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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29화 (129/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9. 공공의 적을 만들기

성국의 내부가 정리되어 가면서 정식으로 교황이 항복 문서를 작성했다. 교국 수준으로 내려가며 과거 야금야금 받아먹었던 제국의 땅을 반환하는 절차를 마치면서 속국이 되길 청한 것이다.

성국마저 굴복하며 이그니트 연합으로 들어오자 제국은 문서상으로는 완벽하게 서대륙을 통일한 형태가 되었다.

아직 여러 절차도 남아 있었지만 통일을 했기에 큰 문제는 끝난 것이다.

「세인트리아 교국 이그니트 연방 가입 요청서」

교황의 직인이 찍힌 요청서를 가만히 바라본 카리엘이 생각에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마침내 1차 목표를 이룬 느낌이다.

이제 적어도 서대륙 안에서 뒤통수 맞을 일은 현저히 줄어든 셈이기 때문이다.

안방을 안정화했으니 적어도 전생보다는 나은 결과를 맞이할 터.

“남은 건 로만인가?”

이그니트를 지독하게 괴롭혀 왔던 로만을 정리하는 것.

이건 서대륙을 통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웬만하면 마족들의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기 전에 막고 싶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그들이 지옥의 문을 열지 못하게끔 하는 것.

카리엘은 이미 마족들과의 전쟁은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기에 지옥문을 막느냐 못 막느냐의 싸움이었다.

동대륙에서 들어온 정보들을 토대로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

때마침 타리온이 보고하기 위해 황제의 궁을 찾았다.

“로만의 상황은?”

“당혹스럽다고 전해 왔습니다. 자신들과 흑마법사들과는 무관하며 성국에 있는 자들 역시 일부 귀족들의 짓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응에 카리엘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최종 작전은?”

“외무대신이 이미 시작했습니다.”

타리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보고서를 카리엘에게 주었다.

“좋네.”

카리엘이 보고서를 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륙보다 크기가 큰 동대륙에는 당연히 많은 숫자의 국가들이 있었다. 거기에 이그니트가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동대륙에 접근하는 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고,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접근했다.

첫 번째로 언론 플레이를 통해서 로만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것.

두 번째는 동대륙 국가들의 수뇌부에게 접근하는 것.

마지막으로 로만을 옹호하는 국가들을 마족과 손을 잡은 대륙의 적으로 몰아가는 작업.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진즉 진행되고 있었고, 마지막 세 번째를 외무대신을 통해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작전을 위해 외무대신을 통해 동대륙 국가들과 비밀리에 접선했다.

서대륙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해 왔던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간 것이다.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이그니트가 로만을 공격하려 하는 건 누구라도 예상하고 있었고, 로만 역시 이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두 제국이 전쟁을 하는 건 시기상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그 시기를 언제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1. 내부를 수습하고 움직인다.

2. 곧바로 움직인다.

3. 마족들이 준동할 때까지 기다린다.

2번의 경우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로만도, 마족들도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기에 허를 찌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반면에 1번은 애매했다.

이그니트가 완벽하게 내부를 수습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그건 로만 측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마족들이 준동할 때까지 기다린다?

인류의 힘을 한데 모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서 끝도 없이 몰려들던 마물들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로만을 제외한 동대륙 국가 전체를 설득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되는 놈만 데리고 압박한다.’

굳이 모든 이들을 데리고 로만을 압박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설득되는 자들만 뭉쳐서 로만과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그니트의 정예군을 철벽으로 이동시켰다.

직접적으로 군사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그니트가 허튼짓을 못 하도록 압박은 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긴장감을 조성하고 그동안 제국은 내실을 다진다.

동시에 외교적으로 압박하면서 동대륙 국가들을 살살 꼬드길 생각이었다.

북쪽은 - 로만 연맹

남쪽은 - 이그니트 연맹

동대륙을 크게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것.

윙사르를 중심으로 남쪽 해안 지역의 국가들은 전부 이그니트와 동맹을 맺게끔 할 것이다.

물론 동쪽 끝 지역의 사막 제국 산드리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둘로 나누고, 로만과 손잡은 이들을 인류의 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어도 로만과 손잡은 국가들은 큰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인류의 적으로 만들기만 해도 일이 쉬워질 텐데…… 쉽지 않아.”

“로만이 오랜 시간 제국으로 군림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동대륙 국가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로만의 이미지.

그건 자신들보다 상국이라는 것과 동대륙의 중심이라는 이미지였다. 이걸 깨부수기 위해 인류의 적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어.”

“폐하!”

타리온이 발작하듯 말하자 시끄럽다는 듯 귀를 후벼 파는 카리엘.

“동대륙 국가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려면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낫잖아.”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들이 쓰고 버리는 말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선 남쪽 국가들의 주요 인사들을 카리엘이 직접 만날 필요가 있었다.

진정한 동맹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줘야만 움직여 줄 것이다.

“너무 위험합니다.”

타리온이 절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역시 상황의 심각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카리엘이 움직이는 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위협에서 카리엘이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이면…….”

“시간이 없다는 거 알잖아.”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마족들이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하면 골치 아팠다.

그 전에 결판을 봐야 했다.

