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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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말해 별로였다. 

“달리아 벨로흐입니다.”

소녀는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아까와 같이 바른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이 꽤나 엄한 집안에서 자라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미시즈 프라다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무감한 눈으로 아이를 훑기 시작했다.

“벨로흐 양. 나이가 어떻게 되죠?”

“올봄에 열여섯이 되었습니다.”

“경력이 있는 것 치고는 많이 어리네요.”

결 좋은 갈색 머리와 해맑은 초록빛 눈동자. 손톱도 피부도 청결하고 옷차림도 깔끔했다.

아마 평범한 하녀장이었다면 보자마자 채용하겠다 할 만큼 단정한 용모였지만 미시즈 프라다는 묵묵히 미간을 찌푸렸다.

하녀장으로서의 경력만 22년. 사람 보는 눈에 있어 누구보다 매서운 눈길을 가진 미시즈 프라다에게는 아이의 본질이 뚜렷이 보였다.

“흐음……”

여자, 아니 소녀라고 지칭하는 게 더 나을법한 눈앞의 여자아이에게서는 이 나이대의 소녀들이라면 으레 하나쯤 하고 다닐 만한 머리핀이나 브로치 따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자도 없는지 긴 머리를 그냥 치렁치렁 풀고 다니는 모양새가 영 보기에 거슬렸다. 장신구야 취향이라 쳐도 옷차림을 훑어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싸구려 옷감으로 지은 낡은 드레스, 소매가 닳아 반질반질한 재킷. 발치에 놓인 여행 가방은 대대손손 물려 쓴 건지 가죽이 하얗게 떠 있었다.

빈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에 미시즈 프라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왔다고 했나요?”

소개장을 들추며 시큰둥하게 묻자 달리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멕폰 남작 부인 저택에서 반년 동안 일했습니다. 저택 관리 하녀로 일했고요. 일 잘한다는 칭찬 많이 들었습니다. 소개장도 남작 부인께서 써 주신…”

“아니, 그거 말고. 어디 출신이라고 했죠?”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에 달리아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부디 자신의 대답이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달리아는 양손을 맞잡고 공손히 대답했다.

“체레코팔츠의 투란 구빈원… 출신입니다.”

구빈원이라는 단어에 미시즈 프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행색이 초라하다 싶었는데.

고아인 아이들은 기본예절도 제대로 못 배워 가르쳐야 할 게 많고, 대부분 손버릇이 나쁘다. 속는 셈 치고 몇 번 채용해봤지만 모두 끝이 나빴다.

이 아이라고 별다를 게 있을까.

고민하던 미시즈 프라다는 소개장에 찍힌 인장을 보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쨌거나 눈앞의 소녀는 악명이 자자한 멕폰 남작 부인의 저택에서 일하던 아이였다. 게다가 소개장까지 써서 보냈다는 건 꽤 마음에 든 하녀라는 뜻이니 이 아이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현재 미시즈 프라다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택에는 일손이 너무 부족했다.

긴 고민 끝에 미시즈 프라다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저택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지원한 거겠죠?”

자리에서 일어난 미시즈 프라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숲이 어우러진 정원 곳곳에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깃발에 수놓인 은색 늑대는 이 서북부 땅에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가문을 상징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벨로흐 양. 당신은 우리 저택과 격이 맞지 않아요.”

단호한 말에 달리아가 퍼뜩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그게, 혹시 제 출신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고아들 손버릇이 나쁘다는 건 편견인…”

“끝까지 들어 봐요.”

손을 들어 말을 막으며 미시즈 프라다가 고개를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뽑지 않을 텐데 이번 달에 하녀 셋이 동시에 저택을 관뒀어요.”

미시즈 프라다는 허리를 세운 채 반듯한 자세로 달리아를 응시했다.

“저택이 워낙 넓어서 늘 인원이 모자랐는데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셋이나 관둬버려서 지금 일손이 많이 부족해요. 그리고 벨로흐 양은 멕폰 남작 부인의 소개장을 들고 왔죠. 하녀들마다 한 달을 못 가서 관둔다던 그 까탈스러운 남작가의 소개장을 말입니다.”

“……그 말씀은…”

“뭐… 그렇네요. 남작가에서는 어떤 식으로 일했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던 달리아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보며 미시즈 프라다 또한 보일 듯 말듯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한번 믿어보지요. 한 달 지켜보고 잘 해낸다 싶으면 정식으로 채용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부인!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너무 기쁜 나머지 작게 소리를 내지른 달리아가 서둘러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공작가의 하녀라니.

