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5. 셋으로 분할되는 대륙 (2)
한참을 고심하던 골란의 족장이 다른 족장들을 보며 물었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되지?”
그의 물음에 모든 족장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북부 전쟁에서 그들이 보았던 광경은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강력했다.
마족들의 힘은 마스터라 불리는 이들조차 고전을 면치 못할 만큼 강력했으며 개개인의 힘들 또한 기사단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했다.
그런 이들이 마계 게이트를 통해 계속해 넘어올 것이다.
현재 유목 민족 중 가장 강하다는 바투조차 마스터의 경지는 아직 요원했다.
‘감은 잡았다. 하지만…….’
바투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미묘한 감각을 평생 쫓다가 눈을 감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에 마스터급 강자로 알려진 마계 군단장들은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이곳을 버린다.”
바투의 결정에 모든 족장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결정하자마자 반대파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개하는 그들을 향해 바투가 말했다.
“그래서 항전하면 우리들이 살 수 있나?”
“그건…….”
“마족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로만과 산드리아까지 우리를 노릴 것이다. 지금처럼 이그니트가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아니면 남부 왕국들이?”
바투의 물음에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잘 알았다.
이곳에 남으면 모두가 죽을 것임을…….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인 아이들과 여인들을 남쪽으로 먼저 보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미래는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들은 이곳에 남아서 위대한 민족이 이곳을 지배했었음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상들이 지켜 온 곳을 마지막까지 지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죽을 생각을 했다.
“미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만으로 이곳을 되찾을 수 있을까?”
바투의 물음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
족장들이 인간이라는 단어에 생각에 잠겼다.
“인류를 위해 같이 싸우는 것이 부끄러운가?”
“하지만 이곳을 버리는 것은…….”
“저 강대한 이그니트조차 미래를 위해 후퇴를 결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잠시 후퇴하는 게 뭐가 문제지?”
동대륙 서대륙을 통틀어서 최강의 국가라고 알려진 이그니트조차 미래를 위해 점령지를 일부 내주고 단속에 들어갔다.
서대륙을 통일한 국가조차 미래를 위해 자존심을 접어 두는 판국에 민족들을 통일조차 못한 지금의 자신들이 자존심을 내세울 때일까?
그렇게 생각한 족장들이 하나둘 생각에 잠겼다.
바투는 그런 그들을 탓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찬성하지요.”
반대했던 족장이 결국 찬성표를 던지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자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았다.
모두가 그를 바라볼 때, 그가 바투를 향해 물었다.
“이것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찬성하지요.”
“무엇이지?”
“언젠가…… 모든 전쟁이 끝나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에 돌아올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바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고향을 버린 전사는 방랑하다 홀로 쓰러지는 법. 우린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뿐이다.”
바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족장이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들어 바투에게 건넸다.
“……자네.”
“제 식구들을 반드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족장의 말에 바투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족장이 건넨 검을 바라보던 바투가 어렵게 그 검을 집어 들었다.
“반드시 그리하지.”
바투가 거대 세력 중 하나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자 또 하나의 족장이 자신의 검을 바쳤다.
그렇게 하나둘 자신의 부족을 골란 부족의 소속으로 들어가자 마지막까지 눈치를 보던 족장들도 한숨을 쉬면서 자신들을 검을 바투에게 건넸다.
골란을 제외한 가장 큰 부족장이 가장 먼저 스스로 바투의 아래로 들어갔다.
거기다 대다수의 부족들이 바투 아래 들어가기로 결정한 이상 더 버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 역시 남부로 내려가는 입장에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언제까지 분열된 민족으로 있을 수는 없지.’
‘비록 나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대표라도…….’
터전을 버리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각국의 국왕들에 꿀리지 않는 지도자를 만드는 것.
그것이 현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모두 고맙다. 반드시 모든 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돌아오겠다. 그러니 나를 믿고 조금만 버텨 다오.”
그렇게 말하면서 족장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바투.
그런 그의 모습에 족장들이 그의 의지를 확인했다는 뜻으로 허리를 굽혔다.
* * *
유목 민족의 새로운 왕의 탄생.
그리고 모든 유목 민족들이 남부로 떠날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진 후,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단 북쪽에 있는 모든 유목 민족이 동부를 통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남아 있던 동부 연합군에 힘을 보탰다.
그러자 파죽지세로 서진하던 산드리아의 부대가 정지했다.
“대단하군.”
황좌에 앉은 로만의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기어코 마왕을 힘의 1할도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고사시킬 수 있는 유목 민족들과 동부 연합군마저 전력을 온전히 지킨 채 후퇴시키려 하고 있었다.
“삼분이라…….”
단번에 카리엘의 의도를 파악한 로만의 황제가 피식 웃었다.
사실 둘이 힘을 합한 것만으로 산드리아의 전력을 온전히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산드리아가 진군을 멈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산드리아의 후방을 어지럽힌다라……. 마족들 역시 폭발로 피해를 입어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 터.”
이그니트의 온전한 병력과 남부의 병력으로 로만을 견제하면서 발을 묶고, 그사이 산드리아에서 황제에 반기를 든 부족들을 규합해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잠시 정신 팔린 사이 동부 연합군과 유목 민족들이 대거 남부로 이동을 시작했다.
산드리아 입장에선 남부로 이동하는 취약한 시점을 공략하기도 힘든 것이 잘못 건드렸다가 양방향으로 공격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동부 연합군을 치는 동안 산드리아의 반군이 뒤를 친다면?
