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64화 (164/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1. 황제 폐하가 없는 자들은 지금? (2)

‘안식을 되찾기 위해선 정화자가 있는 곳으로 가라!’

어느새 지옥에서 당연한 말이 되어 버린 말.

죽음 이후 안정을 원하는 이들은 정화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타락해서 영원히 고통받기 전에 진정한 안식을 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을 노리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과거의 잔재들은 어떻게든 망령들을 타락시켜 힘을 키우려 했기에 숨어 있던 것을 멈추고 정화자가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새 지옥은 타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망령들과 그러지 못한 자들의 싸움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런 둘의 싸움을 중재하며 어떻게든 카리엘이 정화하는 영역을 넓히게끔 도와주는 지옥의 관리자.

그렇다고 카리엘만 돕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주인인 헬이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존재였으므로 그저 지옥이 망가지지 않을 최소한의 영역을 확보하게끔 도울 뿐이었다.

정화자(카리엘)+망령 군단 → 지옥의 관리자 (모드구드) ← 타락한 과거의 잔재

아직 모드구드에 비하면 힘이 약한 과거의 잔재들.

그렇기에 이 시기를 적절히 이용하여 컨트롤하는 모드구드.

카리엘 역시 쭉정이 수준의 잔재들만 정화해 왔기에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평화 속에서 지옥은 자꾸만 카리엘로 하여금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지옥을…… 지옥을 구원해 주세요.

어린 나이에 전장에 끌려갔던 한 소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카리엘에게 부탁한다.

어떤 여인은 자신과 함께 죽은 갓난아이를 안고서 부탁했다.

부디 자신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달라고…….

-매정하게 버릴 거야?

수르트도 은근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죽음은 없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망령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들의 말처럼 지옥의 왕이 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상은?

마왕과 로만의 황제로 인해 혼란에 빠질 이그니트 제국은?

“반드시 돌아간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망령들의 외침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초록빛 불이 말없이 사라졌다.

* * *

“폐하께선 아직인가?”

“예.”

아켈리오의 물음에 타리온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후…… 미치겠군.”

이미 오래전에 마스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차라리 혼자서라도 앞서 나가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만 있는 게 맞는 것인가?”

아켈리오의 말에도 타리온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합군이 군대를 복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로만의 황제는 자신의 할 일에 여념이 없었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리엘이 타고 있다고 알린 비공선은 제국의 전선 가장 안쪽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하지만 일단은…… 폐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수행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해야겠지.”

너무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며칠 전부터 검은 달이 이그니트 진형에서 기웃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게다가 바로 어제는 로만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츠러들었던 것도 잠시, 이그니트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자 주변으로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눈 가리기로는 한계가 있군.”

“예, 이제 슬슬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는 뜻이죠.”

아켈리오의 말에 타리온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카리엘이 떠났을 때처럼 수색을 위한 비공선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이젠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이그니트군을 보며 뭔가 이상이 있음을 연합군조차 느끼고 있으니 당연했다.

현재 로만이 의심하는 건 두 가지.

‘황제가 사라졌다?’

‘황제가 위독하다?’

이 두 가지 중에 위독하다는 쪽으로 의심하게 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이그니트군을 이상하게 열린 연합군 쪽 인사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기에, 슬슬 정보를 풀 때가 된 것이다.

“연합군의 주요 인사들에게 조금씩 풀겠습니다.”

“호위를 더 강화해야겠군.”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오직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이 비어 있는 의자를 지키기 위해 황궁 기사들은 전보다 더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이그니트 황제, 사실은 위독하다?」

시작은 작은 신문사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그니트 내부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인류 연맹 소속의 국가들에서는 이그니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종종 나왔다.

하지만 인류 연맹의 중심인 이그니트 황제에 대한 나쁜 소리를 할 수는 없기에 에둘러서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간 큰 신문사가 직접 쉬쉬하던 소문을 조간으로 내 버린 것이다.

“간도 크지.”

“그러게.”

사람들은 이 간 큰 신문사가 곧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신문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곧이어 연쇄적으로 충격적인 소식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그니트의 최전선에 많은 사제와 치료사들이 파견된 흔적이……」

「몇몇 병사들이 거대한 지옥문을 닫을 당시 이그니트 황제가 비틀거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밝혀…….」

「최근 들어 이그니트 쪽 경계가 더 삼엄해졌다!」

연이어서 나오는 소식들.

걱정하는 연합군과는 다르게 이그니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간혹가다 카리엘이 폐관수련을 해 왔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로만의 진형에 세워진 거대한 탑」

「정말 지옥의 궁전이 완성되나?」

「완성되기 전에 공격해야 하는 연합군.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이그니트 군대.」

로만과 산드리아가 그토록 원하는 여신의 궁전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지부동인 이그니트의 군대.

분명 이건 이상했다.

카리엘의 성정이라면 중요한 시기라도, 여신의 궁전이 완성되기 전에 승부를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기는커녕, 서대륙에서 고위 사제들이 움직인 정황이 발견되어 버렸다.

“정말 폐하의 몸에 무슨 문제라도…….”

“예끼! 부정 타네!”

“하지만 이상하잖아.”

