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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69화 (169/201)

169-63.황제님 돌아오셨다!

가름이 자신을 물어뜯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여인을 상대로 카리엘과 소환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붉은 화염이 사방을 휘감으며 여인의 행동반경을 제한했고, 소환체들이 사정없이 팼다.

가끔가다 카리엘을 공격하려 하면 가름이 물어뜯었다.

가름의 공격은 위대한 경지를 이룩했던 존재치고는 굴욕적일 정도로 단순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현재의 헬의 힘으로는 가름에게 치명타를 먹이긴 어려웠기에 계속해서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고, 카리엘의 공격은 미약하게나마 헬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퍽! 퍽!

- 꺄아아아!

예로부터 다구리엔 장사 없다고,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공격이라도 정신없이 맞다 보니 어느새 헬의 신체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지옥의 타락한 대지조차 정화했던 카리엘이었기에, 타락한 기운으로 망령들을 묶어둔 신체들이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 나······ 나의 충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가름을 보면서 말하는 헬.

- 어째서 저 배신자들을 돕는 것이냐!

그렇게 말한 헬이 신화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며 분노했다.

억울하게 버림받은 일들부터, 멸망 이후 쓸쓸히 죽어 가던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

그 모든 것들을 피 토하듯 외치면서 가름을 향해 분노를 쏟아 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수르트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 하하하! 이젠 나도 알겠네.

"뭐?"

웃고 있는 수르트를 보면서 카리엘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스콜도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옥에서 과거의 자신의 조각들을 흡수한 스콜 역시 어느 정도 과거의 기억들을 회복하였기에 지금의 헬의 모습이 지옥을 군림하던 여인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다.

- 충견이여! 어찌 나를 대적하느냐! 대답하거라!

분노한 표정으로 다그치는 헬.

하지만 그럴수록 가름의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요지부동인 가름의 모습을 보면서 점차 다급해져 가는 헬.

그럴수록 가름은 더 저돌적으로 헬을 공격했다.

점점 힘이 빠져 가는 카리엘 대신 가름이 그 빈자리를 메꿔 주면서 거대했던 헬의 모습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아······.”

점점 줄어들어 가는 헬의 크기를 보며 로만의 황제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헬을 돕기 위해 로만의 모든 전력을 집중했건만, 그마저도 이그니트의 정예군에게 가로막혔다.

타리온과 아켈리오를 중심으로 짜인 단단한 방어망도 문제지만, 그들의 핵심 전력인 지옥의 군대가 카리엘의 불길을 뚫지 못하는 것도 컸다.

“이렇게 끝인가?”

로만의 황제가 절망 어린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면서 허망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직 이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그다.

믿었던 여신이 무너지고 있는 걸 실시간으로 보면서 절망했다.

결국 거대한 탑이 무너지면서 망령으로 유지되던 육체가 수많은 망령들로 되돌아갔다.

“아······.”

뒤늦게 도착한 산드리아의 황금매가 공허한 눈빛으로 무너지는 탑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이 무너지는 느낌에 이그니트와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는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무너지는 절망감 속에서 마침내 거대한 육체가 완전히 무너지며 제단에는 작은 여인만이 남았다.

얼굴 절반은 미녀지만, 나머지 절반은 흉측한 얼굴을 가진 가련한 여인.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거대한 개를 바라보았다.

- 어찌하여······

어째서 자신을 배신했는지 묻는 헬을 보면서 어느새 작게 변한 수르트가 대신 답했다.

- 넌 ‘헬’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니라고?

수르트의 말에 헬이 작은 불덩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 그래. 넌 그녀의 ‘기억’을 가졌을지언정 그녀가 될 순 없다는 것이지.

- ······헛소리.

헛소리로 취급하는 그녀를 보면서 수르트가 피식 웃었다.

- 바로 그 반응. 네가 진짜 헬이었다면 이렇게 반응하기보다 나와 싸우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수르트가 과거에 보았던 헬을 기억했다.

- 나 역시 영혼이 마모되어 흐릿하게 밖에 기억이 남지 않았지만, 선명히 기억하는 건 있다. 그건 바로 누구보다 당당하며 용맹하던 헬의 모습이지.

- ······

-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 아니다. 죽음의 땅에 버림받았음에도 홀로 털고 일어나 지옥 속에서 궁전을 만들 정도로 당당한 전사였다.

수르트의 말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하는 여인.

자신을 부정당하다는 모습에 떨리는 눈동자로 가름을 바라보자 어느새 작게 변한 가름이 그녀의 앞에 섰다.

- 수르트의 말이 정말인 것이냐?

헬의 물음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가름.

한참을 침묵하던 가름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 ······틀렸습니다.

가름의 대답에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 그래. 난······ 나는 헬이다.

- 맞습니다.

그렇게 말한 가름이 과거를 떠올렸다.

매번 당당하고 패하더라도 미래에 복수할것을 다짐하면서 움직이던 그녀.

자신이 기억하는 헬의 이미지는 그러했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불안에 떨었던 때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소멸을 앞두었을 때였다.

자신이 죽은 이후 혼란에 빠질 지옥과 안식 대신 고통에 빠질 영혼들을 생각하며 울던 모습.

현재의 나약한 헬의 모습이 딱 죽음을 앞둔 그녀의 모습과 똑같았다.

- 그러니······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으십시오.

- 그게 무슨······

헬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흔들릴 때, 가름의 육체가 다시금 거대해졌다.

그리고 그 거대한 육체 속에서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하나의 작은 보석 하나를 헬에게 건넸다.

- 라그나로크 이후 죽은 저의 육체에 주신 것입니다.