아무리 군대가 강하다 한들 2개의 전선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서대륙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던 이그니트조차 다 죽어 가는 남부 왕국들과 성국을 동시에 공격해 2개의 전선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
이그니트조차 그러할진대 완벽한 중앙집권 국가도 아닌 산드리아 입장에선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유목 민족! 골란 부족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다!」
「북부 민족들이 일제히 남하 시작. 인류 연맹 아래 전쟁을 시작할 것을 천명!」
「지옥과 손잡은 산드리아. 내부에서 반기를 든 부족들이 인류 연맹 아래로 들어올 것을 제안」
순식간에 여러 기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로만 내부 역시 어지러워졌다.
그동안 눈치만 봐 오던 로만 내부의 귀족들 중에 몰래 인류 연맹으로 넘어가는 이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야.”
“우린 인간이라고.”
로만 내부에서 현 황제를 미친놈 취급하면서 몰래 빠져나가는 이들이 늘었고, 이그니트는 로만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 가면서 남부 연합과 영토가 맞닿은 곳까지 진군했다.
그러자 로만에서 탈출하는 이들이 두 방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시가 강화된 남쪽보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탈출 루트를 만든 것이다.
이것을 단속하기도 쉽지 않은 게, 그림자들이 탈출하려는 이들을 도우면서 암살하려는 검은 달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로만조차 내부를 단속하지 못하는데 산드리아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비밀 수호대와 남부 쪽 국가들의 첩자들이 활개 치면서 반군으로 합류하는 부족들을 도왔다.
결국 이그니트와 마족들이 큰 피해를 입은 이 절호의 상황 속에서 로만은 내부 단속만 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전력을 다해 배신자 새끼들을 처단하겠습니다.”
“놔두어라.”
로만의 황제는 조국을 배신한 이들이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검은 달의 수장이 분개하며 말했지만 사실 로만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았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광활한 영토 상당수를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병력 역시 엄청난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한테도 시간은 필요할 터. 지금은 그냥 놔두도록.”
황제의 명령에 검은 달의 수장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했고, 로만의 황제는 이그니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산드리아와 함께 동대륙 중앙 지역을 완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황제의 명령으로 로만이 가만히 남부로 피난하는 이들을 놔두면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다.
“폐하! 마족들이 움직였습니다.”
“비어 있는 북부를 먹으려는 것이겠지.”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목 민족이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북부를 놔두는 것은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비록 마족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북부를 점령할 여력은 되었기 때문이다.
로만과 산드리아가 아직 완전히 남부로 빠져나가지 못한 동부 연합군과 유목 민족 때문에 잠자코 있는 동안 마족들은 최대한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북부를 마족들에게 그냥 주는 것. 과연 이 결정이 옳은 것일까?」
「이그니트 제국, 큰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사리는 것은 아닐까?」
마족들에게 동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게 두는 이 결정에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과연 이 결정이 나중에 후폭풍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는 했지만, 후일을 위해 최대한 마족들을 억제했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었다.
결국 어떤 것이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법.
* * *
「삼분된 대륙」
조간신문을 펼쳐 든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도에는 카리엘이 그렸던 것처럼 마족과 로만, 이그니트의 세력권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이번 결정으로 이그니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충성도가 높은 이그니트조차 이러니 다른 국가들은 더 심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이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엔 썩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시간을 벌었으니 되었다.”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인의 요새에 모인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그니트의 동대륙 최대 거점인 요새답게 기존보다 훨씬 확장된 요새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거인의 협곡을 통해 철도까지 연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마족들에게 북부 지역을 내주게 되었지만 그 시간 동안 이그니트는 좀 더 완벽한 보급선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거기다 이번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시금 전선에 복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부차적인 문제였다.
“……글렌.”
카리엘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글렌이었다.
전생에 제국을 구원한 최강의 기사.
그가 다시 부활하는 것뿐이다. 치명상을 입어 생사가 오락가락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복으로 다가왔다.
“그랜드 마스터라…….”
마왕이 마지막에 보인 한 수.
그것으로 인해 겨우 넘어온 마왕이 다시금 잠에 들어야 할 정도로 막강한 일격은 글렌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힘을 조금이나마 베어 내면서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만약 이 깨달음이 다음 단계로 향하는 길이 되어만 준다면 북부에서의 패배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시종장의 물음에 들어오라는 명령과 함께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월크셔 공작은 어때?”
“다행히 정신적으로 문제는 없사옵니다. 다만 폭발로 잃은 왼팔을 소생시킨 탓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상은?”
“그쪽 역시 심각하옵니다. 마나 회로가 전반적으로 망가져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다시 전쟁이 시작할 때까지 월크셔 공작이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살았으니 되었다.”
마도사의 쓰임새는 단순히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마법에 관한 이해도와 마나를 읽어 내는 눈은 제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었다.
“괜히 급하게 움직일 생각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라고 해. 시간은 많으니까.”
“그리 전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히며 대답한 시종장이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한 글렌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 월크셔 공작은 회복을, 남은 마스터들 역시 부족한 무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카리엘 역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이번 전쟁으로 느꼈기에 모든 것을 제쳐 두고 무력을 키우는 데 집중한 것이다.
* * *
그렇게 이그니트가 조용히 내실을 다지면서 힘을 키울 때, 북부를 평정하다시피 한 마족과 로만&산드리아 연합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북동부에서였다.
카리엘이 태어난 지 스무 해가 넘어가는 시점.
전생에 황제가 되었던 이 시기에 대륙의 판도를 가를 대전쟁이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