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4. 게이트 전쟁!
마침내 보급선 방어 작전이 끝이 났다.
결과는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이그니트의 승리였다.
건물 대부분이 박살 나고, 물자들도 멀쩡한 걸 찾는 게 힘들었지만 보급로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하셨군.”
어려운 싸움이었음에도 기어코 타리온이 막아 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글렌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후방에 가야 할 수도 있기에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쪽에서 있던 기사단이 글렌을 중심으로 한데 뭉치기 시작했고, 혹한의 협곡을 통해 넘어온 추가 병력 역시 글렌이 있는 곳으로 하나둘 합류했다.
그러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군대가 만들어졌다.
이제 이 군대를 보급선을 지키는 것이 아닌 주력군이 전투하는 전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막을 수 있을까?”
글렌이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처음 북부에 글렌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마스터’ 정도의 평가를 받았었다.
이그니트에서는 추앙받았지만 동대륙에서의 평가는 박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동대륙 북부에 올라오고 나선 달라졌다.
거인의 요새와 북부에서의 연이은 전투로 강력한 힘을 자랑한 흑마법사의 수장.
그런 그가 흑마법사들과 함께 글렌의 별동대를 막기 위해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패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글렌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서대륙에서의 전투 경험이 마스터에 이르게 했다면, 동대륙에서의 전투 경험은 마스터가 된 이후의 힘의 운용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게끔 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출발하죠.”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하러 온 군단장을 보면서 막사에서 나온 글렌이 별동대를 움직였다.
가장 앞에선 별동대의 뒤에 혹한의 협곡을 넘어온 3개 군단이 뒤를 따랐다.
전부 최정예로 이루어진 병력이 일제히 마계 게이트가 있는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별동대의 기마대 뒤로 수천대의 마동차(마력 자동차)가 따랐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비공선들이 움직였다.
“흑마법사가 안 보입니다.”
“막지 못할 것을 알았나 봅니다.”
함께 움직이는 부관들이 흑마법사가 사라졌다는 것을 보고하자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동대를 움직였을 때도 패했던 흑마법사들이 대규모 부대를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별동대를 흑마법사들이 막아섰을 때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글렌의 실력이 자신들의 수장에 근접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뒤로하더라도, 흑마법사들과 마인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힘이 별동대를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를 메꾼 것은 오로지 글렌 혼자의 힘이었다.
삐이이!
“무슨 일입니까?”
“마계 게이트로 추정되는 곳에서 강력한 마기의 파장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군단장의 보고에 글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대한 빨리 가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글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군단장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가 이끄는 주력군은 별동대.
그러니 별동대답게 주력군에 합류하기보단 먼저 게이트 쪽을 치자고 했고, 모든 군단장들이 그에 동의했다. 그동안 보여 준 글렌의 무력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별동대가 게이트를 직접 치러 가기 위해 방향을 트는 동안 주력군 역시 빠르게 마족들을 박살 내면서 북진했다.
보급선이 안정화되면서 아켈리오와 월크셔 공작이 이끄는 부대들로 로만을 압박하자 그동안 로만을 견제하던 병력까지 주력군에 합류했기 때문인지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승리에도 주력군은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웃는 것은 마족 군대였다.
비록 마족의 군대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패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목표했던 임무는 어느 정도 완수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전달받은 카리엘 역시 심각해졌다.
“예상과 달리 너무 빠른데?”
카리엘의 물음에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자신들이 찾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게이트가 완성될시 하늘을 향해 보랏빛 마기의 기둥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니란 건가?”
카리엘의 물음에 신관과 마법사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완성 단계는 아니옵니다.”
“이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둘의 확신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군데서만 나온 것이 아닌 역사상 마족들이 출현했던 거의 모든 기록이 동일하게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리엘 역시 전생에 마계 게이트가 있던 곳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들이 말한 것처럼 보랏빛 기둥은 보지 못했지만 하늘을 마기로 오염시킨 검은 구름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보고에 따르면 그저 마기의 파장만 짙어졌을 뿐 기록상에 나온 어떤 현상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완성은 아니라 치고…… 이 현상이 무얼 뜻하는 거지?”
카리엘의 물음에 회의에 모인 모든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들도 알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가장 최근에 마족들이 나타난 것만 해도 고서를 찾아봐야 할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 고위급 마족을 무리하게 소환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마법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려 말을 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혹스러워하는 마법사를 보면서 카리엘이 턱짓으로 더 말해 보라고 명령했다.
“마족을 소환했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게이트가 아니지 않소?”
마법사의 말에 신관 중 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환 마법과 게이트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세계간의 단절된 공간을 열어 마족의 정신체만 소환하는 것과 달리 게이트는 마계의 모든 것이 오갈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관을 비롯한 다른 마법사들도 의아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개념 자체는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카리엘이 더해 보라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더는 말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의 말을 듣고자 했다.
“마족을 소환한 기록들을 찾아보면 이런 비슷한 현상이 기록된 바 있습니다. 공통점은 무리하게 소환 시일을 앞당기다가 일어난 일들입니다.”
