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4. 문제가 많은 신대륙? (2)
오늘도 무사히 넘긴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 처음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 공국에서 아일라를 만났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능력이 있고, 조금 특이한 여인이라는 것 정도?
그 당시에는 워낙 산재한 일들이 많아서 더 관심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가 어찌 되었든 결혼한 사이인데, 신혼을 즐기기는커녕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일만 하다 보니 미안함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꾸 신경 쓰게 되었는데, 어느샌가 죄책감이 들지 않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다 정말 대신들처럼 잡혀서 살 운명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후가 화를 낸 적은 없다.
다만 묘하게 실망하고, 가끔씩 째려보는 느낌이 들 때면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이다.
“나중에 대신들에게 물어봐야겠군.”
오랜 결혼 생활을 한 선배님들이라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훌륭한 방법을 알려 주리라.
그렇게 묘하게 거슬리는 생각들을 걷어 내고 신대륙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황후를 달래고 돌아오는 사이 카리엘의 집무실은 기존에 있던 신대륙에 대한 정보들과 지도들로 덮여 있었다.
동대륙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처럼 이번엔 신대륙에 대한 정보들로 집무실을 채운 것이다.
“……어렵네.”
외무대신에게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신대륙에 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였다.
당장에 이그니트 최상위 전력을 이끌고 신대륙을 때리면 이기기는 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외무대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동대륙과 남부의 섬들이 자신들도 점령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그건 곧 외교와 세계 무역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기에 ‘적절한 수준’에서 협박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겁만 주는 것.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춰야 하나?”
그냥 마구잡이로 때려부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를 떠안은 카리엘이 밤새 고심했다.
‘어떻게 신대륙을 조지면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카바를 완전히 박살 내서 경고를 해 줄까?’
‘도리어 무역으로 압박을 해 줄까?’
‘그랜드 마스터들로 상층부 인물들을 암살할까?’
온갖 것들을 생각해 보던 카리엘이 다음 날 대신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니까 폐하께오선 이그니트가 할 수 있는 협박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옵니까?”
재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아니 폐하. 그러다간 이그니트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루피엘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잘 만들어야지. 타리온.”
“예.”
카리엘이 미리 명령한 대로 타리온은 신대륙의 이미지를 박살 낼 방안을 만들어 왔다.
“내무대신.”
“이미 저녁쯤에 사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제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밑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내무대신이 직접 내무부 관료들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하는 철야에 다들 힘들어했지만 나중에 확실한 보상을 해 줄 것이기에 철야를 하고 나서도 곧바로 출근했다.
“좋아. 내가 신대륙에 가는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아.”
“하오나…… 폐하.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는 루피엘의 말에 카리엘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미 세계 곳곳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로부터 문제가 커지기 전에 초장에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괜히 미적거리다 대전쟁처럼 큰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지금 고생하는 편이 더 나았다.
“내가 직접 신대륙 국가들을 설득하러 가는 느낌으로 만들어 가지.”
“출발은 빠르게 하되 천천히 가실 생각입니까?”
눈치 빠른 재상 루터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도 슬슬 카리엘의 작전의 핵심이 무슨 뜻인지 눈치를 챘다.
1. 이그니트의 황제가 대륙의 평화를 위해 신대륙에 방문한다.
2. 동시에 이그니트 내부에 신대륙과의 일을 슬쩍 흘린다.
3. 여론이 움직이면 이그니트가 신대륙을 압박 및 회유 작전을 펼친다.
4. 말을 들어 먹지 않을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신대륙을 공격한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그니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카리엘의 말에 대신들과 루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그니트 입장에선 정말로 세계 평화를 위해 이러는 것이긴 했다. 그들에겐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라지만 거대한 뱀이라는 존재는 이그니트 입장에선 몬스터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언제 위협이 될지 모르는 존재를 만나 보는 것. 충분히 명분이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신대륙 입장에선 이번 기회에 불공정 무역을 좀 해소해 보려 하는 것이겠지만, 이그니트 입장에선 굳이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나라마다 사정은 있는 법.
꼬우면 지들이 강해지거나 기술력을 높이면 될 일이다.
“여기서 신대륙 국가들을 더 압박하면 어떻게 되지?”
“신대륙 귀족들은 모르겠으나 국민들은 정말 힘들어질 겁니다.”
재무대신이 그렇게 말하면서 현재 신대륙 국가들의 국민 평균 소득을 보여 주었다.
이그니트에 10분의 1도 안되는 임금.
거기다 그들이 생산하는 식량 대다수를 이그니트에 팔고 있기에 식량 사정도 좋지 않았다.
오로지 배불리는 것은 그들을 지배하는 지배 계층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카리엘의 단호한 말에 대신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다급했다.
다른 국가의 국민들까지 신경 써 줄 여력 따윈 없었다.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그니트 역시 암흑기를 스스로 빠져나왔고 호구취급 받던 것을 넘어 서대륙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니 그들 역시 스스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무엇다가 카리엘은 신대륙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힘들 때, 그들이 보였던 행동을 기억하나?”
