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2. 아픈데 또 찌르기!
현재 로만에게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일까?
누가 뭐라 해도 마계 게이트를 여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 타격을 입는 순간 대계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미치겠군.”
“누가 저 미친놈을 좀 막아 봐!”
이그니트의 그림자로 인해서 돌아 버린 마군단장이 날뛰자 그것을 막기 위해 흑마법사들이 투입되었다.
마족들은 자신들의 군단장이 무서워서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니 그들만으로 마군단장이 날뛰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완전히 돌아 버린 마군단장을 그들이 막을 수 있을까?
-음머어어어!
소 울음소리를 내면서 날뛰는 마군단장을 흑마법사들이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군의 진형이 아닌 적이 있는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뿐.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어딨나! 어딨어!
목표로 했던 혹한의 협곡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자 마군단장의 분노가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이 새끼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내뺀 건가?”
“하! 이런 미친……. 이걸 의도했다고?”
거인의 산맥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그림자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걸 의도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어떡하지?”
“그러게…….”
거인의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을 학살하면서 그림자들을 찾고 있는 마군단장.
이대로라면 여기에 그림자들이 없다는 것을 곧 눈치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혹한의 요새를 친다.
2. 다른 곳을 눈길을 돌린다.
“지금 혹한의 협곡을 건너는 건…….”
“무리지.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이그니트가 어떤 함정을 쳐 놨을지도 알 수가 없어.”
이그니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흑마법사들이지만 그래서 더 잘 알았다.
현 황제라면 마군단장이 넘어오는 것까지 대비해 놨으리라.
그렇기에 더 조심해야 했다.
“여길 넘어가는 건 무리야.”
“그럼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하는데…….”
마군단장을 막기 위해 몰려온 흑마법사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북쪽을 바라보았다.
동맹 세력인 로만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곳은 북쪽뿐이다.
“북쪽으로 보내지.”
“그럼 로만이 더 곤란해질 텐데?”
“어차피 마왕님만 나오면 끝나는 판 아닌가?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마계 게이트를 확장시키는 거야.”
“으음…… 그래도 북쪽까지 가세하면 이곳의 방어가 더 어려워질 텐데.”
다들 곤란해할 때였다.
의견이 갈리면서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는 동안에도 마군단장의 분노는 더 쌓여만 갔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검은 안개와 함께 나타난 마법사가 다수의 흑마법사들을 향해 다가왔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마스터께서 명령을 내려 주셨다. 지금 당장 마군단장을 북쪽으로 안내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3장로가 직접 명령을 내리러 오자 모든 이들이 마군단장을 북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요새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흑마법사의 수장을 제외한 모든 장로급은 현재 마계 게이트 확장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3장로가 직접 움직였다는 건 그만큼 마군단장의 폭주가 심상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괜히 제국으로 가서 뒈지지 않도록 잘 몰고 가도록.”
“예.”
3장로가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마군단장을 설득했다.
“그림자들이 북부로 움직인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유목 민족을 끌어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유목 민족들을 박살 내면 되겠군.
“예. 마계 게이트가 더 시급하니 일단 국경선 근처만 박살 내시지요. 일단 그림자들의 의도만 박살 내는 선에 멈추고 마족들에게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3장로의 설득에 마군단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림자들에게 직접 복수하고 싶은 것은 알겠으나 뭐가 우선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쯧!
“일단 그림자들의 의도를 박살 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작전을 망가뜨린 것 아닙니까? 어쩌면 그들의 작전이 망가졌으니 우리가 입은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봐도 될 겁니다.”
3장로의 설득에 마군단장이 고민하더니 자리를 일어났다.
거인의 산맥에 그림자들이 없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 여기서 더 죽치고 앉아 봐야 얻을 건 없었다.
한차례 분노가 가라앉고 나니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된 마군단장이 결단을 내렸다.
-북쪽으로 간다.
마군단장의 결정에 흑마법사들과 마족들 다수가 그 뒤를 따랐다.
비록 흥분하면 앞으로 뛰쳐나가면 ‘용장’이라 불리는 마군단장이지만 오랜 세월 전장을 누볐던 그였기에 이대로 단독으로 산맥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흥분하면 또 까먹고 돌진할 가능성이 높기에 빠른 결정과 함께 곧바로 북쪽으로 움직였다.
“괴물은 괴물이군요.”
“그러니 잘 컨트롤해야지. 조금만 엇나가도 대계가 어그러진다.”
한 흑마법사의 말에 3장로가 긴장한 어투로 말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저 마군단장이 왜 마계 게이트 확장에 투입되었겠는가?
분명 황소 뿔을 가진 마군단장은 거인의 길에 있는 마군단장보다 훨씬 강력했다. 하지만 저 급한 성정과 단순함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다.
콰앙!
황소 뿔로 만들어진 창이 휘둘릴 때마다 주변이 박살 나면서 저항하는 기마병들을 날려 버렸다.
마기조차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완력으로 휘두른 공격에 박살 나는 기마병.
