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3. 보급선을 지켜라!
카리엘이 명한 대로 로만을 제외한 동대륙의 국가들에 서신이 전해졌다.
「이그니트는 마족들을 명하는 데 집중하겠다.」
이 의미는 로만을 막는 건 연맹국들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당연하게도 연맹국들은 이그니트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이러한 결정을 욕하던 연맹국들도 뒤이어 전해진 서신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왕 소환이 임박한 것 같음. 마왕의 최소 무력은 그랜드 마스터급 이상으로 추정.」
전설 속의 그랜드 마스터.
그런 존재가 소환된다?
그 순간 이 전쟁은 희망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연맹국들은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이그니트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마족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진심을 봤으니까.
「마침내 무너진 거인의 요새. 이그니트의 다음 목적지는 로만의 수도가 아닌 마계의 게이트」
「이그니트 전력이 70%가 동대륙을 넘어갔다」
「이그니트의 군부대신 : 국토방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 두고 전부 로만의 북부 지역으로 파견할 생각」
사실상 이그니트가 운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병력을 마족들을 쓸어버리는 데 집중시켰다.
그러자 최대한 제국의 진격을 낮추려던 흑마법사들과 마인들 역시 전원 북쪽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상황은?”
“큰 문제는 없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보급선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에게 타리온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남부에서 확인한 결과입니다.”
타리온에게서 보고서를 건네받은 카리엘은 곧바로 그 내용을 살폈다.
「신성력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음. 다만 불의 사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제들의 신성력은 효과가 작음.」
보고서를 본 카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효과가 있군.”
“예.”
자신이 예상했던 것처럼 지옥의 존재들에게도 신성력이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으니 결과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계획들을 하나둘 실행할 때가 되었다.
“예정대로 악마 사냥꾼들을 보급선에 투입해.”
“예.”
“북부에 투입된 불의 사제들은 전부 보급선으로 모으라고 해. 마족들을 상대하는 건 다른 사제들에게 일임한다.”
“알겠습니다.”
예정되었던 계획들이 하나둘 진행되었다.
보급선을 지키기 위해 그림자들 대부분이 투입되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악마 사냥꾼들과 불의 사제들까지 대거 투입했다.
하지만 카리엘은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수도 방위군의 기사단 일부도 빼서 투입해.”
“폐하.”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마 사냥꾼과 불의 사제들만으로도 막을 수 있습니다.”
“알아. 그래도 피해는 최소화해야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달의 강함을 알고 있는 카리엘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본 보급선의 병력에 중앙군까지 투입했다.
그런데 수도 방위군의 기사단 일부도 파견한단다.
그렇다는 건 검은 달의 습격을 막기 위해 그림자와 악마 사냥꾼, 불의 사제, 그리고 중앙군과 수도 방위 기사단이 힘을 합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림자들을 못 믿는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카리엘이 그림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타리온을 비롯한 모든 그림자들이 잘 알고 있었다.
항상 뒤에서 고생하는 그림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하기 위해 정보부에 통합시켰다. 비록 요원 개개인의 신상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서면으로나마 그들을 기록하고 온당한 대우를 해 주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기부터 복지까지 모든 특수부대를 통틀어 최상으로 지원받았다.
그렇기에 카리엘에 대한 그림자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그런 존재가 자신들을 살리고자 무리를 하고 있다.
그림자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현실에 모든 그림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림자 출신인 타리온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폐하.”
“응?”
“소신도 보내 주십시오.”
자신을 바라보는 타리온의 눈빛.
그곳에 깃든 단호함을 보자 카리엘은 허락해 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 가서 그림자들의 강함을 보여 주고 와.”
“명을 받듭니다.”
체면을 구긴 그림자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타리온이 직접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림자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반드시 로만의 검은 달을 이기고 최강의 특수부대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 * *
그렇게 타리온을 마지막으로 모든 그림자들이 동부로 떠나자 이그니트의 군대 역시 거인의 요새를 거점 삼아 북진하기 시작했다.
주력군이 서서히 북상을 시작하고 뒤이어 온 군대들은 거인의 요새를 중심으로 보급선을 만들며 천천히 올라갔다.
“평화롭군.”
“로만도 우리를 막기엔 어렵다는 걸 알 테니까.”
태양검의 말에 옆에 있던 클레타 공작이 말했다.
처음엔 굴욕감을 감추고 임했던 전쟁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감정은 다소 사라진 상태였다.
흑마법사와 마족들 그리고 지옥의 생명체라 불리는 존재까지 등장한 판에 과거의 일이 중요할 리가 없었다.
조국이 부활할 희망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그건 글렀다. 이미 남부 왕국들의 국민들은 스스로를 진짜 ‘제국민’이 되었다며 환호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스터만 일곱 명이다. 이런 군대를 상대로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공격하지는 않겠지.”
