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63.황제님 돌아오셨다!
가름의 시련을 받기 전에도 지옥의 군대를 상대로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던 카리엘.
시련을 받고 나왔으니 분명 그때보다 강력해졌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했던 것은, 카리엘이 있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 아직도 걱정되나 본데?
수르트가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불의 비를 만들어 현세의 불지옥을 재현한 카리엘이건만 타리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터급이라면 언제든 불길을 뚫고 나와서 카리엘의 목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리엘이 만든 불이 완벽하게 지옥의 군대를 소멸시키진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도 거대한 지옥의 괴물들이 불길을 넘어 카리엘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긴 하네.”
- 그러게.
불의 비가 쏟아져 만들어진 불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아 달려오는 지옥의 군대는 개미처럼 많아 보였다.
아무리 이그니트의 군대가 엘리트라 한들 저들이 당도한다면 물량에 그대로 밀려 버릴만큼 엄청난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카리엘.
“여기서라면 가능하겠네.”
사방에 지옥의 힘이 가득한 지금 이 순간만이라면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가름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몰려오는 지옥의 군대 따위는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가름, 열어 줘."
카리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상공에 거대한 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순간, 타리온이 당황하면서 황급히 카리엘의 옆에 섰다.
어느새 달려온 아켈리오 역시 반대편에 자리하면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준 카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지옥문은 저들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팔을 활짝 펼치는 순간, 상공에 만들어진 지옥문이 활짝 펴지면서 망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기를 든 무인부터 갈퀴를 든 농부까지 재각기 다른 무기를 든 망령들.
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힘은 지옥의 군대를 압도했다.
지옥을 떠돌아다니는 망자들인 만큼 일반적인 아귀 이상으로 강력한 영혼들.
게다가 카리엘의 지옥문을 통과한 망자들은 지옥과 똑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직 카리엘과 지옥에서 '계약’을 한 망자들에 한해서 이곳 세상에 넘어올 수 있는 망자들은 그 대가를 지옥의 존재들을 다시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지불할 수 있었다.
-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대단하네.
옆에 있던 수르트가 지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카리엘이 지옥에서 했던 일은 간단했다.
망자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지옥의 변질된 곳을 정화시키는 것.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딪쳤다.
카리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지옥에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힘을 모아 다시 되살아난 과거의 잔재들이 지옥에서 추방당했기 때문.
그 시점에서 가름의 시련이 갱신되었다.
[지옥을 정화하세요!]
과거의 잔재들로 오염된 지옥을 정화해 달라는 것.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는 카리엘이 그것을 거절하려 하자 지옥과 현실의 시간의 흐름마저 조정해 주면서 거절할 수 없는 대가를 내밀었다.
[보상 : 가름의 능력 일부 사용 가능(지옥문소환)]
이것을 본 순간 눈이 돌아간 카리엘이 빈집털이 하듯 중요 지역을 정화하고, 지옥의 관리자가 다시금 지옥을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망자들이었다.
안식을 되찾아 준 카리엘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보답을 하려는 망자들과 '계약'을 했다.
망자의 계약
1. 지옥문을 넘어 현실로 돌아갈 시 대가를 지불한다.
2. 타락한 지옥의 존재나, 과거의 잔재를 돌려보낼 시 대가가 지불된다.
3. 대가를 초과 지불시 일정 시간 세상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예외적으로 죽기 전에 빈 소원 일부를 이뤄 줌.
가름과 지옥의 관리자를 통해 정식으로 작성된 이 계약은 아직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 역시 인정하면서 두 세상에 완벽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카리엘이 만든 지옥문을 통과한 망자들은 강했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나온 망자들이 불법체류자들한테 질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지옥문의 수문장인 가름의 힘을 빌려 만든 지옥문은 이곳과 지옥을 연결하는 가장 안정적인 통로였다.
국가로 따지자면 망령들은 정상적인 경로로, 지옥의 군대는 불법으로 들어온 이민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국가보다 더 잔혹하게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불법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이 가진 것을 더많이 내놓고 이곳으로 넘어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망자들이나 아귀들이 가진 힘, 영혼의 일부 등이 넘어오는 과정에서 소실되어 약해졌기에 가름의 지옥문을 통과한 망자들에게 압도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보다 더 잔혹할지도.”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 ‘신’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웬만한 언덕보다도 큰 거대한 뼈다귀들.
옛 서리 거인의 뼈다귀들이 불길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과거의 잔재급은 아니지만, 신화시대를 풍미했던 거인들의 뼈들답게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들조차 이제는 위협이 되지를 못했다.
“아그니, 막아 줘."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조용히 사막을 걸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불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실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면서 뒤를 돌아본 카리엘이 타리온을 향해 물었다.
“지옥의 궁전은?"
“······완성 단계로 추정됩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입을 다물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지옥문 앞에는 서리 거인들의 뼈보다도 훨씬 큰 개 한 마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한때 그의 주인이었던 여신의 부활.
