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56화 (156/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8. 지옥문! (3)

카리엘이 지하 유적지에서 가름의 영혼 조각에 힘을 쏟고 있을 무렵, 로만은 빠르게 후퇴했다.

로만의 황제가 밖으로 나와 후퇴를 명했기 때문이다.

이그니스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끝끝내 버틴 덕분인지, 뒤늦게 도착한 산드리아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후퇴를 시작했다.

반면에 마족들은 달랐다.

마왕이 지옥문을 통해 지옥으로 가 버리면서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밖에만 있던 로칸은 마왕이 사라진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마족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을 단번에 눈치채고는 섬멸 작전으로 바꿨다.

그 판단으로 인해 마족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각자도생인가?”

검은 협곡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흩어지는 마족의 군대를 본 로칸이 한숨을 쉬었다.

기습적인 한 방으로 큰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여전히 고위 마족들은 많이 살아남았고, 하위 마족들이야 금방 충당할 수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도 아쉬운 결과는 아닐 터.

그나마 로만의 군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지만 크게 기쁘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완전히 끝냈어야 했는데…….”

도망치는 로만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 냈어야 했다.

분명 적들을 섬멸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쳤다.

타리온과 황궁 기사단장이 황제의 안위를 확보하기 위해 안으로 진입했고, 제국의 주요 병력도 적들을 완전히 섬멸하기보다 협곡을 완전히 통제하에 두는 데 주력했다.

분명 그때는 그게 맞는 작전이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쉽기만 했다.

자신이 기회를 놓친 덕에 로만의 주력 병력은 산드리아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결국 로만의 황제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쉽군.”

어쩌면 큰 적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었던 이번 기회를 놓친 것을 후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한숨을 푹푹 쉬면서 협곡에서 일어난 전황을 살폈다.

로칸이 한숨을 쉬는 사이에도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사방을 포위해 섬멸 작전으로 이어지는 이그니트의 공세에 적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사령관님! 로만의 군대가 협곡을 완전히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2개 군단을 붙여 주지. 끝까지 추적해서 병력을 갉아먹어라.”

“명!”

로칸의 명령에 지휘관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결국 로만은 이 치열한 전장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남은 건 아직 협곡을 전부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은 마족의 군대뿐.

“아직 협곡을 빠져나가지 못한 마족들은 전부 죽일 생각으로 임하라고 전해라.”

“예!”

남은 마족들만이라도 전부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는 로칸.

하지만 주력 병력만큼은 협곡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판단은 옳았다.

곧이어 협곡 전체가 흔들리면서 반쯤 드러났던 유적지가 완전히 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황제가 그토록 걱정하던 지옥문이 개방되었다.

회색빛 폭풍 속에서 튀어나오는 기형적인 괴물들.

“폐하께선!”

“안쪽에 계시는 걸로 추정 중입니다. 현재 타리온 경이 찾고 있습니다.”

“……아직도 못 찾은 것인가?”

“유적지 바닥에 흔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유적지의 비밀 공간에 계신 것이 아닌가 추정 중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로칸이 한숨을 쉬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안위는 타리온 경에게 맡기고 우린 우리의 할 일을 한다.”

끔찍한 괴물들이 몰려나오는 와중에도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던 로칸이 긴 숨을 내뱉으며 냉정을 되찾고는 하나하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옥문이 열린 이상 이 협곡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틀어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 병력을 협곡 근처로 끌어모아. 저것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이중으로 포위망을 만들어야 한다.”

“예!”

로칸이 마왕과 로만의 황제가 남기고 간 끔찍한 문을 보면서 남은 병력을 끌어모았다.

끝도 없이 몰려나오는 지옥의 존재들을 완전히 막지 못한다면 이곳을 시작으로 동대륙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협곡에서 몰살시키고 결계를 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두 번째 작전에 돌입한다. 협곡을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싸 섬멸할 것이다. 핵심은 지옥문의 공략이 아닌 지옥의 군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걸 명심하도록.”

“예!”

로칸의 명령에 근처에 있던 지휘관들이 두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지옥문이 열렸을 것을 대비해서 만든 작전이 실행되면서 전 병력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섬멸 작전으로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다시금 대오를 갖추고 진형을 갖춰 나가자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오던 아귀들이 하나둘 죽어 나갔다.

단단한 방어진 앞에 쌓인 아귀의 사체들은 하나의 훌륭한 벽이 되어 주면서 이그니트의 방어를 더욱 순조롭게 만들었다.

* * *

그렇게 이그니트의 군대가 지옥의 군대와 싸우고 있을 무렵, 카리엘은 지하에서 사투 중이었다.

“후…… 위쪽은 어때?”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지옥문을 통해서 아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 부하가 너 찾느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어.

“아! 네가 올라가서 말 좀 해 줘.”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까 생각 중이다.

“다시 올라갈 수 있겠냐?”

카리엘이 내려온 이후 다시금 닫힌 비밀 공간.

-가름의 영혼 조각이 회복되어 가면서 결계도 약해지고 있다. 가능은 할 것 같아.

가름의 영혼 조각이 다른 조각들과 공명하며 결계의 힘이 약해지면서 작은 수르트가 빠져나갈 틈새가 열려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타리온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올 셈이었다.

“후……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가름의 영혼 조각이 먹어 치우는 힘이 상당했다.

카리엘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지옥의 힘까지 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 조각의 빛은 아직까지 완전히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빛을 내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이 부분이 다 채워지기 전까지 카리엘은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르트는 카리엘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라졌고, 그러는 동안에도 몸 안에 있는 화기를 바닥까지 쥐어짜서 불어 넣었다.

