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3. 보급선을 지켜라! (3)
만약을 가정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위정자라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보급선 방어 작전이 실패한다면 제국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1. 보급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것.
2. 방어에 투입된 병력이 소모되는 것.
3. 주력군이 후방을 신경 써야 된다는 것.
세 가지 전부 뼈아프지만 가장 큰 건 그림자의 전멸이다.
그림자가 전멸한다는 것은 이그니트가 정보망을 새로 짜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될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렇기에 반드시 이겨야 했다.
반대로 로만 입장에서도 이번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보급을 잠시라도 끊어 놓고 전쟁을 장기화해야만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로만 역시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간 대계를 위해 만들어 놓은 미래의 힘을 앞으로 끌어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벌써 네 번째인가?”
검은 달의 수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6단계에 이른 무인이었지만 자신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버틴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비록 두 명의 무인과 함께 자신을 상대하는 것이지만 일단 버텨 내고는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밤낮으로 싸운 것이 벌써 네 번째.
그동안 타리온은 검은 달의 수장을 상대로 그럭저럭 버텨 나가고 있었다.
“마스터가 되지 못한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군.”
검은 달의 수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는 마스터가 되지 못했어도 막강한 상대였다.
그가 직접 부릴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산아귀부터 온몸에 피어나 아귀 형상을 이루었고, 검에는 마력까지 맺혀 있었다.
세 가지의 힘 하나하나만으로 막강한데 이 모든 걸 한 사람이 다루고 있었다.
물론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마력 숙성법과 정제법을 같이 익힌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둘 다 마스터의 경계에 설 정도로 강한 자들이 없었을 뿐이다. 대륙 역사를 둘러봐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리라.
그렇기에 타리온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부하들과 함께 검은 달의 수장을 상대했다. 검은 달보다 그림자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을 이용한 것이다.
거기다 산 아귀 같은 경우 카리엘이 타리온을 걱정하며 바리바리 싸 준 마도구 덕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시간벌이인가?’
속으로 중얼거린 타리온이 2개의 검을 들어 올렸다.
카리엘이 준 마도구는 거의 다 박살 난 상황. 이제는 그림자들과 자신만으로 저 괴물을 붙잡아 두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 막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주변에 검은 마력의 파장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더 시간을 끌면 위험하겠군.’
검은 달의 수장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힘을 끌어 올렸다.
벌써 네 번째 만난 그림자의 수장은 처음과 다르게 고유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지의 무인과의 전투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벽을 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극한까지 단련된 검은 달의 수장이 전개하는 고유 기술을 직접 상대해 본 것이 컸다.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이런 마력 운용도 가능한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건가?’
이 모든 것이 타리온에게 경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견고한 마스터란 성벽을 넘으려 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은 아니었다.
진즉 마스터에 이르렀어도 되었을 자신이건만 여전히 벽은 견고했다.
모든 부분에서 타리온보다 우위에 있건만 검은 달의 수장의 벽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렇게 중얼거린 검은 달의 수장이 검을 들어 올렸다.
조금 발전했다고 상대가 마스터의 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기연 한 번으로 넘을 수 있었다면 자신은 진즉에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은 아귀가 두 그림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직접 마무리 짓는다.’
거대한 아귀가 기지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두 그림자가 아귀를 향해 달려드는 동안 타리온과 검은 달의 수장은 말없이 대치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검은 달의 수장이었다.
월식
검은 달의 수장이 가장 고유 기술.
6단계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의 고유한 기술은 사방으로 퍼진 검은 참격 속에서 강력한 찌르기를 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방어하는 타리온.
주변에 퍼진 검은 마력 파장에서 수천 개의 암기가 되어 검은 참격들을 박살 냈다.
동시에 환영처럼 흩어지는 타리온의 신형.
그림자 세상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 기술을 검은 달의 수장과 싸우면서 업그레이드한 타리온의 새로운 고유 기술.
적어도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무적과도 같은 힘을 가졌다.
‘이젠 나보다 약간 우위인가?’
자신보다 약했던 타리온이 이제는 검술만큼은 약간 우위에 이르자 검은 달의 수장이 그 즉시 마력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귀 형상이 나타나면서 타리온의 세상을 먹어 치워 나갔다.
쾅! 쾅!
검을 휘두를 때마다 타리온의 검은 마력들이 터져 나가고, 그 위를 수십 개의 검은 참격이 채워 나갔다.
압도적인 무위.
마스터라 할지라도 절대 경시할 수 없는 무위였건만 타리온은 버텨 냈다.
그림자를 넘나들듯 엄청난 속도로 참격들을 피해 내고, 심지어 환영을 만들어 검은 달의 수장의 눈을 현혹했다.
“…….”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더 놔둔다면 그림자의 수장이 마스터의 벽을 넘을 거라는 것을.
상대가 벽을 넘는 순간 위험해지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이제껏 압도했던 상대에게 압도당한다?
이만한 굴욕은 없으리라.
“그것만큼은 안 된다!”
그렇게 외친 검은 달의 수장이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지금까지 정석대로 움직였던 것을 버리고 흉포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자신이 상처 입거나 목숨이 위험하질 수도 있는 루트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상대방을 보면서도 타리온의 눈은 당황하기는커녕 더 침착하게 변했다.
‘보인다.’
더 빠르고 흉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검격이 어떻게 날아들지 전부 보였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이들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타리온은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그대로 완벽한 자세를 만들면서 검은 달의 수장이 만들어 낸 공격들을 부숴 나갔다.
마침내 모든 것을 박살 낸 타리온의 검이 검은 달의 수장에게 날아드는 순간 그의 사고가 가속화되어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지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타리온의 검을 쳐 냈다.
