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1. 은퇴 싸움의 승자는? (5)
공국의 공녀면서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국 10대 상단의 상단주 자리에 오른 그녀.
빠른 속도로 성장한 그녀는 적어도 상계에서만큼은 이름을 알아주는 여인이었다.
이 상태로 성장한다면 몇 년 안에 제국 10대 상단이 아니라 세계 10대 상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런 그녀가 제안하는 거래란 무엇일까?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그럼 폐하께서 계획하신 일을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짐이 계획하는 일이라…….”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세우자 아일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 간택식 이후 황태자 전하를 황위에 올리시겠지요.”
“……그래서?”
자신의 계획을 아는 건 놀랍지만, 이 정도는 정보만을 갖춘 지도자들이 머리 좀 굴린다면 추측할 수 있는 일.
“혼인 이후 한동안 자리를 비우실 생각이겠지요?”
“그렇지.”
“그걸 제가 돕겠습니다.”
신혼여행과 외가를 방문한다는 핑계로 루피엘에게 일을 떠넘기리란 것쯤은 카리엘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일.
물론 아일라 역시 여기까지만 유추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계획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나름대로 준비해 온 게 있었다.
“……뭐지?”
“마침 제 상단에 중요한 거래가 몇 개 생겼습니다.”
아일라의 말을 듣는 순간 카리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신혼여행 때 그곳들을 방문할 셈인가?”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아일라의 말에 카리엘의 입꼬리가 찢어질 기세로 올라갔다.
“재밌군.”
“그리고 또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
“그렇습니다. 폐하께선 언제나 제국을 생각하는 분이신 걸 알기에 저희 상단이 자체적으로 뚫은 무역망 일부를 제국과 같이 사용하고자 합니다.”
카리엘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아일라.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카리엘을 지켜본 여인답게 카리엘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카리엘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가져온 것을 넘어 선물까지 확실히 챙긴 그녀.
“연애보다는 은퇴와 제국을 위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신 폐하께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요?”
당당한 그녀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도 연애 좋아하는데?”
“……네?”
카리엘의 대답에 당당했던 아일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호…… 혹시 마음에 두신 여인이라도…….”
“아! 그건 없어. 다들 도망가기 바쁘더라고.”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자 아일라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빙그레 웃은 카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한 가지만 묻지.”
“말씀하십시오, 폐하.”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는 아일라를 빤히 바라보던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짐의 동생들에겐 관심이 없나?”
카리엘이 공국을 떠나면서 했던 말.
그걸 기억하고 있는 카리엘의 모습에 아일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 없습니다.”
“흠~ 그래?”
“네. 아무래도 폐하만 보다 보니 눈이 너무 높아졌나 봐요.”
혀를 내밀면서 말하는 아일라를 보면서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을 줄 알았는지 놀람과 불안함이 반반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카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의 제안도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나?”
“아…….”
카리엘의 말에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린 아일라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르니에 폴 상단주는 일단 거르십시오.”
“호…… 이간질인가?”
“흠흠! 그보다는 그녀는 다른 이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다른 이라……. 누구?”
“글렌 경입니다.”
그녀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렌 경과 마르니에 상단주가 접점이 있었던가?”
“아이론 내전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합니다.”
“호오……”
“그 이후 몇 번 글렌 경과 만났었지만…….”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군!”
카리엘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 말고는 관심이 없는 글렌 때문에 지친 마르니에. 그때문인지 상단의 일에 열중했었고, 덕분에 그 천재성이 빠르게 개화하여 지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검에 미쳐 사는 글렌에게 지쳐 식다 못해 얼어버린 심장이 그녀를 냉혹한 상단주라는 별명을 갖게끔 만든 것이다.
“흠…… 글렌 경이 무심하긴 하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이건 내가 꼭 이어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아일라를 보면서 말했다.
“그럼 남은 건 룬디아 성녀인가? 왜, 그녀도 누구를 좋아했나?”
