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6. 작전명 : 괴물 꼬시기 (3)
수르트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콜과 아그니 역시 차례차례 돌아온 것이다.
스콜 같은 경우 늑대를 비롯한 신화시대의 신수 출신의 과거의 잔재들을 이끌었다.
신이나 거인처럼 영성이 없음에도 안식에 들지 못하고 반강제적으로 깨어난 불쌍한 이들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하티의 파편들도 일부 모아 영성이 있는 동물에게 넣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아그니였다.
“정령계라…….”
물론 정식 정령계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찾아보기 힘들다지만 여전히 정령계는 실존했고, 어딘가에는 정령을 다루는 이가 존재한다.
아그니가 모은 아이들은 온전한 정령이 아닌, 정령계에서 버려진 아이들, 혹은 반쪽짜리의 불완전한 정령들이었다.
정령의 파편으로 남아 동물에 깃들거나 식물에 깃들어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불쌍한 존재들.
그런 이들을 모아 무너진 세계의 잔해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간 것이다.
“다들 놀랍네.”
어느새 엄청나게 성장해 버린 소환체들을 보면서 그저 놀랍다는 감탄사만 연발하는 카리엘.
카리엘 역시 그동안 놀지 않고 꾸준히 수련해 왔지만 소환체들만큼은 아니었다.
카리엘도 소환체 없이 대전쟁 시절의 역량에 근접할 정도로 강해졌으나, 소환체들은 한 무리의 주인이 될 만큼 강해져 있었다.
이들이 다시 합류한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수트르에게 들었던 정보들과는 또 다른 것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얼마나 신각한지를 알려 주었다.
“신이라…….”
세 소환체로부터 많은 것들을 들은 후, 어째서 케찰코아틀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황은 심각했다.
“차원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마치 이 세계를 두고 여러 신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 같은 느낌.
여러 차원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종족들이 세계를 갉아먹으려는 것 같다.
그런데 예상외로 수르트를 비롯한 소환체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신은 직접 올 수 없다.
격이 오르면서 더 많은 기억을 되찾고 알게 된 수르트가 대충이나마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려 주었다.
저쪽의 신이 이쪽 세계에 직접 간섭하거나 올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차원을 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본진이 위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급 존재가 오지 않는다면?
어차피 물량전이다.
“확실히 수성하는 쪽이 유리하지.”
-그래. 거기다 저들이 오는 루트는 한정적이다.
반드시 타 차원 게이트가 먼저 열리는 것.
그렇기에 인류를 비롯한 세계의 구성원들은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전장으로 따지면 오는 길목도 한정되어 있고, 앞에는 거대한 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수성, 다른 한쪽은 공성.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면 속에서 걱정해야 할 건 오직 물량뿐.
-그러니까 쫄지 마.
“안 쫄았다.”
수르트의 말에 발끈한 카리엘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쫄았다면 갈릴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신이 되었을 거다. 그러지 않고 케탈코아틀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타 차원의 침공을 인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일단 정보가 얼추 모였으니 이젠 움직여야지. 너희들의 도움이 간절했어.”
-오자마자 부려 먹으려는 거냐?
수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스콜과 아그니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잖아. 자 자! 말은 그만하고, 일단 나랑 같이 과거의 잔재들이나 설득하러 가자고.”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타리온이 알아 온 정보를 바탕으로 누구누구를 설득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굳이 어렵게 갈 필요가 있나?
“뭐?”
-이 녀석들 말이야. 쉽게 설득할 방법이 있는데?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그런 방법이 있다고?’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수르트가 아그니와 스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도 서로를 보며 ‘이걸 모른다고?’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가자.
“그래.”
수르트의 말에 바로 제국 외곽 지역으로 갈 채비를 한 카리엘.
돌아오자마자 또 나간다는 남편을 보러 직접 찾아온 아일라를 설득하느라 장장 1시간을 소모한 이후, 힘겹게 비공선에 오른 카리엘은 곧바로 동부로 향했다.
서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과거의 잔재.
자이언트 산맥에 묻힌 고대의 초거대 골렘과 융합한 산악 거인은 과거의 잔재도, 변이 몬스터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각성했다.
그런데 근처에 타 차원 게이트까지 열리면서 무지막지하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크기만 거의 웬만한 산은 저리가라 할 만큼 거대하며, 지진을 일으키고 용암을 터뜨리는 등의 기예까지 부릴 수 있는 막강함을 가졌다.
거기다 번식력까지 갖췄는지 산맥 부근에 산악 거인이 부쩍 늘어나 토벌도 어려운 상황.
“정말 설득할 수 있겠어?”
카리엘이 걱정스레 아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그니가 걱정 말라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퉁퉁 치더니 산악 거인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날아갔다.
그렇게 아그니가 날아간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거대한 산이 울리면서 산악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높기로 유명한 거인의 산 중 하나가 거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때, 거대한 거인의 눈이 카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약하겠……다.
갑자기 자신과 계약하겠다는 산악 거인.
“뭘…… 한 거냐?”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단해. 저들도 이곳보다는 우리처럼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싶어 하는 거지.
이제는 거의 절멸해 버린 수많은 종족들.
과거의 잔재가 되어 부활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재의 시대는 신들의 시대도 이종족의 시대도 아닌 인간들의 시대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사실 이쪽 세계는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른 대륙이야 좀 더 낫겠지만, 이그니트 같은 경우는 촘촘한 감시망을 갖고 있었고, 특히 위험한 존재들 같은 경우 수시로 확인하기 때문에 굉장히 거슬렸다.
산악 거인 같은 경우 잠을 자거나 느릿하게 움직이며 여유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인간들이 매번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탐색 마법을 쏘아 대니 짜증이 나는 것이다.
