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76화 (176/201)

176-65.종전!

발드르와 만난 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왠지 굉장히 오랜만에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드득!

“윽!”

오랜만에 깨어난 것이 확실한지,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이곳저곳에서 ‘우드득!’ 하고 소리가 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쓰러질 때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으음······.”

오랜만에 일어나서 그런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전체가 마법진으로 뒤덮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약병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응하겠다는 치료사들의 의지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포션으로 찰랑거리는 관을 보면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르트.”

카리엘이 허공에 대고 수르트를 부르는 순간, 몸 안에 있던 화기가 자연스레 밖으로 분출되었다.

- 오래도 자네.

혹시라도 카리엘의 몸에 부담이 갈까 최대한 작게 나타난 수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얼마나 지난 거야?”

- 반년.

“뭐?”

반년이나 지났다는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목소리가 컸던 것일까?

갑자가 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리면서 시종장이 들어왔다.

“폐하!”

늙은 시종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하는 순간, 근방에 있던 자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문 밖에서 카리엘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갔는지 대신들부터 동생들까지 전부 카리엘이 있는 방으로 몰려왔다.

이럴 줄 알고 있던 카리엘이 황급히 몸을 씻고 편한 얼굴로 갈아입은 후, 그들을 맞이했다.

“흐어어어엉! 형님!”

“꼭! 꼭! 형······ 형님이 깨어······ 나실 줄 알았어요!”

오열하는 두 동생들의 뒤로 대신들 역시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과연 카리엘 때문인지, 아니면 서류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찌 되었든 많은 이들이 카리엘이 깨어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카리엘이 오열하는 동생들과 눈물을 흘리는 대신들을 다독여 줄 때였다.

“미······리엘?”

어느새 훌쩍 커 버린 미리엘이 눈물을 애써참아 내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일까?

결국 카리엘의 품에 안기는 순간 애써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아아앙!”

자신의 품속에서 우는 미리엘을 다독이면서 카리엘이 시종장에게 물었다.

“내가 정확히 얼마 만에 깨어난 거지?”

“6개월하고 보름이 지났습니다.”

“······오래도 걸렸군.”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울고 있는 동생들을 한참 더 다독여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카리엘을 보면서 모두들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을 도와주려 했지만 카리엘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그동안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좀 듣고 싶은데······.”

“형님, 좀 쉬시는 것이······.”

루피엘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지만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빠르게 듣고 싶었다.

마왕이 어떻게 되었는지, 마왕군은 어찌 되었는지를 듣지 않고선 계속 찜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루피엘을 비롯한 동생들과 대신들이 물러나고 뒤늦게 달려온 타리온과 시종장, 재상이 카리엘이 쓰러지고 난 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마왕은 죽은 게 확실하다?”

“예.”

카리엘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며 쓰러질 때, 그림자들과 함께 온 타리온이 직접 확인했다.

심장은 확실히 멈췄다.

문제는 죽은 마왕의 시신을 왜 그토록 애지중지하면서 데려갔느냐였다.

“마왕이 부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더 말해 보라는 듯 타리온을 재촉했다.

카리엘이 후방으로 옮겨진 후 마왕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 인류 연맹.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상위 마족들과 몇 명의 마군단장들이 죽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기어코 포위망을 뚫었다.

그 과정에서 인류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교국의 하나뿐인 태양검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이론의 마스터 살바토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또한 로만의 마도사도 목숨을 잃었다.

압도적인 우위의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인류의 군대에 극심한 피해를 입힌 마왕군.

“황소 머리의 마군단장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습니다.”

예상 이상의 무력을 보여 준 황소 머리 마군단장.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보인 호랑이족의 마군단장.

로칸과 에쉬타르에 의해 마왕군을 한계까지 몰아세웠을 때 이 둘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해 결국 마왕군의 주력이 마왕을 데리고 마계 게이트를 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마왕을 완전히 확인 사살하지 못했다는 거군.”

“송구합니다.”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타리온.

“후······ 지나간 일은 들춰서 뭐 하겠어. 그보다는 제국의 상황을 듣고 싶은데······.”

