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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200화 (20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8. 헛소리는 집에 가서 해라!

지구의 신이 하는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남은 건가?”

발드르가 소멸된 지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와의 계약은 뭐지?”

-마지막 시험.

마지막 시험이라 말하는 지구의 신은 가만히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부탁한 것은 너에게 마지막으로 선택지를 주라는 것이었다.

“선택지라…….”

들어는 보겠다는 듯 팔짱을 긴 채 가만히 지구의 신을 바라보는 카리엘.

오만한 자세를 지구의 신이 표정을 구겼지만 상관없었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긴장을 했던 카리엘이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도 날 건드리진 못해.’

백색의 공간은 일종의 중립지대.

그리고 지구의 신이 저렇게 작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 역시 본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현재 지구의 신에서 느껴지는 힘은 발드르처럼 미약했다.

그렇다는 건 지구의 신이 차원을 넘어 이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데에 제약이 따른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혓바닥이 길겠지.’

한 가지 걱정되는 건 회색빛 게이트의 힘이었다.

자신마저 저항하는 게 전부였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문제가 되었으나 그 역시 지금의 지구의 신이 한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곳의 신이 되겠다.

“그래서?”

-지구처럼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주마. 그러니 나의 사도가 되어라.

지구의 신이 손을 내밀면서 제안하자 카리엘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끝?”

-어차피 너도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싫을 거 아닌가?

카리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지구의 신.

-그 귀찮은 일을 모두 내가 맡아 주겠다는 소리다. 또한 원한다면 지구로 돌려보내 주도록 하지.

지구의 신이 말을 마치는 순간, 백색의 공간에 지구의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지구라고?”

카리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구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구의 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타 차원의 침공을 우리만 피해 갈 수는 없으니까.

지구의 신이 하는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분면 의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구르는 대가로 행복한 환경과 안전을 보장했던 가족들.

그들은 지금 변해 버린 지구의 환경에 최선을 다해 적응 중이었다.

그나마 지구의 신의 배려로 풍족하게 살고는 있었지만 이곳처럼 게이트를 통해 나오는 몬스터들은 생존에 큰 위협이 되었다.

“발드르와의 약속대로 너희 가족에겐 내 직권으로 능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완전히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

타 차원의 침공이 시작된 이상 지구의 신은 재능 있는 인간들을 중심으로 키워야만 했다.

-그러니 네가 직접 지구로 가서 너희 가족들을 지켜라.

지구의 신의 말에 카리엘은 굳은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옛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부유한 가족들이었지만 매번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을 했는지 귀여운 조카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와 계약하겠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지구의 신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카리엘이 피식 웃으면서 그가 내민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천천히 뻗히는 카리엘의 팔을 보며 지구의 신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을 때였다.

“꺼져.”

지구의 신이 내민 손을 툭 쳐 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카리엘.

“어디서 약을 팔아?”

-칫!

카리엘의 표정을 본 지구의 신이 혀를 차면서 허공에 의자를 만들어 내곤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가족들을 버릴 거냐?

“이미 죽은 내가 뭘 해 줄 수 있지?”

-돌아가면 될 텐데?

이미 죽은 아들이 돌아와서 자신이 아들이라고 주장해 봤자 믿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과거의 가족일 뿐이다.

지구에서의 삶은 끝이 났으니 이제는 이쪽 세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원한다면 가족들이 널 믿게끔 만들어 줄 수도 있어.

“회귀라도 시켜 주게?”

카리엘의 물음에 지구의 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순히 가족들에게 카리엘이 자신들의 가족임을 믿게 하는 건 세뇌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만약 지구로 돌아간다면 ‘회귀’를 원했다.

‘해 줄 리가 없지.’

자신을 회귀시키면서 발드르가 얼마나 무리했는지를 아는 카리엘이다.

타 차원의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도 그러할진대, 차원 간의 방벽이 무너진 상황에서 회귀를 시켜 준다?

지구의 신이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해야 그게 가능할까?

-지구의 삶에는 미련이 없어 보이는군.

“이젠 이곳이 내 집이니까.”

카리엘의 대답에 지구의 신은 완전히 포기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동맹을 맺자.

살살 꼬드겨 이 세계를 날름 먹어 보려던 지구의 신이 태세 전환을 하며 카리엘과 협상을 제안했다.

-너와 내가 손잡는 거지. 정확히는 %@$^&에 소속되는 것이지만.

아직 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카리엘에겐 알 수 없는 정보였는지 지구의 신이 말한 음성이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대륙에도 여러 국가가 있는 것처럼 차원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차원은 한창 땅따먹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난 신이 아니야.”

지구의 신이 한 제안을 거절하는 카리엘.

아직 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자 지구의 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만 원한다면 신이 되는 것을 돕겠어. 그러니 %@$^&에 들어와.

“그 역시 거절하지.”

연이은 카리엘의 거절에 지구의 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다른 제안을 받았나?

“아니.”

-……그럼 왜?

