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1. 황제 폐하가 없는 자들은 지금?
현시점에서 이그니트의 구심점은 누구일까?
누구한테 묻든 카리엘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심점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형님이 결국 가셨단 말인가?”
황태자로 책봉된 루피엘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그림자들의 보고에 의해 이그니트의 최상층부만 아는 진실.
“후…… 혹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
“지금으로썬 믿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습니다.”
“동대륙에서 넘어온 작계를 보자면 형님이 아프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로 인한 혼란은 어떻게 추스려야겠소?”
루피엘의 물음에 재상이 가장 무난한 답을 말해 주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대신들이 첨언하면서 기초적인 방안들이 만들어졌다.
오늘도 굵직한 사안들이 연이어 들어오면서 힘든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지친 표정으로 각자의 부처로 돌아갔다.
“남아 줘서 고맙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루피엘이 재상을 향해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윈스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카리엘이 떠난 후,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밀명의 밑바탕만 만들고 그대로 은퇴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도저히 루터에게 맡길 수 없을 만큼 어렵게 변해 갔다.
“재상, 남아 주시오. 지금 상황에서 재상이 빠지면 서대륙마저 혼란에 잠기게 될 거요.”
루피엘의 간절한 부탁.
하지만 처음엔 거절하려 했다. 이제는 걸어 다니는 것조차 뼈마디가 쑤셔 힘들 정도인데, 매번 황궁으로 출퇴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재상의 사정을 알기에 루피엘은 곧바로 재상저를 증축해서 윈스턴이 지낼 공간을 만들었다.
윈스턴의 몸이 좋지 않음을 알기에 카리엘처럼 온갖 보약들을 선물해서 각별히 관리까지 해 주는 건 덤이었다.
그러자 윈스턴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번엔 카리엘의 핑계를 댔다.
“그러시오. 나한테 보고할 필요도 없소. 단지 황궁에만 남아 주시오.”
단호한 루피엘의 말.
재상이 루피엘을 휘두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윈스턴을 기어코 황궁에 남기는 루피엘.
그 밖에도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슬슬 재상직에 물러날 각을 잡았던 윈스턴이었지만, 그때마다 루피엘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윈스턴의 은퇴를 저지했다.
이런 루피엘의 노력에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남게 되어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후…… 어린 폐하신가?”
밖으로 나온 윈스턴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분명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만큼은 매번 자신이 말려들어 간다.
처음 한두 번이야, 우연이라 친다지만 매번 이런다는 것은 루피엘이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카리엘처럼 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변수들을 제거해 나가는 괴물 같은 정치력은 아니지만, 최대한 양보하면서 중요한 실속들만큼은 챙겨 가는 루피엘 역시 만만하지 않은 존재였다.
“역시 폐하신가?”
어째서 세리엘이 아닌 루피엘을 황태자로 임명하고 떠났는지 지금에서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군사적 지식이 뛰어나고, 패황의 자질이 있는 세리엘이 좀 더 황위에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루피엘을 황태자에 올리고 떠났다.
‘철저한 계산하에 절대 물러나지 않아야 할 선을 그어 둔 후 거래에 임한다.’
루피엘의 성정은 마법사답게 계산적이며 철저했다.
그런 그가 ‘양보’라는 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가 그어 둔 선을 더 철저하게 지킬 방법을 찾아냈다.
아직은 부족해서 양보하는 것이 많았지만 연륜이 쌓인다면 그가 그어 놓은 선은 점점 전진할 터.
그렇기에 아직 미숙한 지금이 은퇴 각을 볼 절호의 기회였지만…….
“은퇴할 수 있으려나…….”
카리엘의 허락을 받았으니 언제든 은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스스로 물러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 * *
“후…… 힘드네.”
오늘도 겨우 방어에 성공한 루피엘이 지친 표정을 지으면서 황좌에 축 늘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느새 물을 가져온 시종장을 보면서 루피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형님께서 왜 이 자리를 그토록 싫어하셨는지 이제야 좀 알겠군.”
루피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자 늙은 시종장이 조용히 보고서를 가져와 올렸다.
재상 윈스턴이 카리엘의 밀명을 받아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루피엘 역시 비밀리에 준비하는 것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한 움직임.
「최종 방어선 구축 - 서대륙 요새화 작업」
아직 다른 이들에겐 완전히 밝히지 못한 비밀.
하지만 이미 이그니트 최상부는 이 요새화 작업을 위한 밑작업에 들어갔다.
거인의 협곡 전체를 요새화하는 작업부터 위의 혹한의 협곡 역시 똑같은 작업에 들어갔다.
거기다 거인의 산맥 곳곳에 요새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즉, 여차하면 동대륙 전체를 버릴 각오를 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현재 인류 연합과 함께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이 비밀이 흘러나가면 어떻게 될까?
단숨에 연합군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기에 철저하게 비밀유지를 해야만 했다.
“점점 눈치채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군.”
