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40화 (14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2. 아픈데 또 찌르기! (3)

남부 연합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본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 수 없는 존재들?”

카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타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또 다른 보고서를 올렸다.

“거대한 몸체에 수십 개의 입이 달린 괴물이라…….”

타리온이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본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서에는 상세하세 내용에 묘사되어 있었고, 그림 한 장이 그려져 있었다. 화가의 그림처럼 상세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있을 정도로는 묘사가 되어 있었다.

‘미리엘을 고생시켰던 그놈들과 비슷하군.’

전생에 수없이 몰려왔던 지옥의 군대.

그들 중 하나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시종장.”

“예.”

“이들에 대해 조사해 봐.”

“사서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로만은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무기라면 우리들에게 사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나?”

로만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이그니트다.

그런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단을 이렇게 드러낸다?

“두 가지군. 우리의 의도를 안 이상 그 무기를 다른 쪽에 집중하려는 것이거나, 숨겨 놓은 힘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견제할 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카리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타리온이 대답했다.

“두 가지 전부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가지 다?”

“예.”

카리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한 타리온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분명 지금 드러낸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그니트가 자신들을 치러 오지 않는 것이 확인된 이상 그 무기를 이쪽에 사용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이그니트가 로만의 함정을 감수하고 무리해서 공격하러 오지는 않을 게 확실한 이상, 이 전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써먹어야 했다.

그렇다면 마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이그니트보단 동대륙의 연합군에 훨씬 잘 먹힐 게 뻔하니, 로만은 그쪽에 자신들의 숨겨 놓은 무기를 사용할 생각인 것이다.

“우리 대신 연합군에 숨겨 놓은 힘을 사용하겠다?”

“예.”

타리온의 답에 카리엘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로만 입장에서 이그니트의 전력을 갉아먹을 절호의 기회야.”

길어진 보급로, 심지어 보급선이 안정화되지도 못한 상황.

적국 입장에서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기는 건 호구로밖에 보이지 않는 선택이었다.

당연하게도 불안정한 보급선을 귀찮게 물고 늘어져야 했다.

이그니트가 로만의 아픈 곳을 헤집어 놓았으니 반대로 이번엔 로만이 이그니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차례였다.

“이것 역시 놓치지 않을 겁니다."

“뭐로 우릴 견제할 생각이지?”

“검은 달입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타리온이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숫자가 부족해. 분명 그들은 정예지만 극소수의 정예들로 군대를 막을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로만에는 이그니트의 그림자들보다 정예 조직이 있다.’

매일같이 제국의 중요한 보고를 전부 받는 카리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로만의 ‘검은 달’은 제국의 ‘그림자’보다 한 수 위였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그니트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동대륙의 연합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훈련량을 자랑하는 정예군이기 때문이다.

“시기상 검은 달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산드리아에 다녀간 이후 지옥의 존재들이 나타났습니다.”

“넌 검은 달이 지옥의 존재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예.”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말이 안 돼. 그럼 산드리아에서 넘어온 자들이 설명이 안 돼.”

“폐하, 검은 달의 인원 중에 그 부족 출신이 있는 걸 감안하셔야 합니다.”

타리온의 설명에 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현 황제가 산드리아 부족들과 연관이 있다면 그의 직속 단체들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실로 오랜만에 받아 보는 지적.

타리온이 이걸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림자들 역시 그렇게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의 가족 중에는 유난히 힘이 세거나 은신에 특화된 이들이 있다. 이들의 자손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기에 이들의 가족은 대를 이어 그림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검은 달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었고, 거기에다 산드리아의 부족들과 연관이 있다면 그 부족의 출신을 검은 달에 지속적으로 영입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림자들을 전부 동원해서 보급선을 지켜야겠네?”

“……예.”

현재 동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그림자들을 전부 불러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는 건 사실상 연합군과 로만의 정보 대부분을 포기하고 보급선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검은 달이 지옥의 존재들을 다룬다고 가정하면…… 현재 그림자와 검은 달의 전력 차가 정확히 어느 정도지?”

“알 수 없습니다.”

“남부에 나타난 괴물들을 다룬다고 가정하면?”

“40% 미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반도 안 된다?”

“송구합니다.”

“그럼 비밀 수호대까지 가담한다면?”

“그래도 70%에는 못 미칠 겁니다.”

“차이가 크네.”

타리온의 솔직한 대답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보부의 특수부대 대부분을 집어삼켜 더욱 강력해진 그림자들이었으나 그런 그들조차 검은 달에겐 다소 처지는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검은 달이 지옥의 존재들까지 부릴 수 있게 된다면 재앙이나 다름없어진다.

“여기서 더 강해진다라…….”

카리엘이 처음 그림자에게 받았던 보고서를 서랍에서 꺼내 읽었다.

