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2. 결혼
간택식 첫 날, 사실상 황후를 정해 버린 카리엘은 곧장 다음 행보를 이어 나갔다.
시작은 군부였다.
「심상치 않은 과거의 잔재들의 준동!」
대륙 곳곳에 퍼진 과거의 잔재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옴과 동시에 세리엘이 직접 군부를 대표해서 발표했다.
“과거의 잔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군부에서는 이를 매우 위험하다 보고 있으며,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군부는 과거의 잔재들을 위한 특수군의 창설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세리엘이 직접 나설 정도면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기에 축제 분위기였던 사람들과 달리 황궁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해 대신들과 루피엘, 재상만을 황제의 궁으로 불러 회의를 진행했다.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
“예, 폐하. 아무래도 과거의 잔재들이 과거처럼 세력을 불리려는 모양샙니다.”
그렇게 말한 세리엘이 보고서를 건넸다.
그러자 근엄한 척하면서 보고서를 받아 든 카리엘은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표정이 굳어지면서 세리엘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언급된 내용이 사실이야?”
“예.”
카리엘의 물음에 세리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대신들이 카리엘의 눈빛을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자 패배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피엘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역 확장이라.”
험지로 도망간 과거의 잔재들이 갑자기 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심지어 이그니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북부의 동토에서는 급격하게 힘을 키운 존재들도 있었다.
“몇몇 야만족들은 신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신이라…….”
세리엘의 보고에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엄지로 머리를 꾹 누른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신대륙이나 남부의 섬들은? 그쪽으로도 과거의 잔재들이 많이들 도망갔을 텐데?”
“그쪽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후……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 이거지?”
대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듯, 과거의 잔재들은 아직도 인류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내 소환체들은? 찾아봤어?”
타리온을 보며 말하자 그가 카리엘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여기…… 남부의 한 섬에 대규모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불의 거인들이 모여 있는 걸 봤다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흠…… 이곳에 수르트가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폐하의 소환체가 과거의 잔재 중 하나를 막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타리온이 다른 소환체들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며 미리 준비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것을 본 루피엘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폐하, 이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빠르게 대처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제국 전체의 문제이옵니다.”
선수를 친 루피엘.
대전회의 안건으로 상정해 공론화하자는 주장을 하려 했으나 카리엘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제국민들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어.”
“하오나…….”
“일단 세리엘이 가져온 보고서부터 보도록 하지.”
카리엘의 말에 루피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특수군이라……. 네 생각은 과거의 잔재들만을 위한 특수군을 만들자는 거지?”
“예, 군 전체를 움직이기보단 이편이 훨씬 깔끔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커지면?”
“그때 가서 군 전체를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엘의 말에 루피엘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카리엘이 다 만들어 놓은 판이다. 특수군이 만들어지는 즉시 세리엘은 그쪽으로 빠질 것이고, 카리엘은 온갖 명분을 들먹이며 황궁에서 벗어날 것이다.
아마 과거의 잔재들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할 터.
이제야 모든 정황을 파악한 루피엘이 좌절했다.
그 모습을 본 대신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루피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들도 은퇴가 걸려 있었기에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전하, 힘내십시오.’
그저 속으로 힘내라고 응원하는 게 전부일 뿐.
좌절하는 루피엘을 뒤로하며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카리엘.
이미 대신들과 합의된 상황이었기에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을 하나한 실행에 옮기면서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아무래도 짐이 직접 나서는 게 좋겠군.”
누가 뭐라 해도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카리엘이었다.
그렇기에 명분은 확실했다.
미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카리엘이 직접 나서서 싹을 잘라 버리겠다!
그러나 루피엘 측도 그냥 물러나진 않았다.
“폐하, 아직은 큰 위험도 아닌데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맞지 않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제국의 중심이신 폐하의 옥체가 상할 위험이 있사옵니다. 이번엔 신하들에게 맡기시옵소서.”
루피엘과 재상이 반대하자 카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루터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실컷 고생해서 짝을 맺어 줬더니…….’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카리엘이 루피엘을 보며 말했다.
“이곳엔 네가 있잖아.”
“폐하! 소신은 폐하를 따라가기엔 너무도 부족하옵니다.”
황급히 고개를 처박으면서 말하는 루피엘.
“흠흠! 그동안 잘해 왔잖느냐.”
“매일같이 혼내시지 않사옵니까?”
루피엘의 말에 카리엘이 식은땀을 흘렸다.
“매일 저를 부족하다 꾸짖으시면서 이제 와서 잘해 왔다니요.”
루피엘의 반격에 대신들이 가만히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거 좀 살살 하지 그러셨습니까.’
‘잘한다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에휴…….’
하나같이 이런 생각이 담긴 눈빛을 발산하는 대신들.
하지만 카리엘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자신이 빠진 자리를 메꿔야 하는 루피엘이기에 짧은 시간동안 더 혹독하게 가르쳐 왔던 것이다.