이 저택은 봉급도, 복지도 남작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곳이었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직업소개소의 알선이 없으면 면접조차 못 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일 거라 생각하고 온 참이었는데, 설마 채용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달리아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고서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보다 못한 미시즈 프라다가 그만 인사해도 된다 말렸지만 달리아는 하염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일 못하면 한 달 후에 내쫓길 수도 있다는 말에도 그녀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나는 오웬 프라다예요. 저택의 총괄 하녀장이고 다들 미시즈 프라다라고 부릅니다. 일단 사용인 기숙사부터 안내해 줄 테니 자세한 건 그쪽에서 얘기합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시즈 프리다가 차분한 걸음으로 문 앞에 섰다. 삐쩍 마른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열쇠 꾸러미가 하녀장의 허리춤에서 쉴새 없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달리아는 여행 가방을 소중히 안아 들고서 들뜬 걸음으로 하녀장의 뒤를 따랐다. 녹음이 서린 연녹빛 눈동자 속에 희망찬 미래가 어른거렸다.

* * *

오십여 년 전. 제국의 호사가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으로 다이아몬드와 황실, 그리고 귀족들을 꼽았다.

언제고 광택을 잃어 탁해진다 해도 그 가치와 본질은 여전히 찬란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들의 말은 과장도 허세도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과 반세기가 지난 현재.

황실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건립되면서 대영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토를 빼앗긴 채 무일푼으로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한때 가치 있다 여겨지던 것이 시간의 흐름에 삭아 퇴색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귀족의 가치가 이렇게까지 급락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부유층의 몰락을 바라던 공화국민들에게 귀족이라는 단어가 창부나 거지로 통용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공화국의 근간이 된 22명의 대영주들은 희소성으로 인해 그 위상이 하늘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그 중심에 유프겐슐트 공작가가 있었다.

서북부의 광활한 영토, 헬만을 다스리는 유프겐슐트 가문은 본디 노에사 산맥 서부의 국경을 지키는 변경 후로서 오랜 세월 영주민들의 신임을 쌓아온 명문가였다.

황실은 유프겐슐트를 그저 산맥을 지키는 오래된 늑대라며 하찮게 여겼지만 이를 비웃듯 유프겐슐트 공작가는 철과 금으로 부유함을 과시하며 타락한 황실을 몰아내는 데에 가장 크게 일조했다.

그렇게 유프겐슐트는 혁명을 일깨운 공신가로서 유명세를 달리했다. 달리아 같은 고아 출신도 그 이름을 알 만큼.

가히 위인 수준으로 유명한 저택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달리아가 방방 뜨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달리아, 여기 말고 좌익관에 있는 소 응접실로 가라니까. 여긴 본관이잖아.”

“맙소사, 달리아! 원목 테이블에는 왁스 칠이 아니라 오일을 발라야 해!”

“달리아! 시트는 좌익관이 아니라 우익관에 있는 세탁실에 있다니까. 빨리 움직여!”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꾸중에 달리아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처음의 포부와 달리 달리아는 일주일가량 잦은 실수를 저질러 상급 하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사실 달리아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공작 저에서 처음 일하는 하녀들은 모두 비슷한 실수들을 저질렀다. 능력의 문제가 아닌 저택 자체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일단, 공작 저는 달리아가 이전까지 일했던 남작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사교와 집무가 이뤄지는 본관 외에도 가신들을 접대하는 좌익관과 공작가의 일원들이 거주하는 우익관이 별도로 있어 장소를 외우는 것만 해도 며칠이 꼬박 걸렸다.

게다가 엄격한 규칙, 꼭 지켜야 할 예의 등등을 배우느라 달리아는 한 달 내내 긴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어디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달리아는 손재주도 눈치도 빠른 아이였다.

저택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부터 달리아는 가장 기대되는 신입으로 상급 하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청소, 또 청소. 잔심부름과 상급 하녀와 시녀들의 뒤치다꺼리.

일은 고됐지만 저택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달리아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즐겁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즐겁지 않은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에 익숙해지는 것과 저택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건 별개였다.

남작 부인 저택에서도 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곳은 궤가 달랐다. 달리아는 귀족을 모시는 게 생각보다 훨씬 녹록지 않다는 걸 매일 실감했다.

“시녀님. 여기 말씀하신 리본 갖고 왔어요.”

달리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공단 리본을 건네자 화장대 앞에 서 있던 시녀가 시큰둥한 손길로 리본을 뺏어 들었다.

그러자 그 앞,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반사된 거울로 달리아를 쳐다보더니 보일 듯 말듯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이름이 뭐지?”

곱게 치장한 모습처럼 목소리도 무척 매끄러웠다.

귀족 아가씨들은 모두 이런 목소리를 갖고 있는 걸까.

카를라 유프겐슐트. 공작 부인이 애지중지하는 딸이자 저택의 하나뿐인 아가씨인 그녀는 마주하는 게 영광일 만큼 경외스러운 존재였다.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달리아 벨로흐입니다, 아가씨.”

“달리아…”

곱게 눈매를 휘어 웃은 카를라가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꽤 예쁘장한 얼굴이구나. 가엾게도… 그래도 미시즈 프라다가 아직 노안은 아닌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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