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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놓인 건 퍼즐이었다. 그저 새하얀 색으로만 가득 차 있는 직소 퍼즐.
보는 것만으로 질릴 만큼 크고 하얀 퍼즐은 놀랍게도 완성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신기해?”
듣기 좋은 미성이 침묵 사이로 잔잔히 퍼져나갔다. 예상치 못한 고운 목소리에 달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하얀 목덜미가 달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연초록빛 눈동자 속에 아주 느린 속도로 상대의 얼굴이 들어찼다.
그렇게 소년의 얼굴을 담은 순간,
원래도 크게 뜨고 있었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변했다.
“백야라고 하는 퍼즐이래.”
…아이작 유프겐슐트.
별채의 유령이자 공작가의 치부, 창부에게서 태어난 저주받은 사생아.
악명이 자자한 그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달리아는 그런 별명이 모두 무색해짐을 깨달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흑발. 그 아래 빛을 한 번도 쬐지 않은 것만 같은 새하얀 얼굴 위로 무구함이 엿보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이며 달리아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건, 이 얼굴은…
“운이 좋구나. 이틀 내내 매달렸는데 지금 막 완성하려던 참이었거든.”
소년이 손안에 든 퍼즐 조각을 내보이며 은근슬쩍 눈시울을 접었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달리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달리아를 바라보던 덤덤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파문처럼 천천히 번져갔다.
…아니, 아니야.
이래서 유령이라고 하던 거였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달리아가 홉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작은 도련님을 별채의 유령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공작의 사생아라서 가족들의 배척을 받기 때문도, 추한 외모 때문에 별채에 틀어박혀 밤에만 나다닌다는 소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현실감 없는 외모 때문에.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색투명한, 어딘지 초월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책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춘 아이작이 재차 고개를 돌려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입을 벌린 채 멍하게 있던 달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품 안에 안고 있던 꾸러미를 소년에게 건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건을 감싼 종이가 벗겨졌다. 달리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쩐지 무게가 묵직하다 싶었는데… 역시 책이었네요.”
“몰랐어?”
“네. 그냥 전해드리라고만 들었거든요. 책인가 싶긴 했는데 확신이 안 섰… 어어!”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풀린 꾸러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드러난 책은 언젠가 보았던 모험소설의 속편이었다. 다음 이야기가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던, 바로 그 책.
책을 바라보는 달리아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그러자 포장을 뜯던 아이작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왜? 관심 있어?”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과 다르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달리아를 바라보던 아이작의 얼굴 위로 모호한 미소가 슬쩍 피어올랐다.
“글 읽을 줄 아니?”
달리아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반응에 아이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형편이 넉넉한 집이야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 글을 가르치겠지만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집안 살림이 팍팍한 경우가 많아 대부분 글을 모른다.
때문에 하녀가 책에 흥미를 보이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달리아는 그의 시선에서 속내를 읽고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게… 살던 곳 근처에 서점 골목이 있었거든요. 책을 오래 묵히면 퀴퀴한 냄새가 나서 서점 주인들이 냄새를 빼려고 가끔 거리로 빼놓는데, 거기 동화책이 엄청 많았어요.”
“거기서 글을 배웠어?”
“아뇨. 그건 아니고요.”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책들이 수없이 쌓여 있는 진풍경. 기억을 떠올린 순간 달리아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걸렸다.
“여동생이 그런 책들을 보고서는 읽어 달라고 하도 졸라서요. 그냥… 읽어 주고 싶어서 혼자 배웠어요.”
조용히 달리아를 바라보던 아이작이 비슷한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독학으로 글을 배우다니 대단한걸.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시겠어.”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작이 맞장구를 쳤지만 달리아는 우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의아한 얼굴로 달리아를 올려다보던 그가 이런, 하고 뒤늦게 탄성을 흘렸다.
“그렇구나. 부모님이… 몰랐어. 실례였다면 사과할게.”
“아, 아니에요! 실례는 무슨, 괜찮아요.”
순순히 사과하는 태도에 달리아가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무리 별채에 따로 산다고 해도 그는 공작가의 일원이자 유프겐슐트의 핏줄이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같이 하찮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정말 이상한 도련님이라 생각하며 달리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를 기울인 채 손가락 움직임을 지켜보던 아이작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달리아. 달리아 벨로흐예요.”
달리아 벨로흐. 나직이 이름을 읊은 아이작이 눈동자만 움직여 달리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과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하지만, 원한다면 여기 있는 책 아무거나 빌려 가도 돼.”
희고 섬세한 손가락이 벽면에 늘어서 있던 책장들을 쭈욱 훑었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달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소년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어차피 다 읽은 지 한참 된 것들이라 내겐 쓸모가 없으니까. 누군가 읽어 주는 쪽이 나을 거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비싼 책들인데요. 저 같은 사람이 빌려 가는 건 실례가 아닐지…”
말과 손짓으로 열심히 사양하고 있었지만 들뜬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 독서만큼 무해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달리아는 독서를 아주 좋아했다.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 또는 누군가의 상상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기분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우면서도 즐거웠다. 책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달리아는 구빈원의 고아가 아닌 먼 사막 나라의 공주님이나 바다를 호령하는 제독이 될 수 있었다.
