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7. 전쟁은 모르겠고 일단 낚아 보자 (2)
이마에 문양이 빛을 발하는 순간, 붉은 파장이 퍼져 나가면서 수도 곳곳에 타오르는 화염을 흡수해 나갔다.
동시에 지축을 울리면서 수도 곳곳에 터져 나오는 폭발의 힘 역시 붉은 파장이 퍼져 나가자 힘을 잃었다.
수도 전체를 무너뜨려 피해를 입히려는 에쉬타르의 마지막 한 수.
그것이 카리엘의 압도적인 힘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붉은 파장이 퍼져 나갈수록 연이어서 터져 나오던 폭발의 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면사 에쉬타르가 멍하니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이것인가…….”
멍하니 중얼거린 에쉬타르가 신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는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서대륙에서 성자로 추앙받으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잘 이끌어서?
분명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이런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 준다면 어떤 이라도 자신들을 구원하러 나타난 구원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군.”
그동안 로만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찼던 에쉬타르의 마음에 이제 와서 아쉽다는 마음의 조각이 싹텄다.
자신도 저런 주군을 모실 수 있었다면.
인류를 위해서 일할 수 있었다면.
그런 아쉬운 마음에 쓴웃음을 짓던 에쉬타르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황제 역시 인류를 위한 대의를 가진 것은 같았기 때문이다.
‘그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입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쉬타르가 마지막까지 숨겨 온 함정이 발동되었다.
“이것이 그대가 숨겨 둔 마지막 한 수인가?”
붉은 빛에 휘감겨 공중에 떠 있는 카리엘이 에쉬타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로만의 광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핏빛 마법진.
그것을 중심으로 수도 전체의 땅이 들썩이면서 전쟁으로 죽은 희생자들의 사념덩어리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잿빛 기운이 뭉치는 순간 거대한 얼음 거인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에 닿자마자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압도적인 힘.
“……신인가?”
카리엘이 멍하니 거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수르트의 말이 들려왔다.
-저딴 게 신일 리가.
그렇게 말한 수르트가 거대한 몸을 더 부풀리더니 자신이 직접 얼음 거인을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만든 재앙은 그대가 준 선물로 처리하도록 하지.”
카리엘이 에쉬타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로만의 수도 전체에 퍼져 있던 붉은 기운이 하늘을 향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지옥의 망자는 지옥에 있어야 할 터.”
그렇게 말한 순간 한데 뭉친 불이 섬광처럼 얼음 거인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천벌을 내리는 것 같은 힘에 지옥의 존재가 그대로 소멸되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증발하듯 사라졌음에도 주변엔 불의 열기에 녹지도 타지도 않았다.
그저 불의 기둥에서 퍼져 나온 파장이 지옥의 군대만을 재로 만들어 사라지게 만들 뿐.
그 모습을 보면서 이그니트의 군대가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반대로 로만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기사들부터 마법사들까지 전부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에쉬타르 역시 허탈한 표정으로 카리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들이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그니트도,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천천히 바닥에 착지했다.
불의 힘을 내뿜지도, 마력을 사용하지도 않은 채 무방비하게 서 있는 카리엘.
하지만 에쉬타르는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마도사라면 저런 힘을 흉내 낼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진 고유한 대마법이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망자들과 지옥의 존재들만 쓸어버리는 저 힘만큼은 카리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목표는 이루었다.’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동부로 향하지 못하게끔 시간을 끄는 것.
그것을 이룬 에쉬타르가 미련 없이 단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자결은 안 되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나자 자결하려는 에쉬타르의 손을 붙잡은 카리엘이 황궁 기사들에게 명해 제압하게끔 했다.
“그대는 살아서 로만의 국민들을 설득해야지.”
“……제 충의를 모욕할 생각이시오?”
“모욕이라…….”
카리엘이 분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쉬타르를 보며 말했다.
“그대가 직접 보게. 그리고 누가 맞는지 판단해. 그 이후에 로만의 국민을 설득하든 말든 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멀리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이반형제를 바라보았다.
마스터답게 쉽사리 제압당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다.
무적이 아닌 이상 결국 군대 앞에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고, 로만의 군대는 압도적인 이그니트의 군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것과 다르게 많은 병력들이 살아남은 채 로만의 수도 공방전이 끝났다.
“아!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끈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한 가지 말해 주지.”
황궁 기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끌려가는 에쉬타르를 보면서 카리엘이 말했다.
“난 로만을 완전히 정복할 생각이 없네.”