카리엘의 물음에 대신들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동대륙에서 마족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지옥 문제로 고심을 할 때, 그들이 보인 행동들.
그건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당장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 아니라고 방관했던 모습.
나중에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 나갈 수 있다는 경고에 그제야 물자들만 떡하니 보내던 행동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신대륙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썩은 건 귀족들뿐이라지만, 신대륙의 사람들 대부분이 대전쟁에 참여하길 거부했었다고 들었다.”
카리엘이 여기까지 말하는 순간 대신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루터가 가장 변화 폭이 컸다.
자신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신대륙의 국민들을 동정하던 마음이 싹 사라진 것이다.
“밝으려면 철저하게! 알겠나?”
“예!”
카리엘의 명령에 모든 대신들과 루피엘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세계 각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과거의 잔재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건가?」
「과거의 잔재들로 인해 괴이한 현상이 연이어서 목격되는 중!」
가장 먼저 밑밥을 깔기 위해 타리온이 움직였다.
은근슬쩍 기밀 정보들을 풀어서 기자들이 먹기 좋게 미까를 던져 놓자 특종거리를 찾은 기자들이 너도나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군부가 움직였다.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어쩌면 대전쟁만큼 심각한 일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군사 전문가의 이런 예상에 제국민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미 신대륙이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접한 상인들과 일부 국가들은 이그니트가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이는 황제가 황위를 내려놓기 위해 작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얼마 후 곧바로 달라져 버렸다.
「황제 폐하가 직접 신대륙 국가로 가신다!」
카리엘이 직접 신대륙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괴이한 현상들의 조사를 위해 신대륙으로 떠나려는 이그니트 황제!」
「향간에 떠도는 세계 위기설! 정말일까?」
많은 이들의 의문 속에서 카리엘이 마침내 신대륙으로 향하는 비공선에 발을 올렸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제국이 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전문가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그러게.”
많은 타국의 사람들이 제국의 발표를 진짜로 믿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아직 몰라. 이그니트 황제는 교활해서 저것도 쇼일 수도 있어.”
“그래. 신대륙 측에서 건넨 정보들에 따르면 이그니트 황제가 자신들의 신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했어.”
“이그니트 황제가 스스로 진짜 ‘신’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품은 것일 수도 있어.”
이그니트가 여론전을 펼치자 신대륙 역시 맞대응에 나섰다.
그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가 없기에 여론전을 펼친 것이다.
황제 개인의 욕심으로 몰아가려는 신대륙 측 기자들.
하지만 그들은 미숙했다.
나라가 세워진 지도 이그니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카리엘이 황태자 시절부터 숱하게 싸워 오면서 단련된 이그니트 정부와 오랜 세월 귀족들끼리 암투만 해 오던 이들과는 여론전의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오늘 발표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루피엘의 물음에 루터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황제 개인의 욕심으로 몰아가려는 신대륙의 여론전.
그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지금부터 그동안 제국이 모아 온 정보들을 공개하겠습니다.”
단상에 선 군부대신의 발표.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예측 그리고 영상구에 담긴 위험한 영상들이 하나둘 공개되면서 기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보셨겠지만 고대의 잔재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을 잡아먹은 몬스터 혹은 그들의 잔여물을 먹은 동물들의 변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밝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이그니트 정부는 모든 것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타차원으로 추정되는 게이트가 열리고 그 앞에서 새어 나오는 모든 힘을 폭식하는 변이된 몬스터들과 과거의 잔재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다.
군부대신의 모든 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것이…… 정말입니까?”
“예.”
기자의 물음에 군부대신이 곧바로 대답을 했다.
“현재 나도는 소문처럼 폐하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군대를 끌고 신대륙을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군부대신이 긴 숨을 내뱉었다.
다음 말은 아무리 군부대신이라도 긴장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보이는 제국의 모든 움직임은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모두 보셨듯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현재 세계는 과거 대전쟁에 비견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그니트 정부는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찾을 생각이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입니다. 만약…….”
군부대신이 한차례 말을 끊고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함이 느껴지는 군부대신의 눈빛에 침을 꿀꺽삼키는 기자들.
“평화를 위한 제국의 행보에 방해된다면 그 누구도 용서치 말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거기까지 말한 군부대신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군부대신의 말에 모든 이들이 충격먹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의 말은 간단했다.
‘이번 사안을 이용하려 하지 마라. 만약 끝까지 이용하려 든다면 제국은 전쟁도 불사하겠다.’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제국의 발표에 앞에 모여 있던 기자들은 그 즉시 자신들의 국가로 이 내용을 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안을 하늘을 날고 있는 비공선에서 전달받은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나직이 중얼거린 카리엘은 싸늘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여기서 끝나면 신대륙 측 입장도 약간은 들어 줄 생각도 있었다.
불공정한 무역이 장기간 지속되면 나중에 신대륙과의 기술 격차가 줄어들었을 때 좋지 않은 외교 관계가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감안해 이그니트가 취하는 이득을 조금씩 줄여 나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신대륙이 다른 결정을 내린다면?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