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6. 시작되려 하는 전쟁 (2)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진 잡아 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인수인계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윈스턴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는 동안 큰 분열 없이 이곳을 잘 돌아가게 만들었어.”
카리엘이 동대륙으로 떠나 있는 동안에도 제국은 무사히 돌아갔다.
동대륙의 상황이 급한 것도 있었지만 만약의 산태를 대비하여 시험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심할 수 있었다.
“으음…….”
그토록 바라는 은퇴를 시켜 준다는데 반응이 시큰둥한 윈스턴을 보면서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반응이 이상한데?”
“……폐하, 혹시…….”
“혹시?”
“전쟁이 끝난 이후를 벌써 계획하신 것 아닙니까?”
윈스턴의 물음에 카리엘이 속으로 움찔했지만 근엄한 표정은 유지했다.
“무슨 소리야?”
“전쟁이 끝난 이후 은퇴를…….”
“이길지도 모르는 전쟁 이후를 벌써? 재상, 약 먹었나?”
카리엘의 물음에 윈스턴이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과한 생각을 한 것 같군요. 송구합니다.”
순순히 사과를 한 재상이 헛기침을 하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의 은퇴 생각에 빠져 있는 재상을 보면서 카리엘도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전쟁이 끝난다면 은퇴 각을 세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인계를 하는 것은 좋은데 은퇴하기 전에 재상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말씀하시옵소서.”
“신대륙.”
재상의 말에 카리엘이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아주 막장이야?”
카리엘의 말에 재상이 한숨을 쉬었다.
신대륙과 남부의 섬들이 도움을 주기는 했다.
그런데 그 도움이란 게 제국 입장에선 한심한 수준이라는 게 문제였다.
1. 관세를 낮춰 준다.
2. 오래된 식량 일부를 선심 쓰듯 지원한다.
3. 수출품 제한 품목을 풀어 준다.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인류의 존망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군대를 보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물자라도 대폭 지원을 해 주는 게 정상 아닌가?
“신대륙이나 남부 섬들은 아직 심각성을 잘 모르는 듯싶은데…….”
“바라시는 것이 있사옵니까?”
“그들에게도 흑마법사 맛 좀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어?”
카리엘의 물음에 재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족들이 혹한의 대지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어.”
“혹시…….”
“그래. 그들이 신대륙으로 가는 것을 막지 마.”
“하오나 폐하, 전쟁 이후 신대륙이 새로운 위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윈스턴의 걱정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땐가?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그건…….”
“이미 남쪽의 뱃길은 열어 두라고 명령했어.”
카리엘의 말에 윈스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드리아를 통해 로만이 섬나라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두었다.
그리고 신대륙은 마족들에게 뱃길을 열어 주어 개입할 여지를 둔다.
“바다라는 장벽이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 그것을 부수지 않는 이상 적극적인 지원은 어렵겠지.”
“……알겠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관망하는 이들에게 흑마법사 맛을 보여 줌으로써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지원을 얻을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 놨다.
문제는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별 효용이 없다는 점이다.
대륙을 건 전쟁이 당장 얼마 후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카리엘은 만약을 대비하는 게 분명했다.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어.”
“……폐하.”
은퇴를 빌미로 자꾸 부탁을 해 오는 카리엘을 보면서 윈스턴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다시금 거인의 협곡을 잠가야 할지도 몰라. 어차피 동생들은 안 할 거니까 그대가 비밀리에 준비해.”
“하오나…….”
“우리가 동대륙에서 전멸할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해.”
카리엘이 재상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전멸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이다.
“주력군이 전멸하면 마스터들 한 명도 없이 지옥의 군대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해.”
“……후, 어쩐지 갑자기 저한테 잘해 주시나 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카리엘을 보면서 윈스턴이 한숨을 쉬었다.
“루터는 아직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엔 경험이 부족하니까. 녀석은 발전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줘야지. 젊은이가 날개를 펼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어른이 할 일 아닌가?”
카리엘이 웃으면서 말하자 윈스턴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윈스턴의 대답에 카리엘이 기다렸다는 품속에서 비밀리에 작성한 명령서와 패 하나를 건네주었다.
“비밀 수호대와 그림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패야.”
비밀 명령서를 전달한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윈스턴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무거운 짐을 얻게 되니 윈스턴은 말없이 비밀 명령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접어 품속으로 고이 넣었다.
* * *
그렇게 황궁에서 큰일을 처리한 카리엘은 하루 정도는 휴식을 가졌다.
“전쟁 전 마지막 휴식인가?”
-쫄리냐?
“쫄리긴 하네. 후…… 지옥이라…….”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전생과는 다를 거다.
“……그럴까?”
-그래.
수르트의 확신에 찬 대답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전생과 달리 마족은 반쪽짜리는 말도 과분할 정도로 약한 몸으로 넘어왔다.
로만 역시 전생과 달리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서대륙을 통일하고 동대륙의 일부 국가들을 이그니트의 편으로 끌어들인 게 컸다.
카리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보는 것뿐.
오랜만에 황궁에 돌아온 카리엘은 며칠간 직접 대전 회의를 주관하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던 문제를 빠르게 정리해 버렸다.