카리엘의 말에 에쉬타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또한 이번 전투에서 이그니트의 모든 전력을 선보이지도 않았지.”
거기까지 말한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쉬타르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카리엘이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자신이 사력을 다해 시간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그니트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거기다 모든 것이 카리엘의 계획 아래에 있던 것임을 깨닫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서대륙을 통일한 황제의 힘인가?”
자신의 주군처럼 카리엘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일평생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로만의 황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그니트의 황제 역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최종 국면은 결국 둘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의 명장인 에쉬타르가 그 생각을 끝으로 감옥으로 끌려가자 이반 형제 역시 구속구가 채워진 상태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이그니트가 로만의 수도를 점령할 무렵, 남부 연합군과 합류해 동부 쪽으로 움직인 선봉군은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계 게이트를 부순 별동대 역시 빠르게 동진했다.
「마계 게이트를 부순 별동대! 곧바로 북동부로? 마족들의 군대를 박살 내며 파죽지세로 동진!」
「선봉군의 북상. 산드리아의 군대를 연이어 대파하며 빠르게 북상 중!」
마스터를 중심으로 짠 별동대들이 연이어 승전보를 울리면서 빠르게 북동부로 향했다.
하지만 진짜는 바로 이그니트의 주력군이었다.
「드디어 점령한 로만의 수도 크로노플! 이제 남은 건 동진!」
마침내 이그니트가 로만의 수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대륙 전체에 퍼졌다.
로만의 예상대로 이그니트의 주력군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로만의 수도를 안정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거기다 이그니트의 선봉군 역시 빠르게 북상하던 것과 달리 죽음의 땅과 가까워지자 일부 요새를 함락해 보급선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의심하던 로만의 지휘관들이 마침내 이그니트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이곳까지 당도하는 데에는 최소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점령지를 완전히 안정화시키면서 온다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함정에 걸릴 경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그들의 말에 로만의 황제가 한쪽 턱을 괴면서 물었다.
“이그니트가 선봉군처럼 남쪽을 돌아올 경우는?”
“그럴 경우 기존에 준비한 것들을 옮기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한 달 안에 마족과의 전투가 결판이 나겠나?”
“전쟁 자체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유적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휘관의 말에 로만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표는 검은 협곡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아닌 지옥문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로만의 지휘관들의 판단에 로만의 황제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협곡 안으로 진입한다. 지옥문이 묻혀 있을 지역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도록.”
“명!”
황제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검은 협곡 안에 잠들어 있을 옛 유적지를 점령하기 위해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지막까지 눈치사움을 벌이던 마족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군단장들을 필두로 검은 협곡 내부로 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서로 입구를 차지하기 위해 로만의 군대와 마족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로만과 마족 간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로만의 수도를 안정화 시키던 카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드디어 시작됐나? 오래도 걸리는군.”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로만을 향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카리엘.
“그래도 폐하의 의도대로 되셨습니다.”
로칸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제 움직여야겠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타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벽에서 보내 온 지원군은?”
“내일 안으로 당도할 것입니다.”
“좋아. 움직일 준비해.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 전군 자정을 통해 동진한다.”
“예! 폐하”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는 지휘관들.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북동부로 향하는 길목의 주요 요새는 로만이 준비한 군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면 선봉군처럼 남쪽으로 돌아가 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그러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갈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카리엘은 굳이 그런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 없었다.
“폐하, 준비 끝났습니다.”
“그들은?”
“먼저 출발했습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로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주력군의 출진을 명했다.
보름달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때, 엄청난 수의 병력이 로만의 성문을 나섰다.
전원 마동차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자 카리엘을 태운 비공선이 하늘 위로 떠오르며 수백의 비공선들과 함께 전진했다.
-치직!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움직였다. 빠르게 북동부로 북상 중!
“주력 부대 저지 작전을 실행한다!
예상과는 다른 이그니트의 움직임에 당황하면서 빠르게 작전 실행을 명령하는 로만의 지휘관.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또 다른 결과가 날아들었다.
-1차 방어선 붕괴.
“뭐? 그럴 리가……. 남은 부대로 시간이라도 끌어!
-불가. 지옥의 군대 전멸.
“이런 미친!”
통신병의 보고에 지휘관이 사색이 되면서 황급히 로만의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바로 다음 날 아침, 동대륙의 군대 전체에 퍼져 나갔다.
「이그니트의 특수부대가 지옥의 군대를 청소 중.」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부대.
그들이 로만의 군대를 박살 내면서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갈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