구빈원에 있던 책들은 모두 모서리가 다 닳아 너덜너덜해질 만큼 읽고 또 읽었고, 가끔 오래되고 해져 상품 가치가 없는 책들이 기부품으로 들어오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하곤 했다. 그렇게 배운 지식으로 동생들을 가르치고, 원장 선생님의 보조도 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으니까요…”
달리아는 말을 흐리며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을 빌려준다니. 천한 신세가 안쓰러워 의례상 하는 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시선은 책장에서 떨쳐 나오질 못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아이작이 손수 몸을 일으켜 책장에서 서너 권의 책을 빼냈다. 마지막으로 달리아가 보고 싶었던 소설의 속편을 가장 위에 올린 뒤, 그대로 그녀의 품에 책을 안겼다.
“정말이야. 자. 사양하지 말고.”
팔 안에 내려앉는 묵직한 느낌에 달리아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책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지금 막 갖고 온 책인데요. 도련님께서 먼저 읽으셔야지요.”
“먼저 읽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양보할게. 다른 것도, 다 읽으면 또 빌려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가느다란 체구와 달리 아이작은 달리아와 시선을 나란히 둘 만큼 키가 컸다. 동공 속에 달리아를 담고서 그가 아주 살짝 눈시울을 접었다.
“또 와. 달리아.”
마침표처럼 내려앉은 속삭임이 지나치게 달콤하다고 느낀 순간, 소년의 앳된 얼굴 위로 물거품같이 덧없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 *
끼익, 희미한 문소리와 함께 달리아가 방에서 물러났다.
낯선 방문자가 사라진 자리에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 별채를 감싸는 건 작게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와 바람이 웅웅대는, 숲이 우는 소리뿐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방문을 쳐다보던 아이작은 시선을 옮겨 완성된 퍼즐을 내려다보았다.
고운 얼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습관과도 같은 그 표정은 즐거움이 아닌 지루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재미있을까 싶어 시작한 건데, 5000피스 짜리 퍼즐은 지겨운 일상에 또 다른 무료함을 더할 뿐이었다.
똑같은 하루, 반복되는 일상.
오늘도 그저 그런 하루가 지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 파란을 일으켰다. 아이작의 얼굴 위로 평온한 미소 대신 난처한 미소가 스물스물 퍼져나갔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유쾌한 웃음이었다.
“도련님.”
노크도 없이 들어온 남자는 별채의 유일한 사용인이자 아이작의 유일한 충신, 후버였다. 아이작이 왜 그러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후버가 경계 서린 눈으로 방 안을 훑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응. 아무것도.”
“쓸데없는 사람들은 절대 얼씬거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하녀장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아니, 됐어.”
아이작은 뒷목을 쓸며 창가로 고개를 틀었다. 말간 눈동자 속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찼다.
“특이한 하녀야. 내 소문을 모르는 모양이지. 다들 만나면 흠칫흠칫 떨거나 피하기 바쁜데 그 애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라고.”
불결한 핏줄, 공작가의 치부, 별채의 유령.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은 이미 본명보다 익숙했다. 불쾌함과 꺼림칙함이 한데 뭉친 시선들, 혹여 가까이 다가올까 망설이는 몸짓들. 그 모든 것들은 아이작에게 있어 공기와 다르지 않았다.
불운을 재단하는 건 행복에 단 한 번이라도 발을 담근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다. 애정도 미움도 함께 겪어봐야 격차를 알 텐데, 태어났을 때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던 아이작에게는 배척받는 삶이란 일상과 같았다.
그러니 달리아라는 하녀는 자신을 보고 불쾌한 시선을 던졌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그게 옳았다.
그런데 어땠지.
자신을 마주한 순간, 초봄의 싱그러움을 고스란히 담은 초록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지던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이윽고 반짝거리며 아이작의 모습을 투영하던 그 눈동자에는 난생처음 보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감정의 구분이 둔한 아이작으로서 그 감정이 경외와 동경이라는 걸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초록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게 밝고 긍정적인 무언가라는 것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
숲을 바라보는 눈길에 기묘한 기대가 서렸다.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바닥에 놓인 하얀 퍼즐로 시선을 떨궜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손이 퍼즐 가운데를 향했다.
하얀 퍼즐에 서서히 실금이 갔다. 망가져 가는 모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이작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퍼즐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또 왔으면 좋겠네.”
그대로 손을 크게 들썩이자 촘촘히 얽혀 있던 퍼즐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기껏 완성한 퍼즐을 뭉그러트리며 아이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