피레스 공작의 말에 근방에 있던 마스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보급선이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마스터 두 명으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카리엘은 오히려 주력군이 더 빠르게 북부로 돌진하라 명했다. 마스터 두 명이 빠진다면 마군단장과 흑마법사, 마인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발목이 잡힐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데이비어 공작과 시카리오 후작이 혹시라도 있을 로만의 공습을 견제하고, 나머지는 빠르게 북진했다.
글련 역시 별동대를 만들어 흑마법사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 때문인지 이그니트의 주력군은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빠르게 게이트가 열리는 지점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로만의 요새 3개를 점령!」
「보름 만에 로만의 북부에 도착. 북쪽에 있던 제국 북부군과 합류」
「마계 게이트가 있는 지점으로 이동 중. 유목 민족 연합도 이에 합류할 예정」
마침내 이그니트 군대가 로만의 북부 지역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여태까지 숨어 있던 마족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로만 역시 이반 형제가 뒤를 치기 위해 로만의 주력군 일부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걸 데이비어 공작과 시카리오 후작이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로만과 마족의 군대를 양쪽으로 두고 진격을 멈춘 이그니트의 주력군.
하지만 그 틈을 타 유목 민족의 부대가 마족들의 후방을 노렸다.
서로가 뒤를 내주며 움직이지 못하는 묘한 대치 상황이 일어날 때, 그 틈을 타 북부군을 갉아먹으려는 흑마법사들이 습격했다.
「제국의 신성이 흑마법사들을 물리치다!」
대륙 전체에 퍼지는 글렌의 위용.
마치 흑마법사들이 움직이길 기다렸다는 듯 글렌의 별동대가 북부군에 나타나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그러자 상황이 아주 조금이나마 이그니트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로만과 이그니트 양쪽에서 애매한 대치 상황만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보습선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글렌이 거인의 산맥 인근에서 남쪽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늘어진 보급선.
이그니트의 주력군이 움직이는 건 보급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보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쟁하는 건 필패.’
이걸 알고 있기에 모든 지휘관들이 보급선에서의 전투 결과를 기다렸다.
주요 거점들을 설치하고 서로 연결하는 작업을 끝낸 이후, 마침내 거인의 요새에서 막대한 양의 물자들이 북부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가?”
수도에서 물자가 움직였다는 보고를 받은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잘 막아 내야 할 텐데…….”
카리엘이 손에 깍지를 끼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시종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명하신 것은 조치했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마도물품 공급체 차질이 일어날 거야.”
“그에 관해선 내부대신과 재무대신이 일을 처리 중입니다. 오늘 내로 보고를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
시종장의 보고에 대답한 카리엘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 표정을 본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분간 안전을 위해 황제의 궁 안에서만 계셔야 하옵니다.”
“……알겠다.”
카리엘의 대답에 시종장이 매의 눈으로 한 번 더 카리엘을 바라본 후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서 한동안 건물 밖으로 나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은 기분은 한결 나았다.
비록 황궁 내의 기사들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행동반경도 줄어들었고, 마법사들도 대거 차출되어 마도 물품 생산에 차질을 빚었지만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것보단 나았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사실상 현재의 카리엘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한 셈이다.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마족들만 처리하면 직접 움직여야겠지.”
-그래. 이제 쫄지 않아도 되긴 했어.
카리엘의 중얼거림에 수르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신하들은 카리엘을 여전히 병약한 존재라 여기며 과보호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카리엘은 강했다.
-흑마법사의 수장인가? 그 녀석이 나타나도 널 죽이긴 쉽지 않을걸.
“그래. 이 정도 힘이라면 지옥의 존재들과 싸울 때도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겠지.”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피식 웃다가 말했다.
고집불통인 황궁 최고의 기사가 고집을 꺾고 카리엘의 명에 따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카리엘이 자신의 힘의 최대치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알지? 아직 가름에게 인정받을 수준은 멀었다는 거.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수도에서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전력을 비밀리에 보낼 무렵, 마침내 보급선에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나타났다.
“전부 폭발시켜라.”
“예.”
검은 복면을 쓴 자의 명령에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일제히 임시 거점에 쌓인 물자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향해 화살과 암기가 날아들었다.
카가가강!
“……그림자들인가?”
이그니트의 그림자들이 나타나자 습격을 명했던 검은 달의 수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실력으로 안 되니 물량이라…….”
“꼬우면 너희들도 더 많이 몰려오든가.”
그림자의 말에 검은 달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렇게 말한 순간 복면 안의 두 눈이 붉게 빛나면서 주변에 잿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먹어 치워라.”
‘산아귀’라 명명된 수십 개의 입이 달린 괴물들이 일제히 그림자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산아귀들을 가로막은 붉은 장막.
신성한 불길이 나타난 순간, 붉은 화살들이 일제히 검은 달에게 날아들었다.
치지지지직!
“신성력? 이 화살은 악마 사냥꾼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검은 달의 사내가 이를 바득 갈았다. 예상과 달리 이번 보급선 습격 작전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