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50. 인류연맹 창설! (3)
카리엘과 동대륙 국가의 수장들이 모여 만든 연맹으로 인해 동대륙은 흥분했다.
그동안 반목하던 두 대륙의 수장들이 한데 모여서 회의를 하고 공공의 적을 만들어 같이 움직이기로 한 것은 분명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하필 오랫동안 동대륙의 수장으로 군림한 로만이 그 공공의 적인 탓이었다.
서대륙의 통일 국가와 동대륙의 절반에 가까운 국가들이 동맹을 맺었으니 남은 국가들 입장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부 지역의 국가들은 내부에서 첨예하게 의견 대립을 이루었다.
“인류 연맹에 가입하라!”
“가입하라!”
로만을 제외한 중부 지역의 국가들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제 인류의 적이 되어 전쟁을 치를지 모르니 그 전에 인류 연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족과 계약한 왕들이 그것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나마 그들만이었다면 반역을 저질러서라도 인류 연맹에 가입했겠지만 고위 귀족들까지 죄다 마족과 계약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었다.
어떤 국가들은 강제로 시위에 나온 국민들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평화로운 시위대였던 그들은 저항 세력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이그니트가 움직였다.
“제국에서 도움을 주신다고요?”
“그렇소. 인류를 위한 싸움을 시작하신 것이니 인류 연맹으로서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 하오.”
제국의 그림자의 제안에 동대륙의 작은 국가의 저항 세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그대들의 국왕이 마족과 계약했다는 증거요.”
그림자의 말에 저항 세력의 수장은 그가 건넨 자료를 살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솔직히 의심은 하고 있었다.
동대륙의 대다수 사람들이 중부 국가가 마족과 손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한 의심이 현실로 다가오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다른 국가들도 이런 것입니까?”
“그럴 겁니다.”
그림자의 말에 저항 세력의 수장이 이를 갈았다.
“인류 연맹은 어째서 이러한 사실을 발표하지 않은 겁니까?”
솔직히 이그니트가 발표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래선 효과가 반감된다. 가장 큰 것은 각국의 저항 세력이 이 사실을 알리고 국민들이 반란 세력에 더 가담하게 하는 것.
그로 인해 동대륙 중부 지역이 혼란에 빠지고, 그사이 제국은 로만을 공격한다.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대들의 나라가 스스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길 바라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물론 도움은 줄 것이오. 하지만 자국의 주권은 스스로 위기를 벗어났을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저희 황제 폐하의 뜻이오.”
카리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히자 저항 세력의 수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타국에 기대기만 해선 의미가 없다.
진정으로 자신들의 국가가 타락한 왕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면 스스로 들고일어나야 한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저항 세력 수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그림자 역시 고개를 숙이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원 물자는 비밀리에 이 거점으로 보름에 걸쳐 들어올 것이오.”
“알겠습니다.”
“부디 뜻한 바를 이루길…….”
그림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모습을 감췄다.
* * *
그가 있던 자리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저항 세력의 수장은 마침내 움직였다.
유구한 역사가 있는 자신들의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선 현 국왕을 몰아내야 한다는 당위성.
그것이 확보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저항 세력에는 쉽게 가담하지 못했던 이유.
그건 자신들의 국왕이 나라를 위해 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과 오랜 시간 로만과 손잡았던 역사 때문이다.
하지만 저항 세력의 발표가 터져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다행이군.”
그림자의 보고를 들으면서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저항 세력이 생겨나면서 카리엘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 주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이 정도 혼란은 어려웠을 겁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국 관료들 입장에선 급하게 가지 말고 천천히 동대륙의 중부 세력에 작전을 걸려고 했다.
준비 없이 무작정 자금을 때려 박았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엘이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았다는 것이 방금의 보고로 확인되었다.
“마족들이 수를 쓰기 전에 더 과감하게 움직여야 해.”
“예.”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안정을 중요시하는 관료들 입장에서는 보다 완벽한 작전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보고를 받으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카리엘이 보기에는 좀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요즘 행보만 보면 로만의 황제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수없이 자신을 괴롭혔던 자가 바로 현 로만의 황제였다.
영악하기로는 교황과 비슷할 정도였던 양반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렇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큰 그림 말입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는 로만의 황제라면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족들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다?
그렇다는 건 뭔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로만의 황제가 그린 큰 그림에서 볼 때 지금의 문제는 사소하다고 본 것이지.”
“자국의 명운이 걸렸음에도 말입니까?”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명운이라…….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예?”