루피엘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대로 잘하고 있었지만, 점점 더 비밀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미 몇몇 이들은 거인의 요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철벽의 성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지 의문을 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정보부 요원을 더 투입해서라도 틀어막아.”
“예, 전하.”
루피엘의 명령에 조용히 나가는 시종장.
“후…… 형님이 돌아오시면 바로 내려와야겠어.”
고작 황제를 대리하는 자리임에도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루피엘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현재의 자신은 역대 황제들을 전부 따져 봤을 때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전체적으로 따져 봤을 때였다.
바로 옆에 자신의 형제이자, 역대 최고를 다투는 황제가 있는데 어찌 비교되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만 삐끗하면 카리엘과 비교당하면서 ‘폭군!’, ‘암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럴진대 만약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카리엘이 은근슬쩍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하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루피엘이 눈을 빛내더니 조용히 서랍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신 역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할 때가 된 듯싶었다.
「사직서」
황태자로 임명된 후 한 달 만에 만들었던 사직서.
하지만 험지에서 고생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회의감을 갖고 애써 미뤄 두었던 생각이었으나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난 황제랑 안 맞아.’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 루피엘이 자신의 형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다.
의외로 준비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형님이자 황제인 카리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여론을 만들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면 되었기에.
오히려 카리엘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이그니트 역대 황제 중 첫손에 꼽힐 황제가 있는 이상 황태자야 사실 누가 되든 큰 상관이 없을 테니까.
“형님, 빨리 돌아오십시오.”
* * *
카리엘이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이 지긋지긋한 황좌를 지켜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루피엘이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세리엘 역시 자신의 자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이그니트 최종 방어선 계획안」
세리엘이 만든 최종 방어선의 초안.
카리엘의 밀명으로 만든 이 초안의 핵심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서대륙에 남은 마스터 아이론의 살바토르와 루미너스의 샤르도나를 중심으로 군을 재편해야 한다.
현재 제국에 마스터가 될 후보들이 몇 있었고, 루피엘과 세리엘 역시 그 후보들 중 하나였다.
문제는 다른 이들처럼 마냥 성장을 위해서만 시간을 소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동대륙의 원정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면 바로 이곳 철벽에서 이그니트의 모든 전력을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인원들을 이끌 인물이 세리엘이었다.
그걸 아는지 마족들을 추적하는 데 집중하던 이그니트군 동대륙 총사령관 로칸이 자꾸만 자신의 일을 은근슬쩍 세리엘에 던져 준다는 점이다.
“왜 그러는지는 아는데…… 미치겠네.”
섣부르게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 로칸 바르사유가 주는 일들은 전부 그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일감들이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그를 대신해 이그니트의 전군을 이끌 이가 세리엘이었기에 미리부터 키워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 이상으로 지휘관으로서 자질 역시 갖추고 있었으니 로칸 입장에선 더 밀어줄 수밖에 없었고, 지금에 와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권한을 받게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군부에서는 최근 이런 소문이 은근히 돌고 있었다.
“황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상 세리엘 저하께 군부의 모든 힘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다.”
“내정은 루피엘 전하가, 군부는 세리엘 저하가 맡는 것으로 양립하게 되는 건가?”
이미 황태자가 된 루피엘조차 위협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게 된 세리엘의 권력.
예전이었다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 아무래도 형님이 오시면 사퇴해야겠어.”
품속에 넣고 있던 사직서를 꺼낸 세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이 자리에 다시 오를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면 모를까, 그 이전에는 이런 부담스러운 직책을 갖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형님, 어서 돌아오십시오.”
그렇게 중얼거린 세리엘이 지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판단을 내리는 순간, 사라질 수많은 병력.
그렇기에 더 책임감이 막중한 이 자리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 앉기엔 큰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든 형님이 오실 때까지만 버텨 보자.”
그렇게 다짐한 세리엘이 카리엘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도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가면서 보고서를 검토했다.
* * *
그렇게 현 이그니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루피엘과 세리엘 모두 부담감에 짓눌려 괴로워하고 있을 무렵, 지옥에 들어간 카리엘은 다른 의미로 고통 받고 있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저승의 왕이 되어 타락한 존재들을 쫓아내 주십시오!
수많은 망령들이 카리엘의 앞에 모여들어 왕이 되어 달라 요청했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가름의 시련 때문에 지옥 곳곳에 자리 잡은 타락한 과거의 잔재들을 정화했기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요동치던 지옥의 기운도, 타락했던 대지도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오니, 안정을 원하는 망령들이 지옥 전역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름이 저승의 왕이 되는 건 어떠냐고 은근히 물어봅니다.]
[저승의 왕이 되기! → 저승의 왕이 되기로 결정하는 순간, 모든 시련이 끝나고 가름을 수하로 둘 수 있습니다.]
“꺼져.”
가름의 제안에 단칼에 거절한 카리엘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망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뒤에서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수르트.
-넌 어째 지옥에 와서도 이 모양이냐?
수르트의 물음에 카리엘은 대답대신 그를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