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9. 지옥문을 막아라! (2)
대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앞으로 그럴 예정이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전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원죄’로 인해 무한히 고통받아야 할 나날에 비하면 현생의 고통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승의 낙원」
로만의 황제가 어렸을 적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발견한, 헬의 궁전에 관한 내용이 담긴 고서였다.
어느 날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꿈을 꿨다.
처음엔 그저 악몽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꿈은 거듭되었고, 그때마다 그사이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밀리에 어린 자신에게 산드리아의 부족장 중 하나가 찾아왔다.
“동대륙의 사람들 대다수는 원죄를 품고 있소.”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산드리아의 부족들은 일정 시간마다 찾아와 자신을 알현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꿈은 더 선명해져만 갔다.
끔찍한 지옥의 풍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신기한 건 그들 중에 서대륙 출신의 영혼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처음엔 이런 의문을 갖고 고서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그니트 초대 황제의 활약으로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난 서대륙의 사람들.
반면에 자신들은 아니었다.
어찌하려 로만이 그토록 서대륙을 괴롭혔던 것일까.
어렸을 적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이후 비밀을 엿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역대 황제들은 서대륙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을 참지 못하였다.」
역대 황제들의 사적인 비밀이 기록된 고서. 그곳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서대륙 사람들에게 대한 부러움.
그것은 황제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죽음 이후 자유를 이룩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서대륙에 푼 것이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창피했다.
‘나의 제국이 고작 이런 곳이었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정점에 있는 황제들의 추악한 진실.
더 끔찍한 것은 어느새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그러한 마음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만과 동대륙의 국가들의 고통은 오로지 그들의 과오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지옥에 굴종했고, 그로 인해 아직도 고통받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서대륙의 사람들과 달리 지옥에 굴복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지옥에 대한 정보는 점점 사라져 갔고, 끝내는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헛소문으로 취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옥은 신화시대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대륙의 고고학자들의 주된 의견이 이러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모든 동대륙의 사람들이 고통받는 건 아니었다.
서대륙 출신들과 연을 맺을 경우 고통에서 해방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이미 로만과 서대륙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동대륙의 사람들의 영혼이 나스트론드라 불리는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는 저주를 끊어 내기 위해선 과거 자비로웠던 죽음의 여신을 다시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산드리아의 부족장들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옥의 제사장.
신화시대 이후 단 한 명만이 될 수 있었던 지옥의 제사장.
로만의 황제에겐 바로 지옥의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재능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로만의 황제는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곧…… 완성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렀기에 더는 뒤로 미룰 수도 없었다.
비록 이그니트와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목숨들이 죽었지만, 그들 역시 영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만족하리라.
“낙원이여…….”
낙원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현생의 고통.
하지만 죽음 이후 오랜 세월 겪게 될 고통 대신 평안을 얻기 위해 인내하며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로만의 황제이자 지옥의 제사장인 그는 여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낙원이 완성되기를…….’
간절한 바람과 함께 자신이 이때까지 모은 여신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헬의 장신구 중 하나로 보이는 유물을 찾자마자 곧바로 다음 유적지가 어디에 있을지가 보였다.
카리엘이 가름의 조각을 통해 다음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로만의 황제 역시 그리할 수 있었다.
고대 지옥의 제사장이었던 조상을 막아섰던 이그니트의 초대 황제처럼 이번에도 역시 카리엘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신.
“이번엔 반드시…….”
반드시 원죄의 고리를 끊어 내리라 다짐하며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헬의 유물을 통해 개방한 지옥문들 때문에 이그니트 제국의 황제는 자신보다 한발 늦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지옥문을 막느라 정신없는 사이, 몇 개의 유물을 더 찾아내 낙원을 만들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 * *
로만의 황제의 생각대로 카리엘은 지옥문에서 넘어오는 아귀와 불타는 망령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의 파도를 만들고, 붉은 유령과 불의 사제들이 수많은 아귀들을 소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군대는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지옥의 군대는 끝이 없기에 계속해서 막을 수만은 없는 노릇.
그렇기에 카리엘은 위험을 감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빠지라고 해.”
카리엘의 명령에 지옥의 군대를 가로막던 모든 병력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거대한 몸체를 유지하던 수르트와 소환체들이 작은 불덩이로 변했다.
“쓸어버려라.”
해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앞으로 쏟아 내는 순간, 불의 장벽을 만들던 불덩이들이 크기를 키우면서 끝도 없이 몰려오는 지옥의 군대를 덮쳐 나갔다.
파사삭…….
닿는 순간, 재가 되어 자신들이 이 땅에 있었음을 알리는 지옥의 괴물들.
아귀, 불타는 병사, 망령, 투귀할 것 없이 전부 한 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흩날렸다.
단숨에 길이 뚫리는 순간, 카리엘이 지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뚫어라.”
“예!”
