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30화 (13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9. 공공의 적을 만들기 (2)

해적왕을 꼬드긴 카리엘의 다음 행보는 언론이었다.

이미 제국 내에서야 마족들의 행보를 상세히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당장에 옛 남부 왕국들이 있던 곳만 가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흔했다.

급격한 개혁으로 자신들의 삶에 신경 쓰기도 바쁜데 저 먼 곳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될까?

그렇기에 이들에게 마족이란 존재가 자신의 삶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위험 지역을 개방하라! 그러지 않으면 인류의 적으로 대할 것이다!” 로만에 최후통첩을 한 이그니트」

「로만, 사실상 흑마법사들과 동맹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자들의 주류 의견」

「로만이 제국의 의견을 묵살할 경우 대륙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공식적으로 로만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동시에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모든 이에게 알렸다.

명분도 있으니 로만이 거절할 방법은 없을 터.

이뿐만이 아니었다.

말로만 하면 이게 심각한지 못 알아먹을 가능성이 높으니 강도 높은 압박을 가했다.

철벽의 요새로 제국의 비공선과 군수물자들을 빠르게 모으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임박했음을 대외적으로 알린 것이다.

“진짜 전쟁인가?”

“마족들이라면 어쩔 수 없긴 하지.”

다시 한번 전쟁의 징후가 보이자 그제야 남부 사람들도 지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심각성을 인지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법.

「과거 대륙 전체를 무너뜨리려 했던 마족! 그들이 다시 넘어오는가?」

역사학자들이 일제히 마족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사례들을 통해서 마계의 게이트가 열린다면 대륙은 멸망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흑마법사들과 손잡은 로만을 천천히 인류의 적으로 만들어 갔다.

서대륙 전체가 이런 인식을 갖기 시작하자 이런 인식은 동대륙에도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이미 이그니트는 로만과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허…… 그럼 이곳도 이제 슬슬 입장 정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상인들에 의해 이그니트의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자 동대륙의 국가들 역시 갑론을박을 벌이기 시작했다.

설마 로만이 진짜 거기까지 하겠냐는 의견과 지금이라도 이그니트와 손잡고 로만을 공격해야 한다는 측이 대립했다.

바다와 인접한 동대륙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위기감이 고조될 때, 또다시 서대륙에서 전쟁 징후가 보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말 전쟁을 준비하는군.”

“그러게.”

이그니트에 의해 무너진 옛 남부 왕국 지역.

그곳에서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무너진 대륙 남부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건물들이 언제라도 군수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개조되어 갔으며, 철도 역시 가장 먼저 중앙이 아닌 서부와 연결되게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을 염두에 둔 공사였고, 이 소식이 동대륙에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로만이었다.

이그니트보다 좀 더 강하다 평가받던 로만이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카리엘이 황제로 등극한 후 급격한 발전을 이루면서 로만과 힘의 역량이 비슷해질 거라 평가받았는데, 서대륙까지 통일해 버리면서 이제는 로만 혼자서는 이그니트를 막아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동대륙은 뭉쳐야 한다는 감성팔이를 하면서 동대륙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제국의 귀에도 들어갔다.

* * *

“폐하! 로만이 동대륙 국가들과 정식으로 동맹을 체결하려는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그쪽 상황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럴수록 조심해야지. 너무 조용한 것이,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군.”

비밀 수호대를 통해 멀리서 흑마법사가 있을 만한 지역을 감시한 결과, 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이그니트가 자신들을 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용한 것이니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저들이 뭘 준비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카리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마족 군단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을 가능성은?”

“3할입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타리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3할이나 되는 것이냐?”

“예, 어쩌면 벌써 지옥문을 여는 작업을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악의 사정을 가정하는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산드리아 쪽은 어때?”

“아직입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좀 이상하지?”

“예, 애초에 그들이 쓰는 술법이라는 것 역시 의심해 볼 만합니다.”

사막신을 모신다는 산드리아 제국.

지역마다 믿는 신들도 달라서 수많은 부족만큼 신들도 많았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술법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술법이라는 것이 비밀 수호대의 조사에 따르면 과거 서대륙에서 사용하던 주술사들의 주술과 비슷한 점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피와 어둠의 주술 계열과 비슷했다.

제물을 바치면서 힘을 얻거나 대가를 지불하고 힘을 발동하는 독특한 술법.

“그들도 마족과 연관이 있거나…….”

“최악은 지옥의 신들과 계약을 맺은 사도들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산드리아 제국은 흑마법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게 신기하긴 했지.”

산드리아의 부족들은 마족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

“일단 지옥에 관해선 최대한 숨기고 마족을 몰아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겠어.”

“예.”

산드리아의 일부 부족들이라도 협력을 이끌어 내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신기하게 산드리아는 사막 제국이라 불리면서도 동대륙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부족마다 자신들의 자치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드리아에도 황제가 있었지만 제국이나 로만처럼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드리아에서 가장 큰 부족장.

부족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권한.

제국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권한.

이 정도를 제외하면 각 부족들에게 터치할 수 있는 권한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이 상황을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산드리아를 공략하기에 앞서 동대륙을 분열시키는 게 먼저였다.

“해적왕은?”

