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79화 (외전) (179/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외전 1. 은퇴 싸움의 승자는?

재상과 시종장의 은퇴로 촉발된 은퇴 싸움.

황궁 안에선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허허. 재밌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여유로운 (전)재상과 (전)시종장의 티타임.

매일같이 은퇴하면 곧바로 지방으로 떠날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재상이었지만 막상 은퇴하자 중앙에 박혀서 여유롭게 내정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이 중앙을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은퇴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저 멀리 멀어졌기에 안심하고 중앙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판도를 즐겁게 구경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제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내무적으로 정쟁을 하면 제국민들은 한숨을 푹푹 쉬기 마련이지만, 이그니트는 달랐다.

「은퇴 싸움 오늘로 432일째 무승부!」

「그래도 유리한 건 황태자 측?」

「황태자 은퇴가 먼저일까?」

이제는 하나의 가십거리가 된 지 오래인 은퇴 싸움.

황궁 내에서야 심각한 일이지만 이미 이그니트를 넘어 다른 국가에서도 이 일을 가십거리로 생각할 만큼 웃기는 일이 되었다.

“생각보다 곤란하게 되었군.”

카리엘의 말에 황제 궁에 모인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카리엘을 황좌에 꽉 붙들고 있는 루피엘은 꽤나 까다로웠다.

대신들과 감찰총장까지 포섭한 화려한 카리엘의 라인에 비해 루피엘의 힘은 미약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대중의 힘으로 메꾸고 있었다.

「중년 남자로 구성된 카리엘 라인 vs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루피엘 라인」

어느새 이렇게 틀이 박혀 버린 것이다.

“하…… 내 나이가 몇인데…….”

타리온이 준 보고서를 읽으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전원 중년들로 구성된 대신들과 달리 카리엘의 나이는 굉장히 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 나이 40세가 넘는 중년의 팀원들 때문에 카리엘 역시 ‘늙은이’ 취급을 받으면서 신진 세력의 대척점에 선 거두로 보이고 있었다.

“뭐 나이야 그렇다 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나 하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은퇴하고 싶으면 의견 좀 내 보라는 무언의 압박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내무대신이 손을 들었다.

“폐하, 저들이 가진 가장 큰 패는 혼인 아니겠습니까?”

내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카리엘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혼인이었다.

“폐하! 황위에 오르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사옵니다. 이젠 정말 후사를 생각하실 때가 아닌지요.”

얼마 전에도 찾아와 이런 말을 툭 던지고 간 세리엘을 보면 이가 갈렸다.

더 얄미운 건 루피엘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세리엘은 마음속 깊은 충정에서 나온 말인 양 카리엘의 후사를 걱정하는 말만 툭 던지고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루피엘과 같은 노선이 아닌 충정파 신하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제국민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이것이 짜고 치는 것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게 보이는 것도 중요한 법.

오히려 세리엘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자꾸만 명분이 동생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대 황비들께서도 나서실 것입니다.”

아직은 젊었기에, 그리고 제국에 큰 위기가 있었기에 잠자코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마계의 게이트도 남아 있고, 대륙 곳곳에 퍼진 과거의 잔재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변이된 존재들 때문에 태평성대까지는 아니라곤 하지만 이젠 단순히 생존 그 이상의 내실을 다질 때가 된 것이다.

카리엘의 어미인 선황후가 죽었기에 황태후 자리는 공석이다.

그렇기에 황비들이었던 황태비들이 나설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후…… 황태비 마마들이 나서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저희들이 막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내무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카리엘이 폭군처럼 몰아붙인다면 반대는 할 수 있겠지만 정치 싸움으로 가면 결국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혼인을 한 순간 황궁에 발이 묶을 것이고, 아이라도 낳는 순간 루피엘은 이를 명분으로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할 것이다.

점점 옥죄어 오는 압박감.

은퇴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은 카리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한배를 탄 이상 대신들 역시 카리엘이 은퇴를 하지 못한다면 마지막까지 붙잡혀서 구를 수도 있는 것이다.

본래라면 승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관료들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을 선호했다.

돈은 꽤 벌어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을 정도? 대신 황궁이나 중앙 관료가 아닌 지방의 여유로운 곳을 가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중앙에서 최대한 빨리 승진한 후, 적당히 책임질 구실을 만들어 스스로 지방에 좌천되어 내려가는 계획을 세우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현재의 젊은 이들은 여가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대신들과 고위 관료들은 애가 탔다.

“폐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카리엘의 허락에 모두가 외무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께선 혼인을 하기 싫어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말이지?”

“음…… 만약 은퇴할 수 있다면 혼인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카리엘의 물음에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하는 외무대신.

그런 그의 물음에 대신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혼인을…… 했는데 은퇴를 할 수 있다?”

“예.”

확신에 찬 외무대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혼인을 하는 순간, 현 황태자가 은퇴한다고 난리칠 게 뻔했다.

황궁의 내사를 책임지는 선황녀 미리엘도 다 내려놓고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판국에 카리엘의 은퇴?

“더 말해 봐.”

