 침대로부터 안쓰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달리아는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애써 활기찬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있잖아, 에디나. 오늘 엄청 이상한 일 있었다? 나 오늘 델마 심부름으로 거기 갔어.”
“어디?”
“별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에디나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별채? 설마 북쪽 숲에 있는 그 별채?”
“응.”
“왜? 델마가, 아니 왜? 거기 진짜 그… 있어? 진짜로 있어?”
고개를 끄덕이자 허어, 하는 탄식이 흘러들어왔다. 에디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달리아를 응시하다가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열었다.
“델마가 별채 전담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그래서? 어쩌다 간 건데?”
“오늘 벽난로 청소 때문에 난리였잖아. 델마가 바쁜데도 꼭 오늘 전해줘야 한다고 해서 책을 들고 갔거든.”
“응.”
“갈 때는 걱정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으스스하잖아.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 청소도 잘 하는지 깨끗하고 안에 책도 엄청 많고…”
“그거 말고!”
달리아의 침대로 뛰어든 에디나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주근깨 박힌 동그란 뺨이 흥분으로 인해 은은히 붉어졌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가 신경 쓰이는지 에디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유령 만났어?”
유령이라니.
달리아는 소년이 남긴 투명한 자취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유령, 정말 어울린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작은 도련님 말하는 거야?”
“그래! 작은 도련님. 엄청 음침하고 못생겼다고 했잖아. 등도 굽었다던데 진짜 그래?”
“아니. 등이 굽은 사람은 별채의 하인이야. 어쩐지 험악하고 으스스한 게 그 사람이 진짜 유령 같더라. 그런데 도련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단어를 골랐다.
그 분위기, 그 외모를 표현할 만한 단어가 마땅히 생각나질 않았다.
뭐가 어울릴까 연상하던 달리아는 창세 신화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떠올리고 보일 듯 말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령이라기보다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어.”
도화지처럼 새하얀 피부 위, 그와 대비되는 어두운 눈동자.
눈동자 위로 느리게 깜박이는 새카만 속눈썹과 어둡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던 부드러운 흑발.
오후의 햇살 아래 한가로이 앉아 있던 소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것처럼 초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퍼즐 위로 나붓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왠지 목덜미가 근질근질해져서, 달리아는 손을 들어 괜스레 목덜미를 슥슥 쓸었다.
“천사는 무슨 천사야. 어떻게 생겼냐니까? 응? 주인마님은 흉측하고 못생겼다고 매일 욕하시던데?”
“……”
“야아, 달리아! 내 말 안 들려?”
에디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계속 말하라 재촉했지만 달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멍한 머릿속에는 자신의 거칠거칠한 손과 전혀 다른 그 하얀 손과, 빌린 책을 언제쯤 돌려주러 가야 하나 하는 고민만 둥실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 * *
작은 도련님과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튿날, 청소를 끝마치고 델마에게 검사를 받던 달리아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소식에 입을 벌렸다.
“제게 별채 담당을 맡긴다고요?”
델마는 미간을 찡그린 채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침음을 흘렸다. 언짢음, 걱정, 당혹이 한데 섞인 표정으로 먼 곳을 쏘아보던 델마는 다시 달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담당까지는 아니고 그냥 심부름이 있을 때마다 나 대신 가 달라는 소리야. 어차피 별채에 관련한 대부분의 일은 후버가 알아서 하니까. 왜 별채에 나랑 비슷한 또래에 등이 구부정한 남자 있었지?”
별채에 들어서기 전,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을 대하던 남자를 떠올리고서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후버야. 작은 도련님이 저택에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사람인데 성격이 좀… 무뚝뚝하고 껄끄럽긴 한데. 뭐 자주 마주칠 일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정리된 청소도구들을 지그시 눈으로 훑으며 델마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작은 도련님께서 너를 지명하셨으니까, 앞으로 심부름할 일이 있으면 부탁 좀 하자.”
“도련님께서 직접 저를 지명하셨어요?”
“그래.”
또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남이 이뤄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달리아는 곤혹스러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시무룩한 모습을 본 델마는 혹시 싫어서 이러는 건가 싶어 달리아의 팔을 붙잡고 애써 위로를 건넸다.
“작은 도련님 소문이 워낙 안 좋으니까 걱정이 많겠지만… 어제 직접 만나 봤잖아. 나쁜 분은 아니야. 주인마님과 소공작님이 작은 도련님을 워낙 싫어하시니까 소문이 그렇게 난 것뿐이지.”
작은 도련님, 아이작 유프겐슐트는 어느 날 갑자기 공작이 외부에서 데리고 온 자식이었다.
당연히 어미도 모르는 사생아를 공작 부인이 예뻐할 리 없었다. 그녀는 아이작을 보자마자 저주를 퍼부으며 별채로 쫓아냈다.
그로부터 몇 해가 흐른 지금도 공작 부인의 증오는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그녀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사용인들 또한 아이작을 쉬쉬하기 바빴고, 그 결과가 지금에 이르렀다.
아버지인 공작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별채의, 아니, 저택의 유령. 세간에서 그를 부르는 유령이란 별칭에는 공작가의 어두운 이면이 담겨 있었다.
델마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충고를 이어갔다.
“작은 도련님과 얽혀서 좋은 꼴 본 애들이 없으니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심부름할 일이 있으면 동쪽으로 돌아서 조용히 다녀와. 알겠지.”
“네. 조심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 말했지만 델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연신 불안한 눈치를 던졌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걱정을 충분히 알 것 같아 달리아는 묵묵히 델마의 시선을 견뎌냈다.
한참 동안 어린 하녀를 쳐다보던 델마가 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달리아에게 내밀었다. 검은 리본이 장식된 포장지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품이라는 걸 은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지금 바로 전해드리고 와.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달리아는 품 안에 봉투를 집어넣고서 잰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동쪽 정원을 지나 북쪽 숲에 다다르기까지, 어제와 달리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발을 내딛던 달리아는 별채 앞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