“네.”
“재밌군. 이번에도 내가 아는 사람인가?”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세리엘 총사령관이니까요.”
의외의 인물이 나오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리엘? 그럴 리가.”
“아마 세리엘 총사령관은 모를 겁니다.”
“아…….”
아일라의 말에 카리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엘도 은근 둔한 구석이 있었다.
똑똑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자기 일에는 둔감한 녀석인 만큼 웬만큼 티를 내는 것이 아니고서야 알아먹기는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세리엘을 좋아한다면서 간택식은…… 왜?”
“세리엘 총사령관이 너무 둔해서 반쯤 포기했다고 해요. 그래서 눈길을 돌린 거죠.”
“나나 루피엘은 다를 거다?”
카리엘의 물음에 아일라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카리엘의 표정을 보자마자 확신한 것이다.
‘경쟁자 제거 완료!’
해냈다는 표정으로 웃음 짓는 아일라를 본 카리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겼네.”
카리엘의 확답게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다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는 아일라.
그런 그녀를 보면서 미소를 짓다가 궁금한 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가장 먼저 올 수 있었지? 경쟁자가 많았을 터인데.”
“아……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일라가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여인들이 죄다 나가떨어진 이후, 카리엘이 물러났음에도 쉬이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 여인들.
그 빈틈을 아일라가 노린 것이다.
강력한 경쟁 후보들이었던 마르니에나 룬디아 성녀 같은 경우 아까 말했던 세리엘이나 글렌을 보다가 한발 늦은 것도 있었다.
“축하하네.”
카리엘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짓는 아일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네요.”
“아쉬운 점?”
“네. 경쟁자가 없어져서 좋긴 하지만 황비는 제가 모르는 인물들도 채워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10대 상단주답게 안면이 있는 마르니에나, 교국을 대표하는 성녀라 상당히 친했던 그녀들.
본래라면 그녀들 중 하나가 황후가 되고 나머지는 황비가 되었으리라.
이제는 그게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황비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이 점을 아쉬워한 것이다.
“흠…… 황비는 들일 생각이 없는데?”
“네?”
“혼인은 한 명이면 충분하지. 황위에서 물러날 내가 황비를 여럿 두어서 뭐 하겠나?”
“아…….”
카리엘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아일라.
그동안 보인 카리엘의 이미지대로라면 정략결혼으로 황비를 잔뜩 들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한 정보를 내주어서 고맙군. 난 못난 신하들을 맺어 주러 가 봐야겠네.”
“네!”
“나중에 황궁에서 보지.”
황궁으로 초대하겠다는 말에 환한 웃음을 짓는 아일라.
그런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한 카리엘은 못난 신하들의 짝을 찾아 주기 위해 움직였다.
첫 타깃은 글렌이었다.
“글렌 경.”
“예. 폐하.”
“여기 앉게.”
카리엘은 강제로 글렌을 테이블 한쪽에 박아 넣은 다음, 마르니에 상단주를 불렀다.
“1시간. 그동안 둘이 얘기를 나눠 보게. 참고로 이건 명령일세.”
자신이 없는 동안 멀뚱히 서 있던 글렌을 강제로 마르니에 상단주와 엮어 준 카리엘은 이번엔 세리엘과 룬디아 성녀를 엮어 주었다.
“형님, 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얌전히 형님 말을 들어라. 너 하는 꼴 보니 이러다 평생 결혼 못하게 생겼어.”
“아니……”
“둔한 놈이니까 그거 감안하고 얘기하게. 못난 동생이라 미안하군.”
“아…… 아니옵니다.”
속전속결로 룬디아 성녀와 세리엘까지 엮어 주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황후 후보였던 둘이 엉뚱한 사람들과 엮이게 된 것이다.
황후 후보 중 둘이 사라지자 빈틈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지만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일라 상단주가 되었군.”
“그러게.”
