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62화 (162/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0. 가름의 시험 (3)

가름의 마지막 영혼 조각을 흡수하면서 보았던 환영.

지옥의 풍경은 그때 보았던 것처럼 개판이었다.

회색빛 하늘과 검붉은 대지.

그리고 사방에 널려 있는 뒤틀린 망령들.

“원래 이런 곳인가?”

-그럴 리가.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본래의 지옥은 헬이 있을 시절엔 굉장히 안정된 곳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이후에도 헬을 대신해 관리하는 여신에 의해 그럭저럭 관리는 되었다.

본래 지옥은 곧바로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영혼들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안식을 얻기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지옥은 전체가 생전에 큰 죄를 지은 이들은 자신들의 악업을 씻을 때까지 죄를 받는 나스트론드처럼 되어 버렸다.

-고대 신들의 영혼 조각들이 생전의 힘을 찾기 위해 망자들을 악령으로 만들고 있어.

악령들이 발산하는 힘을 흡수해 부정적인 힘으로나마 격을 쌓으려는 신들.

그리고 그 부정적인 파장에 의해 다른 신의 파편들도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마왕의 의도를 알 수밖에 없었다.

-마왕은 아마도…… 신들의 시대를 다시 열려는 것 같은데?

“……신의 시대라.”

카리엘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족들이 마신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강함에서의 인정이다.

기본적으로 마족들이란 강함을 추구하며 스스로 강해져 더 강한 이를 꺾으려는 본성이 있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더 강한 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나, 꺾을 수만 있다면 막혀 있던 벽을 뚫을 수 있을 테니까.

이미 마왕의 경지는 위대한 전설인 시구르드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는 나가지 못한 채 헤맬 뿐.

그런 상황에서 불완전하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앞에 있다면 다음 단계를 그려 볼 수 있게 된다.

비록 신을 꺾지 못하더라도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단계를 꿈꿔 볼 수 있게 되고, 그 꿈을 향해 다시금 전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신의 경지를 넘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시대의 재림을 바라는 건가?”

과거 신화시대는 신과 거인들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인간들과 마족들이 신의 반열에 올라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만들려는 것이다.

지옥의 불완전한 신들은 신화시대를 여는 데 사용될 제물에 불과할 터.

어찌 보면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마족들에게 딱 맞는 세상이 될 것이다. 마왕의 모든 의도를 확실히 파악했으나 문제는 카리엘이다.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카리엘의 물음에 옆에 둥둥 떠 있는 수르트가 말없이 지옥을 바라보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재 카리엘의 실력으로는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지옥의 기운이 비해 상성상 우위에 있는 불의 힘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지옥을 버티기 힘들었다.

-인간이다!

-살아 있는 인간이다!

어느새 생명력을 품은 인간을 보고 개 떼처럼 달려드는 아귀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수르트가 재빨리 말했다.

-최대한 힘을 아껴. 그리고 생각해.

“……뭘?”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가름의 의도를 생각해.

분명 처음 카리엘을 보낼 때 가름이 보인 모습은 장난기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가름도 지금의 지옥을 좋아하진 않아.

헬의 충견이자 지옥의 수문장인 가름.

그런 그가 과연 지금의 지옥을 좋아할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복잡했던 카리엘의 머리가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시련이라면 무조건 죽게끔 놔두지는 않겠지.”

초대 황제 역시 가름의 시련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초대 황제처럼 재능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가름의 시련 : ??? 흔적을 파괴하세요.]

갑자기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보면서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때, 코앞까지 다가온 망령들을 향해 수르트가 힘을 발현했다. 동시에 스콜과 아그니 역시 불덩이를 날리면서 참전했다.

본격적으로 망령들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동안에도 고민하던 카리엘이 개 떼처럼 몰려오는 악령들을 하나씩 불태워 정화했다.

[??? 흔적이 약화됩니다.]

[??? 흔적이 약화됩니다.]

[??? 흔적이 약화됩니다.]

...악령을 죽이면 나타나는 반투명한 창.

동시에 정화되면서 평범한 망령에서 잿빛 가루가 떨어졌다. 특이한 점은 그것들이 전부 날아올라 어디론가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곳이겠지?”

-그래.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름이 자신을 지옥에 보낸 이유.

그것이 저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둘은 본격적으로 힘을 발현하며 몰려드는 악령 떼를 뚫고 지나갔다.

거대화한 수르트가 뚫어 낸 길을 통해, 카리엘이 스콜과 아그니의 보호를 받으면서 잿빛 가루가 몰려드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상성 차이로 불의 바다를 만들자 일시적으로 몰려드는 악령 떼가 실시간으로 정화되어 가자 불의 길이 만들어지면서 본래라면 악령들로 인해 발생된 부정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그때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꾸르르륵!

“……저건가?”

카리엘의 중얼거림과 함께 지옥의 대지를 흔들며 나타나는 거대한 존재.

한때 위대한 거인 중 하나이자 전사였던 이가 지축을 흔들며 나타났다.

이제는 기록조차 남지 않은, 이름 없는 거인 전사가 생전의 힘의 일부를 되찾아 포효했다.

-……거인 전사인가?

수르트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름 모를 거인전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악령들의 부정한 기운을 모으는 안쓰러운 거인.

본래라면 안식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어야 할 이 불쌍한 거인에게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것 말고는 어떠한 의지도 남지 않았다.