성질 같아선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럼 귀신같이 그랜드 마스터가 나타나서 자신을 박살 낼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과거의 잔재들 사이에서 너랑 그랜드 마스터들이 굉장히 유명해.
수르트의 말에 스콜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들면 × 된다고 잔재들과 신수들 사이에서 쫙 퍼진 지 오래라 웬만하면 인간들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카리엘의 제안이 반가웠다.
-우리……는 저자를 따라……가고자 한……다.
“아그니를?”
산악 거인의 말에 카리엘이 가만히 아그니를 바라보았다.
같은 거인종이라 수르트를 따라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거인종보다는 정령으로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 카리엘이 가만히 아그니를 바라보자 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불안정한 곳이기에 많은 전력이 와 주면 고마운 일이다.
반면에 수르트의 입장에선 달랐다.
-아쉽네.
아쉬워하는 수르트를 보며 산안 거인에게서 태어난 몇몇 바위 거인들이 수르트에게로 다가왔다.
산악 거인과 대부분의 부하들은 아그니를 따라갔지만, 수르트를 따라가고자 하는 이들 역시 있었고, 결국 두 패로 나뉘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게끔 해 주었다.
그렇게 거인의 산맥에서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카리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투 트랙으로 움직인다.”
“예! 폐하.”
카리엘의 명령에 군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마스터급 이상으로 평가되는 존재들은 카리엘이, 그 이하의 자잘한 존재들은 군부와 마법사가 계약하는 것으로 큰 틀을 잡고 움직였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대륙 전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군부와 마법사들.
본격적으로 타 차원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적어도 서대륙만큼은 과거의 잔재들과 모두 협약을 끝내 놔야 했다.
사실 세리엘이나 군부대신은 계약 자체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카리엘이 담당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그니트가 정한 특급 위험종을 넘어서는 존재들.
시간만 주어진다면 신대륙의 거대한 뱀처럼 초월종이 될 가능성이 높은 녀석들이다.
그만큼 영성도, 자존심도 센 녀석들이라 쉽게 인간들과 손잡으려 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 달리 카리엘은 빠르게 계약해 나가면서 군부보다 더 빠르게 주어진 목표들을 완수하고 있었다.
“후…… 이로써 중요한 놈들은 전부 계약한 건가?”
사방이 눈으로 덮인 대지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얼음 거인을 바라보던 카리엘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나저나 가름 이 녀석은 답도 없네.”
목표를 완수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게 다름 아닌 가름의 능력이다.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능력을 공유해 준 가름의 힘.
그것을 통해서 서대륙의 과거의 잔재들과 변이 몬스터들과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애들 다 왔는데 혼자만 오지 않는 건 괘씸했다.
“지만 바쁜가?”
-그러게.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동조했고, 스콜과 아그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그러자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는 초록 불덩이.
-실컷 능력을 가져가서 쓸 때는 언제고, 바빠서 조금 늦은 것 가지고 뭐라 하나?
가름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등장하자 카리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즉에 왔으면 좋았잖아.
-바쁜데 어떡하나?
“지옥도 타 차원 게이트가 나타났어?
카리엘의 물음에 가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름의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능력을 공유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지옥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상황인데, 카리엘과 다른 소환체들마저 힘을 빌려 가 버리니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놔뒀던 것은 타 차원의 침공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중심으로 곁가지처럼 뻗어 나가 있는 마계와 지옥은 타 차원 게이트에 더 취약했다.
거기다 만약 이 세계가 타 차원에 잠식되기 시작하면 지옥이나 마계는 더 큰 영향을 받아 자칫 세계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중심이 되는 세계가 버텨 줘야만이 지옥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후…… 급한 불 껐으면 이제 그만 써.
“그 말 하려고 나타난 거냐?”
카리엘의 물음에 가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돌아갈 거냐?”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가름.
그동안 지옥에서 열심히 굴렀기에 휴식이 필요했다.
앞으로 타 차원의 침공이 시작되면 다시금 굴러야 할 몸이었기에 이참에 잠깐이라도 휴식기를 가질 생각이었다.
-지겨운 지옥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휴양 좀 즐길 생각이다.
“아…….”
카리엘이 황궁을 지긋지긋해하는 것처럼 가름은 지옥이 그러했다.
근무지나 다름없는 가름은 카리엘처럼 잠도 자지 않기에 24시간 내내 지옥에서 굴러 왔던 것.
그렇기에 넘어온 김에 휴식을 취하고자 했다.
-너도 얼추 할 일이 끝난 거 같은데?
“그……렇지?”
-그럼 우리와 놀아 줘야겠어.
어느새 작은 개로 변한 가름이 꼬리를 맹렬히 흔들면서 말하자 스콜과 아그니 역시 동물로 변신했다.
늑대와 여우 모양으로 변한 두 소환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카리엘의 주변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수르트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신수라는 놈들이…….
수르트가 옆에서 체통을 지키라고 꾸짖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카리엘의 근처에 자리 잡은 이들.
동물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이 놀아 달라는 것임을 눈치챈 카리엘은 황당해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이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름 바쁘게 돌아다닌 카리엘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황궁에 진입하자 자신의 복귀 소식을 들은 아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뒈졌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어떤 여인이 이러한 남편을 좋아할까.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한 카리엘.
그러나 그의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 아일라의 표정은 환해졌다.
“어머~!”
아일라에게 애교를 부리는 소환체들.
그 중심에는 가름이 있었다.
“끼잉~.”
“멍멍!”
“왈! 왈!”
세 소환체들의 애교에 싸늘했던 아일라의 눈빛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본 카리엘이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았나?’
10시간짜리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했던 카리엘이 살았다는 표정과 함께 수르트를 바라보았다.
수르트는 그런 카리엘의 표정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황후의 분노를 잠재워 기뻐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타리온이 급보를 들고 황제의 궁을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