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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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달리 흘러나온 문장은 귀족 아가씨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다소 거칠었다. 게다가 하녀들에게는 가히 신과 같은 존재인 미시즈 프라다를 저런 식으로 조롱하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어버린 달리아와 다르게 시녀는 까르르 웃으며 소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이참, 아가씨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그런 농담 하시면 별로 재미없어요.”

“농담 아니야. 저 애, 정말로 꽤 반반하잖아. 뭐 하녀가 예뻐 봤자 좋을 것도 없겠지만.”

거울로 달리아를 훑어보던 카를라가 푸른 기가 도는 흑발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바라보는 시선이 썩 곱지 않다 느껴진 순간, 휘어져 있던 눈시울이 수평을 그리더니 눈매에 서린 웃음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카를라는 입으로만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너 같이 예쁘장한 애들을 아버지나 막스가 가만 놔둘 리가 없을 텐데…… 너도 조심하렴. 까딱하다가는 저 별채의 유령처럼 될지도 몰라.”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끔벅거리던 찰나 시녀가 아가씨! 하며 카를라를 타박했다.

뭔가 들어서는 안 될 걸 들은 듯한 기분에 달리아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물러났다. 등 뒤로 맑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은 건 달리아가 청소를 마무리하기 위해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여덟 가주의 초상과 조각상이 늘어서 있는 갤러리 가장 끝에, 카를라가 말했던 아버지와 막스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8대 가주, 게헤른 유프겐슐트 공작과 차기 후계자인 막시밀리언 유프겐슐트.

저택의 주인인 게헤른과 막스는 초상화 속에서 근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하녀들에게 손을 댄다고?

“아가씨도 참. 대체 무슨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건지…”

두 사람을 직접 곁에서 모셔본 적은 없지만, 매일 갤러리를 청소하는 달리아로서는 카를라의 말이 그들을 음해하는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졌다.

달리아는 먼지떨이를 꺼내 액자를 털며 동경 어린 시선으로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조심할 게 뭐가 있을까.

공작님도 도련님도, 혹여 말이라도 섞게 되면 가문의 영광이지.

…가문 따위는 애초부터 있지도 않으니 별 의미 없으려나.

피식 웃으며 청소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카를라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왜 그런 걸까. 그녀의 말을 재차 곱씹던 달리아는 문득 마지막 문장을 돌이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 위화감이 느껴져서 뭔가 싶었는데, 낯선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별채의 유령……”

본관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별채. 그곳에 유령이 살고 있다고 듣긴 했다.

진짜 유령은 아니지만 공작가의 사람들도, 사용인들도 모두 유령처럼 생각한다던 그런 존재가.

뭐 어차피 별채는 갈 일도 없고 자신 같은 말단 하녀가 그곳에 있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을 테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달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지런하게 손을 놀렸다.

* * *

“달리아. 청소 다 끝냈어?”

룸메이트인 에디나가 먼지투성이인 헤드캡을 탁탁 털며 방에 들어섰다.

대체 어디를 청소하고 온 건지 늘 새하얗던 헤드캡이 새카만 먼지로 엉망이 되었다. 마른걸레로 탁자를 닦고 있던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쭉 폈다.

“응. 갤러리랑 서재는 다 끝났어. 이제 계단 청소만 하면 끝나.”

“그래? 잘됐다. 지금 메인 홀에 있는 벽난로 청소한다고 다들 난리야. 계단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너도 같이 가자.”

“벽난로? 그거 조만간 새 걸로 공사할 거니까 놔두라고 델마가 그랬는데.”

“그게 오늘이야. 지금 벽 전체 다 뜯고 벽에 걸린 장식들 청소하고 있어. 청소 끝나고 공사 마무리한다니까 얼른 가자!”

더러운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는 건 꽤 보람찬 일이지만 그 거대한 벽난로를 청소한다고 생각하니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달리아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심정으로 에디나의 뒤를 따랐다.

메인 홀에 들어서자 허물어진 벽난로 앞에 열댓 명의 하녀들이 달라붙어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인 여자 다섯 명이 들어가도 차고 넘칠 만큼 커다란 벽난로 입구에는 평소 벽난로 근처에 장식되어 있던 액자와 촛대, 태피스트리와 그림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액자 하나만 해도 서너 달 치 봉급은 우스울 만큼 비싼 물건들이라 걸레질하는 하녀들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뭐부터 청소해야 하나 달리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 벽난로 앞에서 하녀들을 지휘하고 있던 상급 하녀가 무심한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안 되겠다. 그을음이 너무 심해서 여자들만으로는 안쪽 청소까지 무리야. 에디나.”

“네, 델마.”

“안제스 할아범 좀 불러와. 축사 근처에 있을 거야. 사다리랑 굴뚝 청소용 쇠솔도 같이 갖고 오라고 전해.”