“우리가 전력으로 공격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신. 그게 있으니까 이처럼 방관하는 것이겠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벽 쪽에 전력을 더 투입해야겠어.”
“그럴 경우 치안 공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카리엘은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자신이 세운 계획을 펜으로 쭉쭉 그었다.
“보름. 그 안에 총공격을 개시한다.”
“너무 급한 거 아닙니까? 동대륙의 중부 지역이 좀 더 여물길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로만 내에서도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타리온의 말은 타당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들은 이그니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그동안 로만이 보여 왔던 행보를 보면 반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황제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는 없지.’
시간을 끌며 웃고 있을 로만 황제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린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물었다.
“유목 민족들과의 접선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현재 동쪽 끝자락에 있는 유목 민족과의 협의는 끝났습니다. 근방의 다른 부족들 역시 마족들의 위험성에 대해선 대부분 공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골란입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에게 붙은 건 아니지?”
“예, 다만 자신들이 굳이 로만과 싸워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 골란의 수장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마족들이 나타나 주는 것이 더 좋았다.
현재 골란과 비견될 만한 부족들은 전부 로만의 국경 근처다. 그런데 하필 마족들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지역이 그 부근이었다.
“골란은 나중에. 다른 부족들에게 마족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주지시키는 것으로 충분해.”
골란은 자신들과 비견될 만한 부족들이 마족에게 당하는 순간 수백 개로 찢어진 유목 민족을 통일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마족들이 준동하기 전까진 절대 움직일 리 없다.
이미 전생에서도 이런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으니 확실했다.
“이것으로 되겠습니까?”
“녀석들은 마족들이 나타나면 알아서 움직일 거야. 걔네는 이 정도 선에서 멈춰.”
“예.”
유목 민족에 대한 문제를 마무리한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로만의 의도가 뭘까?”
카리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단순히 마계의 군단들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는 리스크가 너무 커.’
카리엘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이미 노트에는 전생에 카리엘이 보았던 마족들의 상세한 군사력이 적혀 있었다.
과거 고대를 끔찍하게 만들었던 마계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그 정도로 막강한 전력은 아니었다.
비록 글렌이라는 존재에 의지하긴 했지만 반쯤 박살 난 제국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로만의 황제가 이렇게 움츠리고 있을 정도라면 최소 그거 이상이라는 뜻인데…….’
그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이상 섣불리 로만의 전력을 확정 짓는 것은 곤란했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시카리오 후작보고 교황과 함께 전력에 합류하라고 해. 글렌 역시 황궁 기사단과 수도 방위 기사단 일부를 이끌고 철벽으로 가게끔 하고.”
“그럼 제국에 남은 마스터는 아켈리오 경과 월크셔 공작뿐입니다.”
“충분하지.”
타리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카리엘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타리온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급 두 명이 수도에 남는다 하지만 월크셔 공작은 마도 공방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위기에 처했을 때 곧바로 달려올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전처럼 공중을 통한 습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 중앙군에 제국의 주력 공군이 머물고 있는 거잖아.”
“그래도…….”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웬만한 일은 대신들이나 관료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카리엘이었으나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는 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그 결정들은 거의 바꾸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타리온은 가서 준비하고. 시종장은 외무대신을 불러와. 인류 연맹도 움직일 때가 되었어.”
“알겠습니다.”
“예.”
명을 받은 타리온과 시종장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카리엘은 들어온 외무대신을 통해 인류 연맹이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마침내 인류의 적을 벌할 때가 되었다! 인류를 배신하고 마족에게 붙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마족들이 대륙을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 * *
카리엘이 직접 제국민들이 모인 광장에서 로만을 칠 것을 천명하자 인류 연맹의 다른 국가들 역시 군사를 일으키면서 로만을 칠 것을 천명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동대륙 국가들이었다.
남부 왕국들이 동쪽의 국가들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한 왕가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공격하자 동쪽의 국가들이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은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내부의 저항 세력이 안쪽에 혼란을 주면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다.
“국왕과 고위 귀족들은 이미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칫! 아쉽군.”
한 기사의 보고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혀를 찼다.
이런 상황은 다른 소국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들만 몸을 쏙 빼서 로만으로 튀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만 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소국들의 정예 병력을 죄다 들고 로만으로 튀었기 때문에 점령 지역에 있는 병력들은 대부분 쭉쩡이들뿐이었다.
재물들 역시 죄다 들고 튀어서 애써 점령한 보람도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제국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시작했군.”
“이그니트의 황제가 눈치챈 것 같습니다.”
로만의 황제가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말하자 무릎 꿇은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가서 너희의 수장에게 알려라.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