샤르도나 후작이 남아 있었지만 알만한 이들은 그녀와 카리엘이 맺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고위 관료들 중에선 대부분 이번 연회를 통해 새로운 커플이 생길 것임을 알았다.
“샤르도나 후작!”
“예! 폐하.”
카리엘의 부름에 단숨에 달려온 여인.
세계 제일의 미인이란 별명을 가진 그녀답게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본 카리엘이 슬쩍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아닌 듯싶으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인물.
“쯧쯧! 살바토르 경! 거기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나와서 당당하게 고백하게.”
“……예?”
대륙에서 손꼽히는 미남으로 불리는 살바토르.
아이론의 제일검으로 불렸던 그.
그가 샤르도나를 좋아한다는 건 군부의 고위 관계자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살바토르가 샤르도나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나보다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
이 단순한 이유.
처음엔 이러한 이유였지만 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좋아하게 된 마음은 더 커져만 갔고, 예전이었으면 모를 멍청한 모습을 자주 보이면서 군부의 다수가 알게 될 정도로 소문이 나 버린 것이다.
“샤르도나 후작.”
“……예, 폐하.”
“좋아하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그럼 한번 만나 보게. 멍청하게 몇 년간 저러고 있으니 안쓰러워서 말이지.”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살바토르를 바라보던 샤르도나.
언제나 임무만을 생각하며 달려왔던 그녀였기에 안절부절못하는 살바토르를 봐도 딱히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명령이시라면…….”
“쯧! 그래, 명령일세. 오늘부터 간택식이 끝날 동안 매일 둘이서 데이트하게. 알겠나?”
“……예.”
카리엘의 명령에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 샤르도나.
그렇게 또 하나의 커플을 만들어 준 카리엘은 그동안 업무에 치여 안쓰러운 인생을 살던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적당한 여인들과 맺어 주었다.
그러자 간택식이 중매 자리가 되어 버리면서 수많은 커플들이 탄생했다.
그렇게 혼란과 충격 속에 탄생한 커플들 속에서 카리엘이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아! 참고로 황후 후보는 아일라 상단주로 정했네. 그럼 다들 좋은 시간을 보내게.”
카리엘의 선언에 예상하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예상치 못한 이들은 눈을 부릅뜬 채 언제 아일라 상단주와 만났는지 궁금해했다.
그렇게 여러모로 놀라웠던 연회가 끝나고, 곧바로 수도 전역에 신문기사들이 퍼져 나갔다.
「아일라 상단주! 단독 후보로!」
「황후 후보였던 이들은 각자 짝을 찾았다?」
「황제 폐하는 중매쟁이?」
자정을 틈타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 소식은 대륙 전역에 퍼져 나갔다.
애초에 예정되다시피 한 황후 자리였기에 충격적인 소식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발표한 카리엘의 선언은 황비 자리를 노리고 온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짐은 황후 하나로 족하다.”
짧은 선언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간택식에 참여한 여인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황비 자리 대신 든든한 남편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중매를 서 준 덕분에 괜찮은 남편감을 얻은 여인들은 사실상 간택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수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새로이 연을 맺게 된 애인과 함께 수도를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연회장에서 수많은 커플들이 탄생했기 때문일까?
수도에는 때아닌 연애 바람이 불어왔다.
곳곳에서 열린 파티에서 커플들이 탄생했고, 이런 분위기를 이어 가 주려는 것인지 카리엘이 직접 며칠간 축제를 선포했다.
동시에 황궁을 개방해 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결혼도 연애도 해야지.”
그런 카리엘의 말에 회의장에 참석한 몇몇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흠흠! 폐하, 결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재무대신의 말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와 결혼 생활은 다르다는 그들의 주장에 전전생과 전생, 현생을 통틀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카리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그보다 다음 계획은?”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당장 내일 군부에서 발표할 생각입니다.”
군부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루피엘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기사가 조간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