“아직입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밀약을 맺기에는 지금이 딱 적기였다. 지금 딱 밀약을 맺고 동대륙을 흔들어야만 목표했던 남북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조금 아쉽네.”

“금방 연락이 올 것입니다. 해적왕도 이 기회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사 군도의 중립국이란 위치를 견고히 할 거의 유일한 기회가 지금이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를 빌어 향후 몇십 년에서 백 년 이상동안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세일럼에서 카리엘에게 설명을 들었던 해적들도 있으니 모든 인맥을 끌어모으려 할 터.

“차분히 기다려 보자고.”

“예.”

* * *

하지만 그런 대화와는 달리 그들은 매우 바삐 움직였다.

외무대신은 정식으로 로만에 항의했고, 타리온은 로만 내부에 첩자를 보내 여론을 형성했다.

동시에 시종장이 비밀 수호대를 통해 가져온 마족에 관한 증거들을 지속적으로 외부에 알리면서 로만을 압박했다.

그러자 로만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이게 맞는 것이오?”

“우리가 왜 인류의 적이 되어야 하지?”

아무리 로만이 중앙집권형 국가라지만 모든 귀족들을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현 상황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 있었기 마련.

모든 귀족들이 로만의 고위층이 마족들과 손잡았다는 걸 알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배신감이 더 컸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면 모를까, 전혀 몰랐다가 함께 인류의 적으로 몰린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이게 단순히 귀족들뿐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지만, 충성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군부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로만의 중심부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동대륙의 남부 국가들이 슬슬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로만은 끝이군.”

“힘을 하나로 모아도 모자랄 상황에…….”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동대륙의 남부 국가들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비밀리에 접근했던 해적들에게 서신을 전했고, 그것은 곧바로 카리엘에게 들어왔다.

“때가 되었군.”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되었다.

망설이던 동대륙 남부 국가들이 결단을 내렸으니 반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적왕에게 날짜를 잡으라고 해.”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떠나는 타리온.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기에 수행원을 최소화하고 싶다는 카리엘의 말에 친위대 전원과 아켈리오, 글렌만이 동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타리온이 자신도 친위대 일원이라며 따라가고 싶다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폐하, 저도 친위대인데 왜 빼시려는 겁니까?”

“아니, 넌 정보부 수장인데 수도를 지켜야지.”

“폐하를 호위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야! 장난해?”

말도 안 되는 우기기에 카리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타리온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가 생겼다고 소신을 버리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럼 따라가게 해 주십쇼. 솔직히 암살자나 요원들을 감별하는 건 제가 더 잘할 겁니다.”

타리온의 말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던 카리엘이 결국 한숨을 쉬며 허락했다.

그러자 이왕 가는 거 정보 수집도 하자며 그림자들 중 정예만을 선별해서 동행하게끔 했다.

“폐하.”

“경?”

“황궁 기사들이 섭섭해하옵니다.”

대뜸 찾아와서 황궁 기사들이 섭섭하다 말하는 아켈리오.

“섭섭하다고?”

아켈리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리엘.

“그림자들만 너무 신뢰하시는 거 아니냐고 불만이 있습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함께했던 것은 알지만 자신들도 좀 믿어달라고 전해 달라 하옵니다.”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무슨 개소리냐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 쌓여 왔던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일 수도 있기에 한숨을 쉬며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열 명 이내로만 수행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러자 그날부로 황궁 기사들은 서열 정리에 들어갔다.

“됐다!”

마지막 열 명째 들어가게 된 기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괴성을 질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에 카리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적진이옵니다. 솔직히 이것도 부족하다 생각하옵니다.”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마스터 2인에 6단계에 이른 친위대들이 함께함에도 부족하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적들의 본진으로 향하는 것이기에 아켈리오 입장에선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 * *

결국 황궁 기사들 중 가장 강한 열 명과 최정예 그림자들, 마스터 2인과 친위대까지 같이 움직이는 다소 거창한 멤버들이 구성되면서 작은 비공선을 타고 움직이려는 계획은 버려졌다.

온갖 마법으로 떡칠된 비공선이 야밤을 틈타 하늘로 올랐다.

온갖 새로운 마법을 적용한 신형 비공선이 빠르게 동부로 향하자 순식간에 세일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늦어서 미안하군.”

해적 간부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자 카리엘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배를 타고 간다 해도 아이사 군도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에 약속 시간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여유가 있사오니 심려치 마십시오.”

“여유가 있다?”

“예, 약속 장소는 아이사르만에 위치한 작은 섬이옵니다. 반나절 거리이오니 천천히 가셔도 될 것입니다.”

해적 간부의 말에 카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나절?”

“예, 폐하께서 저희를 믿어 주시는 바는 무한한 영광이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신뢰를 위해 제국의 영토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약속 장소를 준비했사옵니다.”

해적의 말에 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말은 다른 국가들의 수장도 이에 동의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국의 해군이 즉시 움직일 수 있는 거리. 그곳에 약속 장소를 잡은 해적을 향해 아켈리오를 비롯한 제국 측 인사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카리엘이 예상하지 못한 선물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천천히 배에 올랐다.

그리고 해적의 말처럼 불과 몇 시간 만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세워져 있는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대륙의 황제를 뵙습니다.”

마침내 보는 동대륙의 지도자들.

그들이 서대륙의 통일 황제인 카리엘에게 예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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