그렇게 모든 힘을 불어 넣은 카리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수르트의 걱정 어린 말과 함께 의식이 깨어났다.

-……괜찮냐?

“버틸 만은 해.”

파리해진 안색으로 겨우 답한 카리엘은 가름의 영혼 조각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모든 힘을 불어 넣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카리엘의 앞에 놓인 가름의 영혼 조각은 거의 모든 부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불어 넣으면 끝날 거 같다.

“후…… 고작 영혼 조각 하나를 깨우는 게 이 정도일 줄은…….”

-신을 물어 죽인 개다. 그 영혼 조각을 겨우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야.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1개의 조각에 이 고생인데 모든 영혼 조각을 모아 가름을 깨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인정을 받을 수는 있을까?

그저 막연히 막강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가름이란 존재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막막함을 느꼈다.

“새삼 신화적 존재가 대단하게 느껴지네.”

그랜드 마스터보다 더 위대한 존재들.

이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얼마나 지고한 경지에 오른 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라도 알면 됐다.

우쭐하는 표정으로 말한 수르트가 다시금 카리엘의 힘을 일부 컨트롤해 주면서 낭비되는 힘 없이 온전히 가름의 영혼 조각에 불어 넣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마지막이야! 그냥 쥐어짜!

수르트의 호통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힘을 불어 넣던 카리엘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영혼 조각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웠다.

그 순간, 가름의 영혼이 담긴 보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균열이 간 틈으로 엄청난 양의 초록빛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지옥의 힘도, 카리엘의 불의 힘도 아닌 가름만의 독특한 힘이 발산되면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침내 거대한 보석이 완전히 터져 나가면서 가름의 영혼 조각 속에서 거대한 환영이 만들어졌다.

-…….

입을 다물고 가만히 카리엘을 노려보는 거대한 개.

그런 개를 보면서 반갑다는 듯 말하는 수르트.

-오랜만이야.

어느새 수르트의 불덩이는 거대한 거인의 형태를 띠며 희마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콜 역시 가름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반투명한 형상의 본래 몸을 드러냈다.

-……그녀의 흔적이 사라졌군. 지옥문 역시 오염되었나?

단번에 지옥문의 상태를 확인한 가름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를 이은 것치고는 너무 약하군.

-글쎄…… 어떤 의미에선 그 녀석보다 대단할걸.

카리엘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가름의 모습에 수르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카리엘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아 온 수르트 입장에선 본래부터 신들의 축복을 받고 온갖 재능을 받아 온 초대황제보다 카리엘이 훨씬 대단했다.

부족한 능력을 오직 머리 하나로 이끌고 갔으며, 초대 황제의 힘을 받고 나서도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커버했다.

-제법이군.

수르트로부터 기억 일부를 받은 가름이 카리엘을 다시 보았다.

신으로부터 받은 재능에 불의 축복까지 받으며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던 초대 황제.

검술로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고, 불의 힘마저 그 이상의 경지를 개척한 위대한 영웅.

하지만 가름의 첫 번째 조각은 그것보다 부족한 재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지금의 상황까지 이뤄 낸 카리엘이 끌렸다.

-나의 주인 역시 그러했지.

가름의 주인.

과거 저승의 주인이었던 헬 역시 주신에게 강제로 버림받아 몸의 반쪽이 괴사하고 가진바 권능 역시 제한받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저승의 주인이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었다.

-……그래. 난 인정하마.

가름의 첫 번째 영혼 조각이 인정한다는 말을 한 순간, 그의 초록빛 신형이 가루가 되어 카리엘에게 스며들었다.

[가름의 첫 번째 영혼 조각을 깨웠습니다. 예정되었던 두 가지 보상을 받습니다.]

[첫 번째 영혼 조각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권능이 보다 강화됩니다.]

[영혼 조각이 동기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따라서 가름이 가진 육체적 재능에 약간 영향을 받습니다.]

가름의 영혼 조각이 카리엘의 몸으로 완전히 스며듦에 따라 일시적으로 카리엘이 가진 육체적 재능이 한층 더 강력해졌다.

그에 따라 육체적 한계 때문에 상승 폭이 둔화되었던 화기 역시 영향을 받았다.

-이제 좀 쓸 만해지겠네.

어느새 작은 불덩이 형태로 돌아온 수르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대한 크기의 가름의 환영이 한참이나 가루로 변해 카리엘의 몸으로 흘러들어 갔고, 마침내 모든 가름의 환영을 흡수한 카리엘이 눈을 떴다.

-지옥문, 닫을 수 있겠냐?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가름의 첫 번째 영혼 조각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전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의 차이가 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영혼 조각이 건네준 힘을 완전히 다룰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일단 올라갈까?”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초록빛 불이 천장을 휘감으며 지옥문이 있는 유적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동시에 다른 곳은 낡아도 완전한 형태를 이루던 제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할 일을 끝냈다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수르트가 고개를 돌려 카리엘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폐하!”

“지금부터 지옥문을 닫을 거야. 내 주변에 저 떨거지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

“명을 받듭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근방에 있던 모든 그림자들과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복창했다.

그렇게 카리엘을 중심으로 방어 대형이 만들어지면서 아귀 떼를 막아 내는 동안 카리엘은 로칸을 불렀다.

“지금부터 저 지옥문을 막을 거야. 그러니 사령관은 지옥문이 닫힐 때까지 군을 2개로 나눠.”

“2개로 말입니까?”

“그래.”

로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눈을 빛냈다.

로만의 황제와 마왕이라는 두 적이 있는 이상 이그니트 역시 둘로 나뉘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