“해적왕을 불러.”

“예? 그는 왜……?”

“해적왕에게 이번 사안을 맡겨야겠어.”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을 믿지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쉽게 가려고 이러는 거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아무리 그림자들과 비밀 수호대가 뛰어나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대륙과 밀무역을 해 온 해적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동대륙에서 바다를 끼고 있는 국가들이라면 해적들과 교류가 더 많았을 것이다.

카리엘은 그것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사 군도를 진짜 ‘중립국’으로 만든다.”

“설마…….”

“그래. 아이사 군도에서 동대륙의 국가들과 회담을 가질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몰래 한 번은 봐야겠지.”

해적왕을 통해 동대륙 국가들의 수장들과 비밀리에 회담을 가진다.

그 후, 정식으로 아이사 군도를 중립국으로 발표하고 정식으로 대마족 토벌군 결성을 위한 회담을 가질 생각이었다.

‘2개 국가 이상만 먼저 마음먹어 준다면 쉬워질 거야.’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타리온에게 명령을 내려 해적왕을 불러오게끔 했다.

비밀 회담으로 윙사르를 제외한 두개 국가만 확실히 이그니트의 편을 들어 준다면 정식 회담을 발표하면서 여론을 끌어 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이그니트의 돈을 빨아먹기 위해 동맹을 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닌 정말 마족들을 몰아내기 위한 동맹체가 되어야 했다.

* * *

계획을 위해 해적왕을 부르자 그는 카리엘의 부름만을 기다렸다는 곧장 제국의 수도로 비밀리에 입국했다.

“엄청나군.”

제국에서도 혁신의 상징이라 불리는 세일럼이었지만, 규모만 보면 이그니트의 수도에 비할 바가 안 되었다.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철도는 물론이고, 중앙 지역 곳곳으로 뻗은 도로들 역시 감탄할 만했다.

도로에서 움직이는 건 대부분 마력을 동력으로 하는 마동차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엄청난 숫자의 비공선들이 날아드는 모습 역시 장관이었다.

무엇보다 해적왕을 부럽게 하는 것은 탈로스와 로테온 출신의 상인들이 제국의 수도를 아무런 제지 없이 방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 전쟁을 했었던 출신들이 아무런 제지 없이 수도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부럽기만 했다.

그에 반해 자신들은 아직까지도 정식으로 제국의 수도에 들어올 수 없었다.

세일럼이야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지만 그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다. 카리엘에게 국가로 인정받았음에도 서대륙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는 해적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범죄자가 아닌 정식 국가의 왕.

사실 카리엘 입장에선 서대륙을 통일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아이사 군도를 토벌하고 이그니트에 복속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중립국이 되고자 한다면 수도로 찾아오라.」

이 한 문장에 해적왕은 고민조차 할 수 없이 곧바로 움직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비밀리에 황궁으로 들어온 해적왕이 카리엘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앉게.”

무릎 꿇은 해적왕을 손수 일으켜 세운 카리엘이 의자에 앉힌 후 차를 가져오게 시켰다.

“서신은 받았나?”

“예, 폐하.”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해적왕을 보면서 카리엘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이 예전에 말했지, 그대들을 중립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리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차례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희를 복속하시지는 않는 겁니까?”

해적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중립국으로 남을 것이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의 눈동자가 떨렸다. 혹시 쓸모가 다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버리는 게 아닌 진정한 중립국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정말입니까?”

“그래. 동대륙과 서대륙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국가. 그런 국가를 만들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카리엘이 품속에서 제안서를 꺼내 해적왕에게 건넸다.

“마족에 관해서는 그대도 들은 바가 있겠지.”

“예.”

“난 대마족 토벌군을 만들 생각이야. 그러자면 그 전에 반마족 연합을 만들어야겠지.”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비밀 회담을 열 것이야. 회담 장소는 당연히 그대들의 땅에서 열 것이고.”

“…….”

“향후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그대들은 동대륙과 서대륙 양쪽에서 인정받는 중립국이 될 테지.”

이미 남쪽의 바다를 대부분 장악한 해적왕이다.

그들이 중립국이 된다면 예전에 카리엘이 말했던 것처럼 무역로를 이용해 돈을 버는 국가가 될 것이다.

“짐은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그대는 이걸 받아들이겠나?”

카리엘의 물음에 한참을 침묵하던 해적왕이 고개를 숙였다.

“예, 목숨을 바쳐 폐하께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리하지 말게. 그대는 한 국가의 수장. 짐의 수하가 아닐세.”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는 해적왕을 제지한 카리엘이 그를 똑바로 세운 후 악수를 청했다.

국가대 국가의 수장끼리 하는 정당한 악수.

“대륙의 평화를 위해 힘써 주시게.”

“……예.”

감격한 표정으로 말하는 해적왕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왕을 설득한 카리엘은 하루 종일 해적왕에게 황궁과 수도 곳곳을 보여 주면서 앞으로 아이사 군도와 제국과의 미래를 얘기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차 눈이 몽롱하게 변하는 해적왕.

카리엘의 말발에 홀랑 넘어간 해적왕이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하며 아이사 군도로 복귀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본 수르트가 새삼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말발 하나는 죽여주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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