「수십 명 이상의 5단계급 무인들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수장은 최소 6단계 이상, 어쩌면 마스터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

처음 그림자에게 검은 달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땐 충격적이었다.

로만에게도 그림자와 같은 조직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차이 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나마 검은 달에게 대적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정보부의 모든 특수부대를 그림자 하나로 통합해 버리고 정보부 요원 중 가장 쓸 만한 요원들을 특급 요원으로 만들어 넘버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최소 ‘검은 달’과 싸울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한 이들만 받을 수 있는 넘버링.

아직은 그 숫자가 극히 적었지만 언젠가는 검은 달에 비견될 조직으로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옥의 존재들까지 다룰 수 있다면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비밀 수호대나 그림자들로는 한계가 있어.’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여러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1. 친위대를 확장시킨다.

2. 악마 사냥꾼처럼 특화된 부대를 더 만든다.

당장 떠올린 것 중 쓸 만한 건 이 두 가지.

하지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이건 뒤로 미뤄 두고.’

잡념을 떨쳐 내고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로만이 지옥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드러낸 건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로만의 황제는 카리엘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연합군을 지킬 것이냐, 마족군을 박살 낼 것이냐.

“굴욕적이네.”

카리엘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타리온이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떤 걸 선택해도 손해는 생긴다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연합군을 지키자니 마족들에게 시간을 더 주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마족들에게 집중하자니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연맹국들에 서신을 보내라. 우린 마족을 친다.”

카리엘의 결정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로만이 숨긴 전력 역시 두려운 것이 사실이나 마왕보다는 아니었다.

전생에 겪어 본 마왕의 강함은 막강했다.

그랜드 마스터인 글렌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존재.

제국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글렌이 아니었다면 마왕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글렌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지 않는 한 마왕을 막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은 기존의 작전을 밀어붙였다.

“활동 중인 모든 그림자들을 불러들여.”

“국내외 전부 말입니까?”

“그래.”

카리엘은 결단을 내렸다.

상대의 특수부대가 강하다면 자신들은 물량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짜야만 했다.

“비밀 수호대도 불러들입니까?”

“아니. 지금부터 모든 비밀 수호대는 산드리아에 집중해.”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은 반대로 생각했다.

로만과 산드리아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게 확실해도 지옥의 존재까지 모습을 드러낸 이상 무조건 산드리아를 견제해야 했다.

“연합국 측에 대한 정보망은…….”

“외무부에 전부 일임해. 지금부터 그림자는 보급망을 지키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 비밀 수호대 역시 산드리아에만 집중시킬 거야.”

단호한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오나 그렇게 되면 유목 민족에 대한 지원은…….”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주요 보고서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북부 혹한의 협곡에 만들어진 혹한의 길.

악마 사냥꾼들의 희생과 북부군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그 길이 5할 이상 완성되었다는 보고서였다.

“골란에 대한 지원 역시 북부군에 이관해.”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자 몇 명을 빼서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부로 보내서 이걸 확인해.”

카리엘은 노트를 쭉 찢어서 타리온에게 전했다.

「신성력이 지옥의 존재들에게도 상성인지 확인할 것. 특히 불의 신전의 신관을 반드시 데려가 확인하도록.」

“최대한 빨리 결과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만약 지옥의 존재들도 신성력과 상성이 있다면 북부에서 활약하는 악마 사냥꾼들까지 끌어와 보급선을 지키는 데 투입할 생각이었다.

카리엘이 이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신은 몰라도 이 불과 관련된 건 확실히 지옥의 존재와 무슨 연관이 있을 거야.’

이런 카리엘의 생각을 읽었는지 수르트가 나타났다.

-네 생각대로 지옥의 존재들과 네가 상성일지도 모르겠어.

“……그럴까?”

-초대 황제란 놈들이 지옥 놈들을 봉인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거 같거든.

수르트가 과거의 지옥을 떠올려 보면서 말했다.

죽음의 군단.

그들은 무스펠의 주인이었던 수르트조차 꺼림칙하게 생각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신화시대가 멸망한 이후 지옥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초대 황제의 힘만으로 지옥의 군대를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그니트의 초대 황제가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영웅이라 하더라도 기록된 것처럼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건 카리엘이 품고 있는 불이 지옥과 상성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불이 상성이라면…….”

-네 생각대로 너를 성자로 모시는 신관 나부랭이들의 힘도 상성을 띤다는 뜻이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네."

불의 축복을 받은 악마 사냥꾼들과 그림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검은 달을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그렇게만 된다면 로만의 황제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게 된다.

“어디 한번 찔러 봐. 되받아쳐 줄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눈을 빛냈다.

로만이 이그니트의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카리엘은 이것을 되받아칠 계획을 세웠다.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승부의 향방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할 것임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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