그렇게 큼지막한 일이 정리되자 남은 부분은 관료들이 알아서 척척 진행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황태자 대관식과 사령관 임명식뿐이었다.
대전 회의가 끝나고 카리엘이 직접 광장으로 걸어가자 그곳에 동생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세리엘!”
“예! 폐하.”
“그대를 서대륙의 총사령관으로 삼겠다. 이는 서대륙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직위이다. 또한 만약 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시 모든 군을 이끌고 철벽을 방어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할 것이다. 그대는 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나?”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세리엘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그에게 한 자루의 보검을 건넸다.
“그대에게는 주력군이 전멸한 이후까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새로운 마스터를 키워 내고, 더 강력한 군대를 갖추어라.”
국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라는 명령에 세리엘은 순간 답하지 못했다.
결국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세리엘을 보면서 미소를 지은 카리엘이 세리엘을 물러가게 하고 루피엘을 바라보았다.
“짐이 직접 원정을 가야 하는 바. 짐을 대신해 이그니트를 대신할 황태자를 선임한다. 전쟁 중 내가 죽을 경우 그 즉시 모든 권한은 황태자에게 돌아가며 새로운 황제가 될 것임을 나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카리엘의 선언에 제국민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의 황제가 죽음을 각오한 이 순간에 그 누가 환호할 수 있으랴.
황태자가 된 루피엘조차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황제를 상징하는 홀과 황관 등을 물려주면서 말했다.
“짐을 대신해 이그니트를 더욱 발전시켜라. 그것이 너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니. 더 강력한 제국으로 위협에 맞설 힘을 키워라.”
“……예, 폐하. 반드시 폐하께서 명하신 의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답하는 루피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제국민들을 향해 선언했다.
“짐은 대관식에서 약속한 대로 제국을 지키기 위해 떠날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라, 짐과 짐의 군대는 목숨 걸고 이 제국을 지키려 했음을……. 혹 나와 나의 군대가 죽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저항하라. 이것이 먼 전장으로 떠나기 전 나의 제국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니라.”
카리엘의 명령에 제국민들이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자신들의 황제가 내린 마지막 명령에 눈물을 흘리면서 답하는 제국민들.
위대한 결전을 위해 떠나는 황제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황제의 믿음에 답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본 카리엘은 만족했다는 듯 루피엘과 세리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곧장 비공선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뒤, 마차가 비행장에 도착하고 카리엘을 태운 비공선이 하늘에 떠올랐다.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을 향해,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 모두 마음속 깊이 기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 * *
「황태자 루피엘. 마침내 불안했던 황위가 정리되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이 된 세리엘 사령관. 막강한 군권으로 서대륙의 군대를 재편한다」
카리엘에 의해 마침내 정리된 두 황족.
마지막까지 불안의 씨앗으로 남았던 것이 정리되었지만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황제가 직접 이번 전쟁이 얼마나 힘든 전쟁인지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목숨조차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전쟁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막연히 동대륙의 상황이 좋지 않다.
마족들과 지옥의 존재들이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었던 제국은 충격에 빠졌다.
이 충격은 이그니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뛰어든 황제. 그 모습을 본 동대륙의 연합국들 역시 마지막을 전쟁을 위해 움직였다」
가장 먼저 동대륙 국가들이 반응했다.
그동안 이그니트가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서 힘을 아끼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을 버리고 서대륙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리엘의 이번 발언으로 그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그니트의 황제가 이번 전쟁을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직접 본 사신들과 기자들이 동대륙의 국가들에게 침을 튀기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카리엘의 이런 결정에 반응한 것은 동대륙뿐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황제의 발언으로 당혹스러운 신대륙!」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한 남쪽의 섬들. “서대륙까지 집어삼켜지면 다음은 우리다!”」
이제 겨우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다가올 때까진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리엘에게 명을 받은 윈스턴은 기다렸다.
마족들과 로만의 위협이 그들에게 닿을 때까지 바닷길을 열어 두고 그들이 직접 이그니트로 찾아올 때까지.
그것이 위대한 황제가 자신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기에.
* * *
“오셨습니까.”
거인의 요새에 도착하자 아켈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황궁 기사들과 함께 묵례를 올렸다.
“준비는?”
비공선에서 내린 카리엘이 황급히 달려온 남부 사령관이 고개를 숙였다.
“끝났습니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로만은?”
“이미 비밀리에 황제가 사막 지역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로만의 황제가 직접 산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주력군 역시 대부분 그쪽으로 떠났다.
그 역시 진짜 싸움은 동부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오늘부로 서부 사령관을 제외한 각 지역의 사령관들의 모든 직위를 해제한다. 또한 남부 사령관이었던 로칸 바르사유를 동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보검을 로칸 바르사유에게 건넸다.
“모든 군은 그대가 이끌도록. 앞으로 마스터들은 휘하의 기사들과 특수부대들만 이끄는 별동대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모든 지휘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하자 카리엘이 미뤄 두었던 명령을 내렸다.
“대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이는 동대륙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예! 폐하.”
“로칸 바르사유. 그대의 첫 임무는 로만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다.”
대전쟁의 첫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 요새에서 쉬고 있던 대군이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여태껏 힘만 키우고 있던 남부의 연합군들 역시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