카리엘의 말에 이번엔 재상이 나섰다.

“아직도 은퇴를 못 했나?”

“······폐하께서 깨어나셨으니 이젠 정말 은퇴할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도 은퇴하지 못하고 있는 윈스턴을 보면서 웃은 카리엘이 그의 보고를 들었다.

마왕군의 주력군이 마계 게이트를 넘은 이후, 대륙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골란의 왕이 동대륙의 북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로만과 산드리아는 합쳐져 사막의 제국으로 부활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왕국의 연합들도 기사왕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렇게 크게 3개의 나라로 뭉친 동대륙.

이들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그니트가 잠잠했기 때문이다.

“거인의 산맥과 로만의 서쪽 영토를 집어삼키는 데서 멈추고 제국을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했다라······.”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을까?

생각에 잠긴 카리엘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는 재상과 타리온.

“잘했어.”

“예?”

“잘했다고. 괜히 동대륙까지 먹겠다고 나서봐야 탈만 나지.”

아무리 이그니트가 강대국이라고는 하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제국 역시 한계까지 몰린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영토를 늘린다?

관리할 것만 늘어나고 짜증만 더 나게 된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거인의 산맥 부근만 전부 점령한 상태에서 멈춘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종전을 안 했다고?”

“예. 제국민과 동대륙 측 국가들 전원이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직접 하시기를 희망했사옵니다.”

재상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제국이야 자신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동대륙은 숨은 의도가 있었다.

아직 종전이 되질 않았으니 그사이 박살 난 동대륙의 영토들을 흡수해 새로운 국가를 세워 보려는 것이다.

그 중심은 당연히 골란이겠고, 기사왕 역시 그김에 박살 난 국가들을 흡수해 동대륙 남부를 통일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동대륙의 일에 별로 관심 없는 카리엘은 옛로만의 서부영토만 요새들을 중심으로 집어삼킨 지금에서 딱히 뭘 더 할 생각이 없었다.

“나 없는 동안 꽤나 발전했네.”

“루터를 비롯한 신진 세력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제는 정말 은퇴하고 싶다고 강력히 어필하는 재상.

그의 말처럼 카리엘이 없는 동안 제국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제국의 암흑기 시절에 이어져오던 기술들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기술 발전을 시킨 게 주효했다.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그 돈들이 모조리 기술 발전을 위해 쏟아부어지다 보니 발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고대의 학자가 말했던 ‘전쟁은 인류를 발전시킨다!’라는 미친 소리가 정말로 딱 들어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났다.

확실히 전쟁도 끝났고, 안정화 및 발전에 몰두해야 하는 시기가 온 만큼 윈스턴이 은퇴해도 상관없으리라.

‘덤으로 나도 은퇴 각을 잡아 봐야겠지.’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각을 잡아 볼 수 있으리라.

루피엘이 아직 황태자 자리에 남아 있으니 녀석에게 일을 떠맡기고 슬그머니 상황으로 빠지다가 완전히 은퇴할 생각이다.

“흠흠! 발전 속도는 나쁘지 않아. 급하게 개혁한다고 여기저기 문제가 일어나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타리온을 보면서 물었다.

“이게 끝이야?”

“그것이······.”

대답을 망설이는 타리온.

그 모습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카리엘의 날카로운 물음에 타리온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후······ 흑마법사의 수장이 잡혔습니다.”

“······흑마법사?”

“예.”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걔네들은 마계로 안 간 거야?”

“대부분은 넘어갔습니다. 잡힌 건 흑마법사의 수장 혼자입니다.”

타리온의 말을 듣는 순간, 카리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혼자 남았다?”

“폐하의 마법을 막아 낸 이후 반쯤 폐인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로 생명력까지 끌어다 써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흑마법사들과 마족들이 도망칠 시간을 번 것.

“아직 살아 있어?”

“예. 살려 두었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폐하께서 직접 처단하시길 원할 것 같았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전생부터 현생까지 흑마법사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그렇기에 한 번쯤은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들의 수장을 직접 보고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어딨어?”

“폐하 그 몸으로는 감옥에 가시기가······.”