아무리 은퇴가 급하다지만 그래도 제국이 망가지는 걸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까진 완벽히 안정되었다 보긴 힘들기에 잘 가르치려 하다 보니 매번 호통을 치게 된 것이다.
“폐하, 전 아직 부족합니다.”
“음…… 완벽히 준비된 자가 누가 있겠느냐? 다 경험해 보면서 하는 것이다.”
“형님! 정말 이러실 것입니까?”
마침내 분노가 폭발해 버린 루피엘.
“일단 네가 좀 맡고 있어 봐.”
“폐하!”
“나도 신혼여행은 가야지.”
카리엘의 말에 입을 꾹 다문 루피엘.
“그러다 안 돌아오시게요?”
“돌아온다. 돌아와!”
그러나 루피엘은 카리엘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겸사겸사 근처에 과거의 잔재들 좀 처리하면서 몇 년간 안 돌아오시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움찔하는 카리엘.
“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돌아온다고 말은 하지만 이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재상이나 루피엘이나 전부 불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자 카리엘이 타이르듯 말했다.
“일단 내가 과거의 잔재들을 직접 보긴 해야 해.”
진지한 음성으로 얘기하자 루피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카리엘의 말을 기다렸다.
“세리엘이 보고한 것. 그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카리엘의 말에 루피엘도 아까의 심각한 분위기를 기억해 내곤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제2의 마왕 같은 놈이 나타날 수도 있어.”
“설마요.”
루피엘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카리엘이 잠깐 생각하다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발드르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말해야 하나 싶었으나 일단은 입을 다문 것이다.
“……형님?”
“후…… 아무래도 촉이 좋지 않아. 신혼여행이 끝나는 대로 이 사안만큼은 내가 직접 다룰 거다.”
“……정말입니까?”
카리엘의 말에 세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타리온.”
“예, 내 소환체들이 있을 만한 곳 좀 빠르게 추려 봐.”
“알겠습니다.”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자 이것이 연기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루피엘과 루터.
그런 둘에게 말했다.
“이 사안만큼은 진짜니까 의심하지 마.”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루피엘.
간신히 동생을 설득한 카리엘이 세리엘의 특수군 창설을 허락하는 것으로 긴급회의를 마쳤다.
* * *
그렇게 모든 이들이 황제의 궁에서 빠져나간 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아일라를 불렀다.
“늦게 불러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폐하.”
미안하다고 사과한 카리엘이 헛기침을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아일라.
“이것은…….”
“데이트 코스를 짜 봤는데…….”
“예?”
데이트 코스를 짰다는 카리엘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아일라.
“폐하께서 직접 하신 것입니까?”
“물론. 연애하고 싶다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아일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결혼해서 미안하지만,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까지만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아……”
“물론 신혼여행도 나름 공들여서 계획을 짜고 있으니 걱정 말게.”
진지하게 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던 아일라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폐하께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흠흠! 나라고 은퇴만 생각한다고 착각하면 곤란해.”
“네.”
웃으면서 대답하는 아일라.
그런 그녀를 향해 카리엘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첫 데이트를 시작해 볼까?”
카리엘의 말에 수줍게 웃으면서 손을 잡은 아일라가 천천히 황궁을 거닐었다.
익숙한 황궁이었지만 데이트라는 생각이 더해지니 색다른 곳이 되었다.
* * *
그렇게 황제와 황후 후보자의 첫 데이트가 있을 무렵, 루피엘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전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터 자네…….”
“흠흠! 죄송합니다!”
차마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지 황급히 도망가는 루터.
그런 그를 보면서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떠는 루피엘.
“나만 없네. 나만!”
믿었던 루터도, 그 밑에 있던 젊은 관료들도 대부분 짝을 찾았다.
황제의 명에 축제 기간 동안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모두들 제 짝과 함께 달콤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고요한 황궁에서 홀로 일하는 건 루피엘뿐.
“하…….”
자신만 솔로라는 생각에 분노한 루피엘.
남들 다 데이트할 때 혼자 분노를 담은 채 일을 하는 황태자를 보면서 시종들이 말없이 문을 닫아 주었다.
황제부터 관료들까지 때아닌 연애 열풍을 불어 대며 솔로들의 염장을 지르는 동안, 군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내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대 최고의 황제의 혼인이다.
당연히 세계 최고 수준으로 준비해야만 했기에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 과연 얼마나 화려할까?」
「사실상 가려진 간택식. 각국의 지도자들은 벌써부터 이그니트로 떠날 준비를 하다」
「마침내 결혼하는 황제 폐하. 우리 폐하는 고×가 아니다!」
여러 기사들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리엘의 혼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조용히 특수군 창설 역시 준비되고 있었다.
카리엘이 신혼여행을 떠남과 동시에 특수군도 창설되며 과거의 잔재들을 청소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