수르트 역시 한때는 거인이었기에 강제로 부활한 불쌍한 거인을 보며 안쓰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생전엔 자신과 싸웠던 거인일 수도 있다.

그의 죽음에 자신이 관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생전의 일이다. 죽음마저 방해받으며 이런 식으로 부활하는 건 아니었다.

-저 녀석이 다시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

수르트의 부탁에 카리엘이 말없이 거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으로도 정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갖 부정한 것들이 뒤섞인 괴물 그 자체가 된 거인.

그런 이를 향해 카리엘이 전력으로 화기를 끌어 올렸다.

말없이 힘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 답을 받은 수르트가 두 소환체와 함께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리엘은 다른 악령들이 오지 못하도록 불의 벽을 쳤다.

-끄아아아아!

카리엘의 불길에 타오르는 신체를 보며 울부짖는 거인.

실시간으로 잿빛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거인의 육체는 검은 액체처럼 손상된 육체를 쉼 없이 복구시켰다.

그리고 그곳은 다시금 수르트의 주먹에 뭉개지고 카리엘의 불길에 타올랐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수르트와 두 소환체를 향해 달려드는 거인.

“헉……헉…….”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카리엘이었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끝없이 고통을 받고 있는 거인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는 그나마 나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싸웠을까?

분명 벌써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흘렀건만 카리엘은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잠이 쏟아지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는 이상한 현상과 함께 모든 힘을 쥐어짜, 검은 액체 괴물이 된 거인을 정화했다.

거대한 화염의 폭풍을 만들어 쓰러진 거인의 육체 전체를 정화한 카리엘이 지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파사삭!

거인의 흔적이었을지 모를 어떤 물건이 재가 되어 사라지자 순식간이 지옥의 일부분이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가름의 시련 일부를 통과하셨습니다.]

[????의 흔적을 파괴하세요.]

[?????의 흔적을 파괴하세요.]

..이름 모를 거인을 완전히 정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름의 시련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옥에 혼란을 일으킨 주범들을 처리해 안정을 찾아 주는 것.

문제는 이름 모를 거인도 이렇게 힘들게 정화시켰는데, 신이라 추앙받던 이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가름도 그것까진 바라지 않을 거다.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화살표들을 바라보았다.

잿빛 가루들이 뭉쳐 만들어진 화살표들.

그 화살표들이 향한 방향에는 이름 모를 거인처럼 악령들이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너한테 신을 상대하길 바라지는 않을 거다.

수르트가 확신하듯 말했다.

저 멀리 잿빛 하늘을 꿰뚫고 솟아오른 화산에서 느껴지는 기운.

그것은 이름 모를 거인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가름의 시련이 가리키는 화살표들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과거의 잔재들.

-네게 정말 지옥을 막을 자격이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은 것 같다.

한낱 인간이 지옥의 혼란을 진정시켜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카리엘이 세상으로 빠져나온 지옥의 힘을 막아 낼 수 있는지, 자신이 카리엘을 믿고 걸어 봐도 되는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지옥을 막을 최소한의 힘과 의지를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여 줘야지.”

어차피 가름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그렇다면 악착같이 버텨 보기라도 해야 한다.

“후…… 진짜 이것만 끝나면 쉴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카리엘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 몰려드는 악령들을 향해 불의 파도를 만들어 내면서 전진하는 카리엘.

그런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사실 카리엘은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지옥에 들어오면서 카리엘의 힘이 부쩍 강해졌다.

동시에 자신과 두 소환체 역시 빠르게 강해졌다.

-이곳에 남아 있었나?

과거 세상을 멸망시켰던 자신의 힘의 일부가 지옥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지옥에 오자마자 그것이 느껴졌다.

아주 먼 거리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스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계까지 마모되었던 스콜 역시 지옥에 남은 영혼 조각의 영향을 받았는지 빠르게 영성을 되찾고 있었다.

아그니 역시 위대한 불의 흔적에 영향을 받으며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시련을 끝내고 돌아가면 제법 쓸 만해지겠네.

자신을 비롯해 소환체 전부가 강해지는 것을 넘어 카리엘 본인 역시 한층 더 성장한다면 수르트가 인정할 최소한의 조건은 만족할 터.

그렇다면 가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멍하니 뭐 해!”

카리엘의 부름에 미소를 짓고 있던 수르트가 거대한 몸뚱어리를 움직였다.

악령이 덕지덕지 붙은 거대한 망령수의 뿌리들을 모조리 뜯어내면서 카리엘을 위협하는 공격을 차단한 수르트.

이름 모를 거인을 처리했을 때처럼 모든 힘을 쏟아 낸 끝에 또 하나의 과거의 잔재들을 정화해 냈고, 곧바로 다음 지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화살표를 따라 하나둘 정화시키다 보니 어느새 지옥의 일부분이 예전의 깨끗한 풍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옥 내에서 한 가지 소문이 돌았다.

“지옥 한구석에 ‘정화자’가 나타났다!”

지옥의 모든 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과거의 안정을 찾아 주는 정화자의 존재가 조금씩 지옥 내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을 무렵, 대륙은 반대로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로만과 산드리아의 대군이 마침내 자신들의 여신을 모실 거대한 신전을 거의 완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그니트는 도울 수가 없었다.

북쪽 설원으로 도망친 마족들이 기어코 다시금 마왕을 강림시킬 준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