카리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생각을 정리한 외무대신이 계획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일단 혼인한다고 결정을 내리시면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지금처럼 압박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결 여유있게 황태자의 공세를 받을 수 있으리라.

“그다음은?”

“일단 누구든 간택하셔서 혼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가 중요했다.

혼인하는 순간 미리엘과 루피엘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것.

이게 바로 핵심이다.

“일단 혼인을 하셨으니 신혼여행은 가셔야겠지요?”

“그렇……지?”

“겸사겸사 신부 될 분의 외가도 들르셔야 할테지요.”

외무대신의 말에 다들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계획은 바로 ‘시간’이었다.

혼인한다면서 시간을 끌고 신혼여행을 통해 한 번 더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다음은 뭘까?

“내가 없는 동안 루피엘이 정국을 잘 이끌어 주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카리엘이 없는 동안에도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끈다면 굳이 카리엘이 황좌에 계속 앉아 있어야만 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럼 상황으로 빠진다는 이유도 들 수 있을 터.

마침 적절한 이유도 있었다.

카리엘의 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

이걸 핑계로 주요 업무를 루피엘에게 계속 미루면서 상황으로 빠질 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듯한 계획이었으나 루피엘의 힘이 강해지는 만큼 압박도 더 심하게 들어올 터. 그때까지 신혼여행을 핑계로 버틸 수도 없을뿐더러 은퇴 각을 잡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예. 그러니 신혼여행으로 시간을 끌면서 루피엘 저하의 능력을 검증하게끔 한 후, 폐하께선 다음 행보를 준비하셔야 하옵니다.”

“그게 뭐지?”

“마침 폐하의 소환체들이 대륙을 위한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응?”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외무대신.

모두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폐하께선 ‘신’과 소통하는 신의 사자이시지요. 그리고 아직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

외무대신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전부 깨달은 카리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군. 나쁘지 않은 계획이야.”

카리엘의 소환체들.

그들 개기인의 소원 때문에 카리엘의 곁을 떠나간 것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현재 제국에서 카리엘은 신의 사자이자 거의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

그런 그가 아직 대륙에 남은 위협을 막기 위해 움직인다는데 어쩔 것인가?

“덤으로 세리엘도 꼬셔 볼 수 있겠어.”

“예?”

외무대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말했잖나, 내 명분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과거의 잔재들과 위협이 될 존재들을 지우는 것이라고.”

“그렇사옵니다만…….”

“그럼 세리엘도 비슷한 명분으로 총사령관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카리엘의 말에 대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군부대신만은 의도를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세리엘 저하에게 특수군의 지휘를 맡기실 생각이군요.”

군부대신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높은 지휘가 아닌 오직 과거의 잔재들의 처리를 위한 특수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대전쟁에서처럼 빡빡한 일정이 아닌, 여유롭게 서대륙을 돌면서 위협을 처리할 예정이고, 군대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을 터이니 세리엘도 충분히 만족할 터.

“유람한다 생각하며 천천히 군을 움직이게 만들어 주면 녀석도 혹하겠지.”

“루피엘 전하와의 사이를 갈라놓음과 동시에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니 천하의 루피엘 전하도 어쩔 수 없겠군요.”

“하는 김에 군부도 꼬셔야지. 그쪽도 나이 지긋하신 노장들 많지 않나?”

카리엘의 말에 군부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과 시종장도 죽을 때 다 되어서야 은퇴했다는 말이 나오는지라 차마 은퇴 각을 잡지 못하는 노장들이 수두룩했다. 거기다 세리엘이 카리엘과 반대편에 서고 있으니 더 말하기 어려웠을 터.

그들에게 대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은퇴로 살살 꼬시면 무조건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법 재밌는 그림이 그려졌군.”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무대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자네를 가장 먼저 이곳에서 탈출시켜 주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외무대신과 그런 그를 보며 만족스레 웃는 카리엘.

잠시 외무대신들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대신들이었으나, 자신들 역시 곧 은퇴를 할 예정임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계획을 좀 더 상세하게 만들기 위해 긴 회의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야밤을 틈타 긴 회의를 한지 며칠이 지났을 때, 루피엘 황태자가 마침내 칼을 뽑아 들었다.

바로 선대 황비들이 카리엘의 후사가 걱정된다며 직접 편지를 보낸 것이다.

“마침내 때가 되었군.”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대전회의를 소집했다.

황태비까지 나선 마당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법.

모든 대신들과 고위 관료들이 모이는 대전.

그곳에서 카리엘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짐이 부족해 태비마마들의 걱정을 끼쳤구나.”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루피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루피엘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카리엘이 핑계를 대며 미루려는 순간, 곧바로 앞으로 나설 생각으로 준비를 하는 루피엘.

“제국민도 태비마마도, 그대들도 모두 짐의 혼인을 원하니 해야겠지. 혼인할 테니 내무대신은 준비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카리엘의 말에 루피엘의 눈동자가 떨렸다.

마치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한다고?’라는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

그런 그를 보면서 이번엔 카리엘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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