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6. 작전명 : 괴물 꼬시기 (2)
시종장의 조언에 따라 황후를 나중에 만나기로 결정한 카리엘은 혹시라도 황후를 만날까 싶어 황급히 황궁을 빠져나왔다.
마차를 타고 신속하게 황궁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가까운 과거의 잔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 카리엘.
고속으로 갈 수 있도록 개조한 비공선을 통해 빠르게 목적지까지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예상과는 다른 풍경을 볼 수있었다.
“과거의 잔재들도 ‘진화’라는 걸 하는 건가?”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마나를 품은 신수들, 그리고 과거의 잔재를 먹거나 그들의 잔여물을 먹고 진화한 변이 몬스터들.
이들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과거의 잔재들을 사냥하기 시작하자 이들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공격을 피해 험지로 숨어들어도 신수나 몬스터들의 사냥을 받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위험을 감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카리엘의 눈앞에 있었다.
-……날 죽이러 온 건가?
죽음을 각오한 것 같은 박쥐.
큼지막한 동굴에 숨어든 것만으로도 모자라 일부러 체구조차 줄여서 숨어 있던 녀석이다.
인간들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힘을 키우는 것도 조심하던 녀석.
그런 녀석이 발견된 이유는 동굴 근방에 생성된 타 차원의 게이트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잘 숨겼던 녀석이지만, 타 차원에서 넘어오는 힘은 본래 자신의 힘마저 넘어설 수 있게 하면서 진화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힘의 파장이 퍼져 나가면서 걸린 것이다.
“죽이기보단 영입을 하러 왔지.”
-영입?
“그래.”
카리엘의 말에 박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무리 진화했다지만 그래 봤자 카리엘에 비하면 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보다 훨씬 강한 개체들이 서대륙 곳곳에 숨어 있었는데, 굳이 자신을 영입하러 직접 오는 것이 이상했다.
-왜 굳이 나를 영입하려는 거지?
“타 차원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
박쥐의 물음에 카리엘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 강한 개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접 행차한 이유는 딱 하나다.
아직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박쥐는 알고 있으니까.
“너도 알겠지, 이대로 있으면 이 세계는 다시금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러니 도와.”
-…….
“과거의 잔재들을 생각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전부 만나 볼 생각이니까.”
-정말인가?
“그래. 비록 과거의 힘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이들이라지만 어찌 되었든 세계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건 변함이 없지. 그렇지만 타 차원은 달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박쥐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힘을 키우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 하지만 협력은 해 줘야겠어.”
카리엘의 눈을 바라본 박쥐.
뱀파이어의 시조에게 직접 간택되었던 최초의 뱀파이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수많은 최초의 뱀파이어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 당시에도 강력한 힘을 보유하진 못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대로 성장을 더 할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박쥐의 눈빛이 달라졌다.
일단 인간들한테 사냥당할 위험이 사라진다.
거기에 연구에 협조해 준다면 몬스터들한테 사냥당할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니.
그렇다면 자신은 알량한 정보를 가지고 인간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더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협조하겠다.
“좋은 선택이야. 후회하지 않게 해 주지.”
이그니트와 처음으로 계약한 존재에 대한 선물이랄까?
카리엘은 기사단에게 박쥐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죄수들을 보내 박쥐의 권속으로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저 녀석도 자신을 믿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뱉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처음으로 과거의 잔재와 정식으로 계약한 카리엘.
그를 시작으로 중앙 지역 근방에 숨어든 녀석들을 하나둘 찾아갔다.
“전부 별거 아닌 녀석들뿐이네.”
카리엘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제국의 중앙 지역은 핵심지역이기에 감시망이 살벌하다.
그렇기에 강한 개체들은 절대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몸집이 크거나, 힘이 강력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발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의마한 전력이 될 녀석들을 꼬시려면 외곽 지역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성과는?”
카리엘의 물음에 직접 찾아온 월크셔 공작이 보고했다.
“아직은 미미합니다. 과거의 잔재들이 저희를 아직 믿지 못하는 것도 있고, 대부분 거의 본능에 충실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박쥐를 통해선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결과를 알아내긴 했습니다.”
한숨을 쉬던 카리엘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월크셔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박쥐를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타 차원의 힘 역시 마나와 비슷한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어째서 우린 안 되고 저들은 가능하지?”
카리엘의 물음에 월크셔 공작이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만든 보고서를 건넸다.
“과거의 잔재들이 쓰는 힘을 봐 주십쇼.”
“여러 개가 섞여 있군.”
“그렇습니다. 마나와 지옥의 힘 그리고 잔재들이 가진 특수한 힘에 가려져 있습니다만 여기, 이 힘의 파장을 보시면 타 차원 게이트의 힘과 파장이 비슷합니다.”
월크셔 공작의 보고서를 보던 카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왜 몰랐지?”
“워낙 미약했기도 했고, 차분하게 연구할 시간이 없던 게 큽니다.”
월크셔 공작의 말대로 그동안 과거의 잔재들을 사냥하기만 했지, 제대로 연구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잔재들을 잡아도 그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차에 카리엘을 통해 계약하면서 과거의 잔재들을 통해 연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과거의 잔재들이 타 차원의 힘을 통해 강해질 수 있는 건 다양한 힘을 다루는 데다 미약하게나마 타 차원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일부를 갖고 있는 것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한데 궁금하네. 과거의 잔재들이 어째서 이러한 힘을 갖고 있는 거지?”