마법사가 보여 준 기록들을 직접 살펴본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강해진 마기의 파동과 동시에 주변에 퍼져 있던 마기가 전부 사라졌다는 묘사들.
“여기서 마기가 사라진 원인은 소환진 때문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소량의 마기조차 소환진이 빨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법사의 말에 입을 달싹이는 신관을 본 카리엘이 이번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폐하, 여기 기록들을 보시면 마족 소환 시 다양한 형태로 주변 환경이 오염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같은 조건임에도 현상이 다릅니다.”
다른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동일 조건의 다른 현상들을 찾아서 카리엘에게 보여 주었다.
확실히 동일 조건임에도 다른 현상들이 일어난 것임을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지금 마계 게이트에서 일어난 현상임에도 단순히 마기만 흘러나왔던 기록들도 있었다.
전생에 마족들을 수 없이 겪어 본 카리엘이지만 게이트나 소환과 관련된 정보는 많이 부족했다. 이미 대규모 마족 군대가 소환되었는데 그런 곳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럴 시간에 마족들의 약점을 하나라도 더 찾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최악의 사정부터 가정해 보지. 만약 그대의 말이 맞다면 어떤 상황까지 예상할 수 있겠나.”
카리엘의 물음에 고위 마족의 소환을 가정했던 마법사가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마왕의 소환도 가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다른 이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즉시 반박했다.
“말도 안 됩니다. 마왕이 소환되기에는 마기의 파장이 터무니없이 약합니다.”
“예. 불완전한 마왕이 소환되었을 때에도 주변에 마기가 넘실거릴 정도였습니다.”
마법사와 신관들의 반박에 카리엘은 말없이 마왕이 소환될 수 있다고 주장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다림에 핏줄까지 세워 가며 반박하면 신관들과 마법사들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자신의 근거를 뒷받침할 자료를 찾은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기록들을 살펴보시면 마왕을 일시적으로 소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마법사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말했다시피 마왕이 본래 힘을 대부분 봉인하고 왔음에도 파장은 상당히 컸습니다. 하지만 이 사례를 적용시키면 가능도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처음 보는 형태의 소환진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에 고치 같은 것이 있었고 그곳에 괴이한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피로 그려진 마법진 역시 여려 겹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 같았다.
“과거 부두술사들이 다수를 희생시켜 악마를 만들려 했던 흔적입니다.”
“만들려 했다?”
“그렇습니다. 고위 마족 몇 명의 심장을 한 명에게 이식시키고 봉인된 마왕의 혼을 불어넣어 아무런 제약이 없는 ‘마왕’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패했나 보군. 성공했다면 내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예.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이 실패한 잔재를 먹은 이가 있습니다.”
“누구지?”
“마룡왕입니다.”
그의 말에 카리엘이 즉시 고개를 돌려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마룡왕이라면 카리엘도 들어 본 적 있는 재앙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사실은 인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그런 추측은 있사옵니다.”
“실제로 이 흔적을 봉인해 두었던 신전이 무너진 후 마룡왕이 나타났긴 했습니다.”
교구의 신관들이 하는 말에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해 보자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마왕이 넘어올 가능성도 있단 얘긴가?”
“……저럴 경우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닙니다.”
“추가로 산제물을 받치는 의식을 통해 게이트의 부담을 줄인다면…….”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마왕이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을 추측해 보았다.
“마왕이 소환될 확률 3할. 대신 소환되더라도 온전한 힘을 갖췄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도인가? 기껏해야 1할 정도?”
“예!”
“그럼 한 가지 묻지. 1할의 힘을 가진 그랜드 마스터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카리엘의 물음에 마법사들과 신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답이 되었군.”
회의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침묵에 카리엘이 그 즉시 시종장을 불렀다.
“지금 즉시 이 사실을 주력군에 알리도록. 시종장.”
“예!”
“대신들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마왕이 소환되었을 가능성.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국은 다시금 비상 체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즉시 통신구를 통해 이 소식을 동부로 전하고 전쟁 중인 주력군에 비밀 서신을 전했다.
「마왕이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비밀 서신을 본 남부 사령관의 눈이 찌푸려졌다.
불완전하게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랜드 마스터급 이상의 존재가 넘어왔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지금 즉시 태양검과 교황을 부르시오.”
남부 사령관의 말에 고위 사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족들을 학살하며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그들을 대체 왜 부르냐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밀 서신을 보여 주자마자 사색이 되며 황급히 그들을 부르기 위해 뛰어갔다.
* * *
‘마왕’이라는 단어 하나에 주력군의 수뇌부가 혼란에 휩싸일 때, 제국의 수도는 다른 일로 혼란에 빠졌다.
“폐하, 아니 됩니다.”
대전 안에서 모두가 부복하며 카리엘의 결정을 반대하는 대신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번만큼은 반론을 받지 않는다. 동생들을 불러들여.”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신들에게 명했다.
“내가 직접 동대륙에 넘어가야겠다.”
카리엘의 결정에 대신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