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63.황제님 돌아오셨다!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면서 돌아온 카리엘 덕분일까?
숨을 죽으며 세력을 키우던 마왕군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그니트 역시 모든 전력을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큰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았던 것과는 다르게 마왕군은 주요 요새들을 점령한후,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군이 진군을 멈추자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전쟁광들이 멈춰 섰다고?”
“전력도 압도적인데?”
“뭐지? 마왕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마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추측했고, 그 추측은 반은 맞았다.
- 이게 전부인가?
마왕이 주먹에 묻은 푸른 피를 털어 내면서 이를 갈았다.
- 고작 이 정도인가?
지옥에서 넘어온 과거의 잔재들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던가?
과거의 신위를 회복하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위대했던 힘의 편린이라도 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 이들이 정말 신과 대적했던 이들이 맞나?
마왕의 물음에 근방에 있던 마족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더 강한 이들을 부활시켜, 마족들의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려던 위대한 계획이 무너지게 생겼다.
마계의 수많은 이들은 마왕 개인만을 위한 계획이라 생각하지만 달랐다.
마왕이 벽을 넘음으로써 더 이상 마신을 추종하지 말고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것.
설령 마왕 말고 어느 누구도 신의 반열에 들지 못할지라도 먼 훗날 마족 중 누군가가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계획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처참했다.
- 고작 이런 놈들을 위해 그 고생을 한 것인가?
마왕의 분노 어린 외침에 여우 귀를 가진 마족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 신은 다를 것입니다.
여우 귀를 가진 마족의 말에 마왕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왕군의 책사라고 불리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이순간만을 기다리면서 그녀의 실수 대부분을 넘어가 주었던 마왕.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강함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마왕의 기대감을 박살 낸 과거의 잔재들의 죄는 대계를 만들었던 마족들이 대신 뒤집어쓰게 생겼다.
- 아직 많은 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이라 불렸던 자들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여우 귀를 가진 여인의 말에 마왕이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강렬한 사기에 두려울 만도 하건만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 뭣하면 좀 기다리면 되옵니다.
- 과거의 잔재들이 힘을 회복할 때까지 말이냐?
- 그렇습니다. 그들이 회복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기다렸다가 싸우셔도 됩니다. 그동안의 지루함은······ 이자들로 푸십시오.
말을 끝낸 여우 여인이 품속에서 두 장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하나는 마왕을 막아섰던 주역인 글렌.
다른 하나는 이그니트의 황제인 카리엘이었다.
- 이자는······
- 지옥의 존재 한정이라고 하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우 여인의 말에 마왕이 잠시 고민하더니 피식 웃었다.
- 확실히 소문만 들었을 땐 강해 보이긴 했지.
그렇게 말한 마왕이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소문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 국가의 황제라면 더더욱 그러할터.
직접 무력과 천재성을 확인한 글렌과 아직 소문만 무성한 황제.
그 둘을 만날 생각에 마왕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 그래. 그래도 그 둘은 기대해 봄직하군.
어느새 화가 풀린 마왕을 보면서 마왕의 측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위기를 넘긴 여우 여인이 측근들에게 명을 내리면서 과거의 잔재들이 있는 곳을 알아 오라 시켰다.
마왕을 만족시킬 과거의 잔재들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며.
하지만 마왕은 이미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선 기대를 버렸다.
오히려 관심이 있는 건 인간 쪽이었다.
마족들이 숭배하는 '마신'을 비롯한 최상위 신들만이 기대감이 남았을 뿐, 나머지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 신을 상대하기 전까지 완전히 성장했으면 좋겠군.
글렌과 카리엘의 성장에 대한 기대감에 미소를 지은 마왕이 곰곰히 생각했다.
자신이 기다렸음에도 이 둘의 성장이 예상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그때는 직접 가지고 놀면서 성장시켜 봐야겠군.
분명 글렌의 재능은 자신과 비견될 정도였고, 소문대로라면 황제 역시 그러하리라.
하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더딘 성장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자신이 직접 데리고 놀면서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면 생사결을 통해 이 한계를 넘어 볼 생각이었다.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굳이 과거의 신적 존재들을 찾아 않아도 지긋지긋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재밌군.
분명 대계는 반쯤 실패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던 소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획에 없었던 일이건만 오히려 자신의 계획에 다가가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만으로 흥분되는지 마왕은 온몸에서 투기가 끓어올랐지만, 애써 참아 내고는 또 다른 과거의 잔재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 * *
이 기대감이 지루함으로 변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글렌과 카리엘이 성장하기만을 바라며 움직이는 마왕.
그렇게 마왕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카리엘은 헬의 궁전을 막기 위해 전투에 들어갔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
카리엘이 하늘을 바라보며 묻자, 초록빛 불덩이가 날아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름의 확신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더니 하늘 높이 솟아있는 탑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탑은 대부분 회색빛 힘으로 물들어져 있었지만 맨 꼭대기만큼은 여전히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완성 단계에 이른 건 정말인 것 같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가름을 돌아보았다.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끝내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늘에서 초록빛 불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로만에서 지옥의 군대를 소환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옥의 존재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름의 권능에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대로 지옥의 군대를 박살 내면서 탑을 부술 생각을 하던 카리엘.