“어딨어?”

다시 한번 묻자 타리온이 한숨을 쉬면서 카리엘을 부축했다.

그럼에도 비틀거리자 결국 마법사까지 대동해서 공중에 떠서 감옥의 최하층까지 이동했다.

“······황제인가?”

백발의 모습으로 폐인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흑마법사의 수장.

“물러가 있어.”

“······예.”

타리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멀리 물러나자 카리엘이 흑마법사의 수장에게 다가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

카리엘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는 흑마법사의 수장.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어서 이 지랄을 떤 거냐?”

흑마법사로 인해 제국과 인류가 입은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왕과 지옥의 일은 예정된 일이었다 하더라도 흑마법사들로 인해 제국이 입은 피해는 예정된 게 아니었다.

이들만 아니었어도 제국은 더 적은 피해로 멸망을 대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생과 현생 모두 흑마법사로 인해 개같이 굴러야 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말해 봐. 대체 뭐가 불만이지?”

카리엘의 물음에 흑마법사의 수장이 피식 웃었다.

“공정함이 어긋나는 것.”

“신분제에서 그딴 걸 찾나?”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 제국은 그 정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말문을 연 흑마법사의 수장.

흑마법사들이 뭉친 이유는 간단했다.

능력이 있음에도, 오직 신분제라는 틀에 갇혀서 더 뻗어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이들조차 잔인하게 밖으로 내던지는 불안정한 사회.

최소한의 인권조차 팔아먹은 쓰레기 같은 상인들.

이 모든 것들이 흑마법사라는 단체를 유지하게 할 수 있었던 먹잇감이 되었다.

제국의 암흑기 동안 더 극심해진 사회의 불합리함.

그것을 제대로 겪은 것이 바로 흑마법사의 수장이었다.

마탑의 생체 실험 대상이 된 것부터 나중에는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가족들은 이미 노예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죽은 지 오래였다.

문제는 흑마법사의 수장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들 대부분이 이런 삶을 살아왔던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마족들이 나았다. 그들이 추구하는 힘의 논리는 잔혹하지만 힘있는 자들이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는 흑마법사의 수장을 보면서 카리엘이 작게 말했다.

“지금은 어떻지?”

“······.”

“그대가 말한 것처럼 아직도 불합리한가?”

카리엘의 물음에 흑마법사의 수장이 입을 다물었다.

혁명 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그토록 꿈꿔 왔던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아직도 불합리한 점은 꽤나 있었지만 제법 그럴듯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 중심엔 그토록 증오하던 황가의 중심인 현 황제가 있었다.

“그대의 잘못을 알려 줄까?”

눈동자가 떨리는 흑마법사를 보면서 카리엘이 나직이 말했다.

“그대가 말한 모든 불합리함, 확실히 문제였지. 그러나 제국은 개선되고 있었고,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대의 잘못은 바로 그 날개를 꺾으려 한 것이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듣고 싶은 걸 전부 들었는지 등을 돌렸다.

“자네의 수하들이 마계로 돌아간들 과연 행복할까?”

“······.”

“차라리 항복하고 죄를 뉘우쳤다면 이곳에서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다. 다행히 혁명세력은 그대처럼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지.”

그 말에 흑마법사 수장의 멍한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카리엘의 말처럼 혁명 세력은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카리엘이 주는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제국의 핵심 인재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흑마법사는?

“그대와 같은 황제가 좀 더 일찍 나타났다면······.”

후회하는 백발의 남자를 뒤로하고 감옥에서 나온 카리엘.

이제 이 세상에 흑마법사는 사라졌다.

마족들 역시 사라졌다.

훗날 그들이 게이트를 열고 다시금 침공할지 몰랐지만 그건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일.

현재의 이그니트 제국을 위협할 존재는 전부 사라졌다.

그렇기에 감옥을 나온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망설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종전 선언을 할 거야. 준비해.”

“예! 폐하.”

카리엘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제국에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할 무렵, 공영 신문에 대문짝만한 제목이 적혔다.

「종전선언!

현 시간부로 제국의 모든 위협이 사라졌음을 선언한다.

-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