그래도 오랫동안 강자로 군림했던 유목 민족들이기에 마력을 이용해 강력한 돌진기를 사용했으나 그 역시 마기를 사용하자마자 가로막혔다.
그 이후로는 그저 단순한 학살뿐이었다.
“끝나 가는군.”
“또 이동하는 겁니까?”
“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적어도 이 일대를 전부 쓸어버리게 두는 수밖에 없다.”
3장로의 말에 옆에 있던 흑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유목 민족마저 적이 되겠군요.”
“어차피 마왕님을 섬기는 순간 인류는 적이었다."
그렇게 말한 3장로가 흑마법사의 어깨를 두드린 후,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 * *
마군단장의 공격으로 동대륙의 북쪽 지역이 초토화되기 시작하자 이 사실이 동대륙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유목 민족들을 중심으로 마족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카리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골란이 움직이는군.”
“예.”
마족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유목 민족들.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골란이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마족들과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골란으로 모여라!”
골란의 족장 바투 골란이 분노하는 부족들을 한데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골란의 깃발 아래 모이기 위해 말을 타고 대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이 되는 부족들은 굳이 골란으로 모이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골란에 모이면 그의 아래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골란이 이때를 노려서 유목 민족을 통합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몇몇 세력이 강한 부족들이 자신들끼리 동맹을 맺어서 대항하고자 했다.
바로 그때, 한 가지 발표가 이어졌다.
「골란 부족! 인류 연맹에 가입 절차를 밟는다!」
마족들을 대항하기 위한 세력 인류 연맹.
그곳에 골란 부족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발표되기 무섭게 순식간에 동대륙 전체에 퍼졌고, 결국 이 소식은 북부의 평원 지대로까지 퍼져 나갔다.
가뜩이나 유목 민족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골란 부족인데 그들이 인류 연맹에 가입까지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남은 부족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국은 인류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한 골란의 결정을 존중한다. 지금부터 골란이 마족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이그니트 황제의 발표.
골란을 통해 유목 민족 전체를 지원하겠다는 서대륙 황제의 발표에 아직까지도 망설이던 유목 민족들이 골란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위해 말에 올라탔다.
물론 이때까지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를 이용하기 위한 서대륙의 음모다!”
“기마민족을 방패막이로 삼을 거다!”
“골란은 위대한 우리의 긍지를 돈에 팔아먹은 자다!”
제대로 지원해 주기는커녕, 그저 마족들과 싸울 방패막이로 사용할 것이라는 의견들.
마지막까지 골란 부족이 통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세력들의 외침.
하지만 이런 그들의 주장은 곧 힘을 잃어버렸다.
“어마어마하군.”
“그러게.”
남쪽을 통해 들어오는 이그니트와 남부왕국들의 지원 물자.
그것을 받은 부족들이 순식간에 질 좋은 무기를 들고 평원을 누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골란 부족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골란의 족장 바투가 외쳤다.
“서쪽의 산맥 지형까지 점령해야 한다! 이그니트가 더 큰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들의 지원을 받고자 한다면 모여라! 우리는 지금부터 서쪽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바투의 외침에 골란 부족으로 모인 모든 이들이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일제히 서쪽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남은 부족민들은 남쪽으로 내려보내 막대한 지원물자를 통해 새로운 강병들을 키워 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골란이 통일하는 것을 반대하던 부족들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둘 골란의 부대에 모이면서 유목 민족 전체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결국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 버렸군.”
로만의 황제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자 그의 앞에 있는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대들의 잘못은 아니지. 애초에 미치광이가 날뛰는 걸 어떻게 막겠나?”
그렇게 말한 로만의 황제가 신하들에게 명했다.
“그대들은 마지막을 준비하라. 짐 역시 그때를 대비해 움직일 것이니.”
한상 권태로운 표정으로 황좌에 앉아 있던 로만의 황제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대신들 중에 자신들의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그게 마족들과의 계약인가 싶었지만, 전쟁이 진행될수록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직접 준비한 ‘무언가’를 꺼내 보이기로 마음먹은 듯싶자 모두들 흥분하기 시작했다.
* * *
“로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타리온이 다급하게 카리엘에게 보고했지만 정작 보고를 듣는 당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숨겨 놓은 패를 꺼내나?”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저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했지?”
“거인의 요새를 제외한 다른 곳들이 재빠르게 로만의 수도 인근으로 후퇴했습니다.”
“동쪽과 남쪽의 요새는 그대로지?”
“예.”
로만의 주력군 대부분을 중심부로 후퇴시켰다.
동쪽과 남쪽의 요새가 남았다지만 그곳 역시 애초에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다름없기에 사실상 중앙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휘관 입장에선 정말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한 것이다.
“산드리아 쪽은?”
“안 그래도 보고드리려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종장이 한 장의 보고서를 올렸다.
“몇몇 부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세력이 약한 부족들이네?”
“그렇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의 눈이 빛났다.
“수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