바로 그때, 주변 지축이 흔들리면서 지옥의 망령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직 남아 있던 검은색 부분들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 희생인가?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하는 카리엘에게 답을 해 주는 가름.
- 지옥의 주술사들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탑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것만으로 부족할 텐데?
가름이 의아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탑이 완성된다 한들 여신이 바로 깨어나는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다면 지금 로만은 이그니트를 막을 전력만 까먹는 멍청한 행동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왔다.
탑 근방에 있던 재단에 서 있던 주술사 다수가 쓰러지면서 회색빛 기운이 더 솟아올랐다.
동시에 궁전에 있던 망령들 역시 탑으로 몰려들면서 탑 주위로 엄청난 형상을 만들어 냈다.
- 이것이었나?
가름은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대륙 영혼들에 대한 '안식'은 산 자들만의 염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망령들은 더 간절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설사 자신이 이번 일을 계기로 영원히 고통을 받을지라도,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 속에서 소멸되더라도 후손의 안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 ······헬.
망령들을 통해 실체화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며 과거 자신의 주인이었던 여인의 이름을 부른 가름.
정말로 저상의 여왕인 것일까?
여인의 모습을 한 거인이 실체화 할수록 가름의 권능에 사라져 가는 지옥의 군대는 점차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이내, 가름이 돌려보냈던 지옥의 군대까지 다시 불러내기 시작했다.
“가름이······.”
믿었던 가름을 뛰어넘는 지옥의 힘.
이것만 보아도 지옥의 절대적인 군주였던 헬이 깨어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결국 헬이 부활한 건가?"
카리엘의 말에 이그니트 쪽 인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면에 로만 측은 환호했다.
그토록 바라던 지옥의 여신이 실체화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막지 못한 헬의 부활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가름이 입을 열었다.
- 뭔가 이상하군.
그렇게 말한 가름이 힘을 전력으로 개방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그렇게 말한 가름이 온 힘을 다해 탑을 향해 뛰어올랐다.
바로 그 순간, 여인의 형체가 완성되면서 거대한 개의 이를 두 팔로 막아 냈다.
두 존재의 충돌.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쿠웅!
- 크르르르······
누가 봐도 더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름이었건만, 거대한 형체를 이룬 헬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얻어터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로만의 황제가 마지막까지 긴장하던 것을 멈추고 비로소 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드디어!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다!"
로만의 황제가 자신의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대계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순간, 로만 진영의 모든 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동대륙의 영혼들 역시 안식에 잠길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면에 카리엘의 표정은 썩어 들었다.
최악의 경우엔 가름까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건가?”
- 그건 아닌 것 같다.
카리엘의 말에 어느새 나타난 수르트가 말했다.
- 잘 봐.
수르트가 가름을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말하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크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얻어터지고만 있는 가름.
- 가름이 저항하고 있잖아.
“뭐? 저게?”
- 그래.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고는 있지. 비록 그의 힘 대부분이 방어에만 집중되어 물리력 행사가 전부지만 가름은 무려 헬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거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의미가······.”
- 본래라면 가름은 헬에게 절대 대들지 못해. 그의 영혼에 영원이 각인된 충성의 서약이 그녀를 배반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는 건······.”
- 저게 가짜이거나 반쪽짜리 여신이라는 거겠지. 가름도 그걸 아니까 저렇게 싸우는거다.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의문을 품었다.
“그래도 자신의 주군 아닌가? 가름은 왜 저렇게까지······.”
- 저 모습으로는 지옥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모드구드에게 인정받지도 못할 거다. 그러니 자신의 위대한 주군이 저런 꼴로 부활하게 두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영원한 안식을 주려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손에 소멸하면 위대한 여신으로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
수르트의 대답에 잠시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맞고만 있는 가름을 보던 카리엘이 결심했다는 듯, 힘을 발현했다.
그러자 거대화한 스콜과 아그니가 탑을 향해 돌진했다.
동시에 그들보다 훨씬 큰 거대한 불의 거인이 카리엘을 손으로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 결판을 보자고. 가름이 몸빵을 해 줄 테니 우리는 신나게 두들기기만 하면 돼.
“그거 좋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수르트의 진실한 힘.
반쯤 부러진 거대한 불의 검과 여기저기 부서진 불의 왕관을 쓴 거대한 거인이 흉포한 울음소리와 함께 탑으로 돌진했다.
퍽! 퍽! 퍽!
- 꺄아아아!
그러자 가름을 한참을 두들기던 여신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카리엘의 소환체들의 공격에 비명을 지르면서 힘을 발현했다.
별다른 타격이 없을 거란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리엘의 소환체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카리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별다른 저항도 못하는 가름보다 카리엘에게 힘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완전해도 신은 신이라는 걸까?
마스터조차 압도할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보이는 카리엘과 소환체들이지만, 헬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바로 그때, 가름의 거대한 아가리가 여신의 다리를 물어뜯으면서 그녀를 무너뜨렸다.
- 꺄아아아아!
- 나의 주인을 더럽히지 말거라! 더러운 영혼아!
처음으로 제대로 적중한 가름의 공격.
분명 초록빛 불길이 그를 계속해서 막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의지력만으로 그걸 뚫고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