검은 달의 수장은 이 생소한 감각이 익숙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다른 천재성으로 가파른 성장을 이룬 그였지만 마스터의 벽만큼은 여전히 견고했다.
검이 안되었기에 투술을 익혔으며 그것 역시 극의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벽을 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의 계산하에 이뤄지고 그 계산에 따라 실력이 상승했다. 그런 그조차 견고히 막아섰던 벽이 고작 이런 본능적인 움직임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인정하마. 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그렇게 생각하며 이성을 버리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2개의 힘이 타리온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으로 압박해 왔지만 그림자 세상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오히려 더 견고하게 변하며 검은 달의 수장을 압박해 왔다.
벽을 허물기 시작한 검은 달의 수장의 매서운 공격이었건만 어째서 완벽하게 틀어막힌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러…….”
2개의 검에 완벽하게 형상화된 검은 형상의 검.
검은 달의 수장이 막강하다 한들 완벽하게 벽을 넘어선 마스터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쿨럭!”
“……운이 좋았군.”
피를 토하는 검은 달의 수장을 보면서 타리온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마스터가 되었다면 죽는 건 그였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검은 달의 수장 역시 마스터에 거의 도달했으니까.
“좋은 승부였소.”
그렇게 말한 타리온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달의 수장 주위로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언데드? 아니…… 이 기운은…….”
“……죽을 자리는 아니었나?”
검은 달의 수장이 자신의 주변에 나타난 불타는 해골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사기를 내뿜으며 이지가 없는 것이 특징인 언데드와 달리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해골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숙련된 전사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러워했던 것도 잠시, 타리온이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면서 검은 달의 수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늦었다.”
검은 달의 수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사방에서 거대한 불타는 해골 거인들이 나타났다.
과거 작은 언덕만 했다고 알려진 거인의 뼈들이 활활 타오르는 상태로 나타나 협곡을 무너뜨리며 이그니트의 임시 거점을 무너뜨리려 다가왔다.
“이게 대체…….”
“후속 부대를 기다리던 게 너희들뿐이라고 생각했나?”
검은 달의 수장이 하는 말을 보면서 이를 악문 타리온이 전력으로 검에 오러를 불어 넣었다.
아직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정한 오러였음에도 파괴력은 막강했다.
어떻게든 검은 달의 수장을 지키려는 해골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자신을 공격해 오는 거대한 해골의 도끼와 검을 박살 냈다.
하지만 로만이 소환한 거인 해골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마스터에 이른 타리온이지만 이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해골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그는 남은 존재들이 임시 거점을 박살 내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번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승리를 확신한 검은 달의 수장이 웃으면서 검은 달들을 소집했다.
수장끼리의 승부에선 패배했을지 몰라도 전쟁에선 승리했다.
그 사실에 만족한 검은 달의 수장이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부하가 다가와 뭐라 속삭이는 것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휘둘린 거대한 검이 임시 거점을 공격하려는 해골 거인들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검은 달들이 황급히 몸을 뺐다.
물론 그걸 가만 두고 볼 타리온이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몸을 날렸고, 검의 주인 역시 불타는 해골들을 박살 내면서 이 사태를 만들어 낸 붉은 터번을 두른 자들까지 찾아내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검은 달의 수장은 놓쳤다.
“아켈리오 경.”
모든 전투가 끝나자 그제야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생각한 타리온이 표정을 구기면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아켈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을 지켜야 할 황궁 기사단장이 어찌 여기 있단 말인가?
“자네…….”
타리온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아켈리오.
하지만 타리온에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찌 여기 계시는 겁니까!”
“폐하의 명이었네.”
“하…… 월크셔 공작 한 명만으로는…….”
“그도 왔네.”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는 임시 거점을 박살 내고 있는 다른 곳들을 막아 내면서 이곳으로 오고 있네.”
“그럼 수도에는…….”
타리온의 물음에 아켈리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 전원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렇다는 건 전처럼 수도를 기습 공격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경!”
“이유가 있었네. 후…… 그보다 상황을 정리하지.”
아켈리오의 말에 주변을 바라보던 타리온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 작전으로 엄청난 숫자의 그림자들이 죽었다.
하지만 검은 달 역시 피해가 엄청났다.
서로가 모든 것을 걸고 싸웠기에 많은 사상자가 난 것이다.
그럼 그 결과는 어떨까?
“반쪽짜리 승리인가?”
타리온이 표정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이번 전쟁은 이그니트의 승리이긴 했다.
다만 임시 거점들이 많이 부서졌기에 정상적인 보급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이 다급한 주력군 입장에서는 큰 타격을 입은 셈.
“이 상태로는 다음 공격을 막긴 어렵겠군요.”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곧 지원군들이 올 걸세. 가장 빠른 비공선들만 모아서 소수 병력들이 먼저 도착할 것이니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
아켈리오의 말에 타리온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반쯤 박살 낸 기지를 바라보았다.
처참한 형태로 변한 기지였지만 어찌 되었든 보급선은 지켜 내었다.
카리엘이 보낸 지원군들에 의해 보급선은 더 견고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북부의 전쟁 역시 더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을 터.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거칠었던 전투의 흔적 속에서 임시 거점의 정리가 끝났다.
넘버링을 받은 그림자들과 다수의 그림자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점을 지키던 병력들과 기사들 역시 다수가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타리온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의 지휘관으로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당당히 말했다.
“오늘 우리는 동료들의 희생을 통해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라.”
그렇게 말하며 타리온이 그림자들과 살아남은 병력을 향해 말했다.
“우리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