굳건히 믿고 있던 이그니트 국민들까지 흔들리는 상황.

초대 황제의 환생이라 믿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카리엘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일 수도 있기에 이그니트 국민들의 눈에 불안감이 번져 나갔다.

자신들의 희망이 이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 쪽 인사 몇 명이 과하게 술을 마시고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그니트 황제가 위독하다니……. 그럼 우리끼리 저것들을 막아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후…… 이번엔 정말 죽을 자리가 되려나?”

한탄하는 연합군 측 지휘관들.

결국 이들의 말 실수로 소문이 일파만파 커져 나갔고, ‘이그니트 황제 위독설’이란 제목의 신문은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후…… 결국 소문을 퍼뜨리는 데는 성공했군.”

“예.”

아킬레오의 말에 타리온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카리엘이 더 늦게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소문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후방으로 움직이긴 해야겠지.’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가름이 잠들어 있을 사막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로만이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나?”

“예, 아직까지는요.”

그렇게 답한 타리온이지만 그 역시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 가지였다.

눈치 빠른 검은 달이나, 영리한 로만의 황제가 언제 눈치챌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카리엘이 명한 것을 충실히 이행해 나갔다.

하지만 명색이 동대륙을 주름잡던 로만에서 이런 급조된 계책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줄 리 없었다.

“믿질 않는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그니트에 당한 게 많아서 그런 것일까?

로만은 카리엘의 건강 위독설을 의심하면서 주변에 더 많은 순찰조를 보내면서 수색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움직이는 이그니트의 비공선들을 지근거리에서 감시하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가 고심했다.

카리엘이 명한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로만은 계속해서 의심하며 검은 달을 위험 지역까지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로만이 검은 달을 더 밀어 넣는다면…….”

“여기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타리온이 확신하듯 말하자 아켈리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정보란 것이 꼭 목적지까지 당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저들이 더 밀고 들어온다면 살짝 뒤로 물러나세.”

“음…….”

아켈리오의 말에 타리온이 고민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결정은 옳은 결정이 되었다.

무슨 확신인지, 로만의 정예군대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지옥의 군대가 아니었기에 붉은 유령의 활약도 제한적이었다.

그렇기에 타리온과 아켈리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혹시라도 저들이 이곳에 접근한다면 카리엘이 없는 것이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퇴한 이그니트의 군대는 최전선에서 물러나 다시 진지를 꾸렸다.

분명 당연한 반응이었고, 누구나 납득 가능한 결정이었다.

카리엘의 성정상 위험을 감수하고 정예 병력을 움직이려 했고, 그건 이미 대륙에서도 유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의심을 했을까?”

아켈리오의 말에 타리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 역시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연합군부터 움직이시죠.”

“후…… 내가 직접 다녀오지. 자넨 먼저 출발하게.”

아켈리오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였다.

「로만의 군대가 폐하가 사라진 근방까지 도달했음.

검은 달로 추정되는 요원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

그림자로부터의 들어온 보고에 타리온과 아켈리오는 설마 했었다.

하지만 점차 늘어만 가는 검은 달의 요원들과 어느새 산드리아 측 군대 역시 근방에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걸렸다!’

그렇게 생각한 타리온과 아켈리오는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군을 움직인 것이다.

마침 연합군에서도 완편된 군대가 상당했기에, 이그니트의 지원 요청에 응하며 곧바로 군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걸 본 로만의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로 봐주도록 하지.”

헬의 종이자 지옥의 수문장인 가름.

그가 거부하기에 이그니트의 황제를 직접 잡는 것은 어렵다.

카리엘이 지옥에 간 이후, 그의 행방을 알고 있었던 로만의 황제가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련이 끝난다면 어떨까?

그때라면 이그니트의 황제를 사로잡을 각을 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보호되는 곳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 이그니트 황제를 사로잡을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가름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사막 지역 근방에 간이 지옥문을 수십 개나 만들어 뒀다.

황제가 나오는 순간, 엄청난 숫자의 지옥의 군대가 그를 둘러쌀 것이다.

지옥의 여신을 모실 궁전은 완성 단계이니, 그녀를 부를 제물만 남은 상황.

로만의 황제는 그 제물로 이그니트 황제를 선택했다.

“어서 돌아오시게.”

로만의 황제가 자신의 지팡이에 달린 구슬을 바라보았다.

제사장만이 사용가능한 이 지팡이는 아주 잠깐이나마 지옥을 둘러볼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는 붉은 화염으로 넘길 거리며 타락한 지옥을 정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망령들을 불러 모으는 화염을 바라보던 로만의 황제가 높이 쌓아올린 탑을 바라보았다.

“대계의 마지막 단계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로만의 황제가 부디 동대륙의 영혼들에게 안식이 깃들기를 다시 한번 소망했다.

* * *

동대륙의 사막에서 주도권이 걸린 대전쟁이 일어날 준비를 하는 동안, 동대륙 서부 역시 대전쟁의 조짐이 일어났다.

쿠웅!

북쪽 설원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

동시에 까마귀로부터 하나의 소식이 거인의 요새에 전달되었다.

「검은 빛기둥이 생성됨. 마왕 강림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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