가름의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보석이 가루가 되어 헬의 육신에 스며들었다.

과거 헬이 가졌던 유물들로 이루어진 육체에 가름이 품고 있던 헬의 보석까지 스며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가름이 갖고 있던 헬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그녀에게 스며든 것이다.

- 아······ 아······ 그래.

모든 기억을 되찾은 헬이 멍하니 가름을 바라보았다.

- 네가······ 나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 주었던 것이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헬.

그녀가 죽으면서 뱉었던 마지막 유언.

그것을 위해 죽음 이후 혼란에 빠질 지옥을 걱정했던 그녀를 대신해, 가름이 스스로 안식에 들기를 거부하며 지금까지 지옥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 나의 충견아. 이제 되었다.

헬의 말에 가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옥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상황.

그러니 자신은 안식에 들 수 없었다.

거부하는 가름을 보면서 헬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완강한 가름을 보면서 헬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 먼저 가서 기다리마. 그러니 얼른 마무리하고 오거라.

그렇게 말한 헬이 가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멀리서 절망에 빠진 로만의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직 안식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불쌍한 황제.

그의 과거를 모두 읽은 헬이 가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 미안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헬의 말에 가름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저들의 죄를 씻어 줄 수 있겠느냐.

안식에 들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되풀이하는 이들.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선 과거 헬의 권능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 헬의 권능은 거의 사라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저들의 죄를 씻을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헬을 대신해 지옥을 관리하는 모드구드의 허락을 받는 것뿐이었다.

지옥의 절대자였던 헬은 이미 없으니 그녀가 가진 과거의 잔재들과 현재의 관리자의 인정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사실 모드구드는 헬이 죄를 사하였다 하는 순간, 동대륙의 망령들을 놓아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이 가름에게 부탁하는 것은 저들의 원죄를 완전히 씻어 내기 위해선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헬의 힘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것은 유물도, 모드구드도 아닌 바로 가름이었다.

- 부탁하마.

가름이 대답 대신 카리엘을 바라보자, 헬은 시선을 돌려 카리엘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오직 조상들과 죄 없는 영혼들의 안식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각오했던 로만과 산드리아의 병사들.

하지만 그들로 인해 희생된 자들이 너무 많았다.

과연 이들의 희생을 외면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맞을까?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에 고심하는 동안 저 멀리서 로만의 황제가 천천히 걸어왔다.

헬의 힘으로 무너진 궁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방금의 대화를 들었다.

그렇기에 로만의 황제는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자신은 어떤 고통을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죄 없는 이들이 대를 이어 고통받는 것만이라도 멈출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침묵하는 카리엘을 향해 로만의 황제가 천천히 걸어왔다.

털썩!

갑자기 카리엘의 앞에 무릎을 꿇는 로만의 황제.

“내가 지은 죗값은 달게 받겠소. 그러니 죄 없는 이들에게 만이라도 안식을 주시오.”

자신들의 황제가 무릎을 꿇자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오는 이들.

무기를 내던지면서 카리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디······ 제 자식들이라도······.”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아이들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현실의 삶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죽은 이후 받은 고통만이라도 멈춰 달라는 간절한 외침.

어느새 달려온 산드리아의 군인들 역시 엎드리면서 간절하게 외쳤다.

생자만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망령들 역시 간절하게 외쳤다.

자신들은 상관없었다.

그저 아이들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후손들만이라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외침.

그런 그들의 간절함을 본 카리엘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이들이 죽은 이후에도 죗값을 다 받기 전까진 안식에 들지 못하게 할 수 있나?”

카리엘의 물음에 가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릎을 꿇은 로만의 황제를 보며 말했다.

“그대들의 죄는 실로 중하기에 용서를 할 수 없다. 다만······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이들에겐 자비를 내려 주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가름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제야 헬이 미소 지으며 카리엘을 향해 말했다.

- 저승의 축복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헬이 카리엘의 이마에 있는 문양에 입을 맞춘 후 가루가 되어 서서히 사라져갔다.

- 불쌍한 나의 충견에게도 구원이 오기를 희망하마.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완전히 사라진 헬.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 몸을 구성하던 유물 역시 가루가 되었다.

대신 그녀가 가진 모든 힘들이 가름에게 주었던 보석에 모여들었다.

그 보석을 소중히 문 가름은 꿀꺽 삼켰다.

그 순간, 간신히 유지되던 궁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무너지는 궁전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리엘이 로만의 황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대들이 할 일은 딱 하나다. 죽음을 각오하고 지옥에서 올라온 과거의 잔재들을 처리하는 것.”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로만과 산드리아의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외쳤다.

“대륙에 모든 과거의 잔재들이 없어지는 날, 그대들과 이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 역시 안식을 맞이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조상들을 위해서라도 움직여라!”

카리엘이 용서한 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죄 없는 이들에 한할 뿐, 이 사태를 벌인 많은 이들과 원죄를 지은 조상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죽음 이후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선 대륙의 모든 과거의 잔재들을 지워야 할터.

자신들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구를것이다.

- 또 굴리는 거냐?

“죗값은 스스로 갚아야지.”

앉아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사형당하는 건 현 시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굴려야 했다.

대륙의 모든 과거의 잔재들이 사라질 때까지 저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온갖 문제들이 발생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그동안 희생당한 이들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면 결코 저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리엘의 선언 이후 완전히 무너진 지옥의 궁전.

마침내 인류 연맹이 로만, 산드리아와의 전쟁마저 승리하자 이 소식은 곧바로 대륙 전역에 알려졌다.

「무너진 지옥의 궁전. 인류의 구원자가 지옥의 군대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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