군더더기 없는 명령에 에디나가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상급 하녀인 델마는 금속 광택용 왁스를 주머니에서 꺼내 달리아에게 건네려다가 멈칫하며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간을 확인한 델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혀를 찼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던 델마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무슨 일인가 싶어 달리아가 눈치를 살피던 때였다.

“달리아. 너 견습 기간 끝났지?”

“네. 어제 막 미시즈 프라다가 정식으로 채용하겠다고 말씀하셔서 오늘부터 본관 전담이 되었어요.”

델마는 팔짱을 낀 채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초리로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열여섯.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달리아는 손도 눈치도 빨랐다. 어린 하녀들 특유의 허세나 산만함 따위 없이 그저 묵묵하게 일만 하는, 나이답지 않은 성실함이 마음에 들어 델마도 눈여겨보고 있던 신입이었다.

이 아이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델마는 달리아의 성품을 믿고 고민을 매듭지었다.

“별채에 작은 도련님이 계신 거 알지? 전해드릴 게 있는데 네가 대신 좀 다녀와.”

델마는 구석에 놓여 있던 트롤리에서 네모난 헝겊 꾸러미를 꺼내 달리아에게 내밀었다.

작은 도련님이라는 말에 달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작은 도련님이라는 말보다는 유령이라는 별칭이 더 익숙한 별채의 묘한 존재. 그 유령이 누군가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거론된 건 처음이었다.

달리아는 엉거주춤한 손길로 꾸러미를 받아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다녀오는 건 상관없지만…… 저희 같은 일반 하녀들은 별채에 다가가면 안 된다고 미시즈 프라다께서 신신당부하셨는데요.”

“그렇긴 한데 지금 내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이 서재거든? 이 시간이면 아마 거기에 계실 거야. 이것만 전해드리고 와.”

마지못해 받기는 했으나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어 머뭇거리자 델마가 빨리 다녀오라며 어깨를 툭 쳤다. 달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꾸러미를 안아 들고 발길을 돌렸다.

소란스레 움직이는 하녀들을 뒤로하고 본관을 나섰다. 정원을 지나쳐 북쪽 숲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여태껏 귀를 채우고 있던 소음 대신 바람 소리와 파스스 잎들이 우는 소리가 고막을 가득 메웠다.

수북이 쌓인 낙엽으로 인해 발치에서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을이 무르익은 숲에서는 메마른 장작 냄새가 부드럽게 허공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이런 계절이 되었구나, 생각하며 달리아는 울타리 문을 열고 별채 앞마당에 들어섰다.

건물에 다가갈수록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두려움인지 호기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엄습했다. 달리아는 꾸러미를 꼬옥 끌어안고서 별채로부터 시선을 돌려 바닥에 어른거리는 빛무리들을 눈으로 좇았다.

“누구요?”

문간에 다다랐을 때쯤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에 달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남자 한 명이 별채 문 앞에 서서 경계심이 가득한 눈길로 달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관에서 일하는 하녀인가 본데… 미시즈 프라다한테 말 못 들었어?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돌아가.”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걸걸한 목소리와 달리 꽤 젊어 보였다. 달리아는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어깨를 펴고 꾸러미를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상급 하녀님의 심부름으로 온 거예요. 작은 도련님께 갖다 드리면 아실 거라고 했어요.”

“상급 하녀? 누구?”

“델마 씨요.”

“델마…… 아, 델마 퀀츠.”

이름을 중얼거린 남자가 입을 다문 채 마뜩잖은 표정으로 꾸러미를 쳐다보다가 묵묵히 문을 열고 턱짓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달리아는 혹여 또 꼬투리가 잡힐까 싶어 잰걸음으로 바쁘게 계단을 올랐다. 뒤통수에 걸걸한 목소리로 예의니 빨리 가라느니 하는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음산한 외관과 달리 별채 내부는 꽤 청결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위협적인 남자의 등장으로 쿵쿵 울리는 심장은 도통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아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코끝에 스미는 걸 느끼며 2층 가장 오른쪽, 델마가 일러주었던 서재 앞에 섰다.

“작은 도련님. 델마 씨의 심부름으로 물건을 전해드리러 왔는데요.”

노크를 한 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애써 힘을 주어 말을 끝마쳤다. 짧은 정적 끝에 아주 작게 들어와,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달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고리를 붙잡았다.

방은 생각보다 아주 넓었다. 한낮임에도 창마다 길게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작은 도련님은 음침한 걸 좋아하나 싶었는데, 벽면에 길게 늘어선 책장을 보니 그냥 종이가 햇살에 바래는 게 싫어서 커튼을 쳐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늘이 내려앉은 방구석, 유일하게 커튼이 열려 있는 자리에 유령이자 작은 도련님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등을 지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책상보다 더 커다란 크기의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걸까 궁금해 가까이 다가간 달리아는 바닥에 놓인 게 종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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