카리엘의 물음에 월크셔 공작이 잠시 고민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차원을 넘어오면서 얻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옥에 의해 강제로 튕겨 이곳으로 온 과거의 잔재들.
만약 지옥에 넘어온 것이 원인이라면 타 차원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
‘가름의 힘에 넘어간 나와는 다르다는 건가?’
가름에 의해 안정적으로 지옥에 넘어간 것과 달리 과거의 잔재들은 반쯤 강제 추방당한 것이니 지옥과 이곳을 넘나드는 과정이 불안정했을 것이다.
‘어쩌면 타 차원의 힘이란 게 우주의 힘일 수도 있겠네.’
카리엘이 속으로 이런 가정을 할 때, 월크셔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타 차원 게이트 주위로 결계를 쳐 오염 지역이 늘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일단 결과가 나오는 대로 바로바로 군에게 알려.”
“예! 폐하.”
월크셔 공작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유의미한 정보를 얻으려면 더 높은 잔재들을 만나야 했다.
“폐하.”
“아, 타리온.”
“이제 폐하께오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와 계약한 잔재들이 다른 존재들과 계약할 때 도움을 주기로 합의가 끝났습니다. 이미 외곽 지역에 있는 한 과거의 잔재와 무사히 계약이 끝났습니다.”
“허……그거 다행이네.”
혹시나 싶어서 명령을 내려 놨던 카리엘.
이왕 인간들을 돕기로 했다면 제대로 도와 달라는 말에 여유가 있는 존재들이 다른 잔재들과 얘기를 나눌 때 돕기로 했는데, 이것마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인가?”
과거의 잔재들과의 계약을 통해 타 차원 게이트의 비밀도,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서의 유의미한 전력 확보도 가능할 터였다.
하나 제국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타리온이 품속에서 꺼낸 또 하나의 보고서를 보면 한숨만 나왔다.
처음엔 20개도 안 되던 타 차원 게이트들이 서대륙에서만 100개가 넘게 나타나고 있었고, 이제는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지고 있었다.
카리엘이 케찰코아틀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그 역시 더 이상 결계를 유지하길 포기하면서 게이트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쪽이 무너지니 다른 신에 가까운 존재들도 하나둘 포기하면서 이제는 게이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그 게이트의 규모가 나중에 나타날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이라…….”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분명 게이트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
게이트에서 넘어올 존재들이 얼마나 강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발드르가 안심하고 소멸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지금의 수준이라면 자신이 없어도 현 인류와 세계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보가 너무 부족해.”
카리엘은 새삼 크게 다가오는 수르트의 빈자리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쉬워했다.
항상 자신에게 조언해 주던 존재가 없으니 답답해진 것이다.
“꼭 필요할 때 없어요.”
카리엘이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수르트를 향해 투덜거릴 때였다.
-쯧쯧! 내가 없으니 아무것도 못하는구먼!
“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작은 불덩이.
땡그란 눈이 달린 작은 불덩이가 자신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반갑게 인사하는 수르트를 본 카리엘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연락을 취한 지가 언젠데!”
-바빴어! 갑자기 타 차원에서 넘어온 놈들과 싸우느라 정신없었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말 그대로야. 타 차원에서 넘어온 군대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어. 후…… 방금 전까지 싸우다가 겨우 마무리 짓고 넘어온 거야.
“그게 무슨…….”
아직 서대륙을 비롯한 세계에는 타 차원에서 군대 단위로 넘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길래…….”
-무스펠헤임.
“뭐? 거긴 멸망한…….”
-그래, 멸망했었지.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완전히 멸망한 건 아니더라고. 지옥과 이곳 사이에 잔해가 남아 있었어.
“아…….”
-다행인지 그곳에 동족들의 잔해도 많이 남아 있었고. 뭐 덕분에 이곳으로 넘어온 수하 녀석들의 잔재들을 데리고 넘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말한 수르트가 재건하기 시작한 무스펠헤임에 대해 말해 주었다.
신화시대에 멸망했다고 알려진 세계.
발드르에 의해 인간들의 세상만 간신히 남겼다고 알려졌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옥으로 넘어갈 때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았어.
마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멸망한 세계의 잔해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발드라에 의해 재구축된 세계처럼 안정적이지는 못했기에 타 차원의 침공을 더 빠르게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소환수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신의 형제를 찾으러 간 스콜이나 정령왕의 파편인 아그니 역시 멸망한 세계의 잔재로 갈 수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다.
카리엘을 매개 삼아 가름의 권능 일부를 빌려 올 수 있기 때문.
지옥을 넘나드는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와 세계를 넘을 수 있는 고차원적 힘이었고, 이걸 통해 수르트도 무스펠의 잔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하나둘 찾아올 거다.
“후…… 그래?”
-그래.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선물이 있다.
“선물?”
-그래. 잠깐 들어 봤는데 과거의 잔재들을 동맹으로 삼고자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리엘을 빤히 바라보던 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종족도 돕도록 하지.
“뭐?”
-불의 거인들이 부활한 건 사실상 네 덕분이니 도와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한 수르트가 쪼그마한 손을 내밀어 카리엘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와도 계약하자.
그의 말에 카리엘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앞두고 귀중한 전력들이 확보된 셈.
그런데 이런 기쁜 상황에서 카리엘을 더 웃게 만드는 일이 한 번 더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