카리엘의 명령에 붉은 유령들이 앞장서서 앞을 뚫기 시작했다.
뒤이어 카리엘이 황궁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옥문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바닥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기사들을 뒤로 물린 후, 수르트에게 바닥을 내리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바닥에 기묘한 문양과 함께 비밀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륵!
가름의 초록 불이 빛을 발하는 순간, 스르륵 열리는 비밀의 문.
[가름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을 찾으셨습니다.]
반투명한 창과 함께 초록 불에 감싸여 떠 있는 보석이 보였다.
카리엘이 첫 번째 유적지에서처럼 가름의 영혼 조각을 흡수하는 동안, 불의 사제들은 지옥문 주변에 봉인진을 만들었다.
첫 번째 유적지에서는 비록 카리엘이 지옥문을 직접 닫았기에 활약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동안 놀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지옥문을 통해 온갖 실험을 한 결과, 만든 봉인진을 통해 지옥에서 나오는 괴물들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리고 동시에 붉은 유령들을 통해 지옥의 군대를 처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조각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영혼 조각을 흡수한 카리엘이 직접 지옥문을 닫았다.
「또 닫힌 지옥문. 이그니트의 황제가 인류의 희망인가?」
지옥문을 닫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또한 지옥의 군대에 압도적인 힘을 보일 수 있는 자.
그것이 이그니트의 황제라는 소문은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갔다.
“쓸어버려라, 수르트.”
이제는 당당히 카리엘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불의 거인.
그가 등장한다면 지옥의 군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소리가 돌 만큼 승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신화시대에는 불의 마신, 무스펠의 악마라고 불렸으며 심지어 신화시대 이후에는 멸망의 거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다.
그런데 이젠 승리의 상징이 된 것이다.
“기분 좋냐?”
-글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애써 미소를 감추고 있는 수르트를 보면서 피식 웃은 카리엘.
가름의 첫 번째 영혼 조각에게 인정받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 두 번째 조각도, 세 번째 조각도 연이어서 인정받으면서 멈춰 있던 카리엘의 성장세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럴수록 카리엘은 가장 위험한 지역, 가장 급박한 곳만 찾아다녔다.
「이그니트의 황제가 찾아간 전장은 무조건 승리한다. 그러니 버텨라. 그러면 황제가 찾아와 그대들에게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다.」
연합군의 상황이 좋지 않아 과장되게 홍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실제로 카리엘이 있는 모든 전장은 인류의 승리로 끝났다는 점이다.
그렇게 지옥문을 닫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인류에게서 카리엘의 가치는 수직으로 상승했고, 지금에 와서는 소환수를 부리는 카리엘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가 되었다.
카리엘을 보호하기 위해 양 옆에 선 두 마스터조차 카리엘이 보인 위용에 비하면 빛을 발할 정도로 지옥의 군대에 한정해서는 마스터 이상의 힘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동대륙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다 주었다.
‘대륙의 어떤 지도자도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진 못할 것이다!’
동대륙의 어떤 위정자도 칭찬하는 법이 없던 유명한 학자가 카리엘을 찬양하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서대륙의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안겨다 주었다.
“우리의 황제 폐하시다!”
“서대륙 유일의 황제!”
“서대륙의 영웅!”
인류의 영웅이란 말보다 서대륙에 한정해서 말하는 그들.
그리고 이런 이들보다 더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본래 이그니트 제국 출신의 국민들이다.
끔찍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 준 이.
그를 향한 무한한 찬사를 보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이들이 카리엘의 이름을 연호하며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그런 그들을, 카리엘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쿠웅!
“이것으로 아홉 번째인가?”
또다시 가름의 영혼 조각을 흡수한 카리엘이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문양이 전보다 한층 더 커져 있었다.
“나중에 이 문양이 온몸을 덮는 거 아니야?”
이미 등과 가슴을 전부 뒤덮은 문양은 팔을 타고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그럴지도? 그보다…… 열 번째 조각은 조금 힘들겠어.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합군으로부터 열 번째 조각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았는데, 열 번째 조각이 잠들어 있을 지옥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규모라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카리엘 때문에 자유로워진 연합군 전력 태반이 그쪽으로 몰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열 번째 조각이 마지막일까?”
-알 수 없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전처럼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거다.
수르트의 경고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해내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카리엘은 아홉 번째 조각의 가루들을 남김없이 흡수한 이후 지옥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초록빛 불길에 의해 빠르게 줄어드는 지옥문.
첫 번째 조각을 흡수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를 보니 새삼 자신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쿠구궁!
벌어졌던 공간이 다시금 복구되면서 지옥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타리온이 다급히 달려왔다.
“폐하!”
“왜?”
“열 번째 지옥문을 막고 있던 연합군의 전선이 붕괴되었습니다.”
“뭐?”
카리엘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타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로운 지옥의 괴물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