지구의 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순수하게 돕겠다는 마음으로 제안을 한 것임을 카리엘도 알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에 이것이 어떤 제약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언정 이것이 나중에 족쇄가 되어 끌려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 시점에서 섣부르게 누군가와 손잡는 건 위험했다.

지구의 신이 속한 소속이 무엇인지, 이곳이 차원 간의 전쟁에서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덥썩 손잡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제안해 온다면 그땐 고민해 보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단칼에 거절하는 카리엘을 보며 지구의 신은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카리엘의 성장 폭을 생각해 보면, 신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그를 중심으로 성장해 나가는 인류 역시 빠르게 강해질 테니, 그렇다면 이쪽 차원의 가치는 덩달아 수직 상승할 것이다.

지구의 신은 바로 그것을 눈치채고 선점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리엘은 다급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지금처럼 여유롭게 막진 못할 거다.

“알아.”

-어느 곳에 소속되지 않는 한, 모든 곳에서 이곳을 노릴 수도 있어.

지구의 신이 진심으로 하는 충고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결정은 위험을 자초하는 선택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은 자신 있었다.

“반대로 우리의 가치가 올라가면 너처럼 우리와 손잡고자 하는 이들도 늘어나겠지.”

-…….

“제대로 된 성장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어느 파벌에 소속되어 버리면 이용만 당하고 내쳐질 가능성이 높지.”

차원 간의 전쟁, 신들의 전쟁이 불리지만 사실 그 근본은 일반적인 정쟁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힘이 없으면 어떤 거대한 파벌에 속해 있어도 이용만 당하다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지금 지구의 신과 손잡으면 잠시간의 안정은 확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이 없는 세계, 타 차원의 먹잇감이 된 이곳을 언제까지 지켜 줄까.

분명 이곳을 대가로 딜을 하자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를 일.

“무엇보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 없다.”

어떠한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덜컥 손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줄타기라는 것을 해 볼 생각이었다.

-줄타기는 위험하다는 걸 잘 알 텐데?

“알지. 그러나 위험 없이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안정만 추구해서는 성장을 할 수 없다.

현재 이쪽 세계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전쟁과 혼란이 반복되면서다.

특히 신이 없기에 침공하는 수많은 타 차원들로 인해 많은 자원 수급이 이뤄지면서 더 가파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

‘중립의 위치를 지키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동시에 높은 위치에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카리엘을 보며 지구의 신이 포기하지 않고 꼬드겼다.

슬며시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풀어내면서 협박도 하고, 차원 간의 비밀 그리고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단서도 제공하겠다며 회유도 해 보았다.

하지만 카리엘의 마음은 확고했다.

-에휴…… 또 져 버렸군.

“졌다고?”

-그래.

지구의 신이 한숨을 푹푹 쉬는 순간, 시간이 다 되었는지 백색의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악한 놈. 아니, 아니야. 전부 이 녀석 때문이군.

자신의 세계에 있던 일반인.

하지만 발드르는 카리엘을 선택해서 데려왔고, 그 결과는 지구 신의 연패로 이어졌다.

-끝까지 세계를 지킨다라…….

멸망해 가는 세계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신.

일반적인 신과는 다르게 소멸마저 각오한 바보 같은 신은 또다시 지구의 신에게 승리를 거뒀다.

멋모르는 카리엘을 속여 세계를 꿀꺽 삼켜 보려던 대가는 가혹했다.

-한동안 자숙해야겠어.

연이은 패배로 상당히 많은 힘을 빼앗긴 지구의 신이 한숨과 함께 팔을 휘저었다.

그 순간 지구의 신의 몸에서 기묘한 문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의 내기에서 이겼습니다. 내기를 한 당사자가 없으므로 당사자가 내정한 대리인이 보상을 대신해서 받습니다!]

발드르가 사라진 이후 본 적 없었던 무미건조한 음성.

동시에 지구의 신의 모습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동시에 카리엘 역시 의식을 잃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이곳은…….”

자신을 빨아들였던 회색빛 게이트.

하지만 이제는 회색빛을 내뿜지 않았다.

“회색은 중립 혹은 거래를 뜻하는 것이었나?”

이제는 보랏빛으로 변해 있는 게이트를 보면서 중얼거린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지구 신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남은 건 전쟁뿐이었다.

“폐하!”

“데이비어 공작, 내 분명 명령을…….”

“임무는 완수했사옵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데이비어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벌써라니요. 폐하께서 게이트에 들어가신 지 두 달이나 지났사옵니다!”

“아…….”

발드르를 만났을 때처럼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임을 깨달은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데이비어 공작과 함께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레이 실드들을 향해 걸어갔다.

“또 뭐가 많이 변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많이 변하긴 했사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데이비어 공작이 머뭇거리면서 답했다.

“변……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영상구에 담긴 내용을 본 카리엘은 경악했다.

“직접 확인해야겠어.”

카리엘의 명령에 특수군의 비공선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황궁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로 향한 카리엘.

그리고 그곳에서 카리엘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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