하지만 부활하는 그녀는 신화시대의 그녀가 아닐 확률이 컸다.
그렇기에 가름은 카리엘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일 터.
가름의 복잡한 마음이 카리엘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지자 미간을 찌푸린 카리엘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저곳을 뚫고 지옥의 궁전으로 향한다.”
“예!”
카리엘의 명령에 뒤따르던 이그니트의 군대 전원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비록 지옥의 군대 한정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카리엘의 모습은 어떤 이들이라도 절로 존경심이 들게 할 만큼 위대해 보였다.
지옥의 정화자를 넘어 지옥의 구원자라 불리는 카리엘이 이번엔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로만의 황제가 있을 지옥의 궁전으로 향했다.
“스콜, 뚫어!”
그렇게 명령을 내린 순간, 푸른 빛이 폭사하면서 앞을 가로막은 지옥의 군대를 뻥 뚫어 버렸다.
“허······.”
“······.”
마스터에 이른 타리온과 아켈리오조차 놀랄 정도로 압도적인 힘으로 정면을 뚫은 거대한 늑대.
놀란 그들에게 카리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지옥에서 강해진 건 나뿐만이 아니거든.”
“그럼 수르트도······.”
타리온의 물음에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카리엘은 그림자들이 가져온 마동차에 올라타 불의 길을 따라 지옥의 궁전으로 향했다.
* * *
그렇게 화려하게 복귀식을 치른 카리엘이 지옥의 궁전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자 그런 그를 막기 위해 산드리아 군대가 후퇴하면서 카리엘이 돌아왔음이 연합군에도 알려졌다.
“사······ 산드리아군이 후퇴합니다!”
“뭐? 갑자기?”
한쪽 팔로 검을 휘두르던 바투가 부하의 보고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뒤로 물러난 사막의 황금매가 산드리아의 군대를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왜······.”
바투가 갑작스러운 산드리아의 후퇴로 당혹스러워할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그니트의 황제가 돌아왔다!”
“현재 이그니트 황제가 이끄는 정예군이 로만의 군대를 대파하며 지옥의 궁전으로 향하는 중!"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카리엘의 복귀를 알리는 장교들로 인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골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간신히 전멸은 면했군.”
그렇게 중얼거린 골란의 왕 바투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합군의 주축인 마도사 아르칸은 죽었고, 기사왕 브라이튼은 중퇴에 빠져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신마저 한쪽 팔이 잘려나간 채 간신히 버티던 상황.
물론 이들이 마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칸이 자폭하며 대지의 마도사를 지옥으로 끌고 갔고, 기사왕 역시 본인을 미끼로 기사단을 동원해 지옥의 주술사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차이가 여실했기에 연합군이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그니트의 황제가 돌아온 것이다.
"천운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바투가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전쟁터를 바라보았다.
이번 전투로 연합군은 이전처럼 대군을 모을 여력을 잃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이그니트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그래도 도움은 주어야겠지.”
작게 중얼거린 바투가 살아남은 이들 중 그나마 멀쩡한 이들로 추격대를 꾸렸다.
비록 전쟁에서는 대패했지만, 조금이라도 ‘영웅’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산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바투의 결정으로 연합군 중 일부가 지옥의 궁전으로 향할 무렵, 이 소식이 이그니트에도 빠르게 당도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심.」
짧은 문장이었지만, 카리엘이 복귀했다는 소식은 가라앉은 이그니트의 사기를 끌어올릴 중요한 수단이었다.
“지금 즉시 이 소식을 전역에 알리게.”
"예! 전하."
루피엘의 명령에 황급히 밖으로 나간 내관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후······ 조금만 더 버티면······.”
하루하루가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건만, 그런 그에게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카리엘이 돌아왔으니 이 지긋지긋한 자리에서 물러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이 소식은 군부에도 들어갔고,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이그니트군의 사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기 시작했다.
단순히 돌아온 것이 아니라 복귀하자마자 지옥의 군대를 대파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돌아오셨다!”
"오오!"
루피엘과 로칸이 동시에 감동한 표정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로 어떻게든 일을 떠넘기려 했던 두 총사령관이 어깨에 지워진 엄청난 부담감을 내려놓을 생각에 환호한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에게는 부담감을 덜어 낸다는 희망을, 어떤 이에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면서 이그니트 전체에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 카리엘.
하루빨리 복귀하기를 바라는 이들의 소망과는 다르게 카리엘은 지옥의 궁전을 없애는데 집중했다.
- 어째 일부러 느리게 가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수르트의 날카로운 질문에 움찔한 카리엘이 저 멀리 보이는 지옥의 궁전을 바라보았다.
“다 왔군.”
말을 돌리는 카리엘을 보면서 수르트가 물었다.
-저걸 막으면 곧바로 돌아갈 거냐?
“글쎄······ 과거의 잔재들을 없애는 게 먼저 아닐까?”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카리엘이 이그니트의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시일이 더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