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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08화 (108/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0. 봐주니까 선을 넘네? (2)

카리엘이 수련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과로로 인해 쓰러졌다는 소식으로 대체되어 알려졌다.

그동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무리했기에 과로로 요양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자 전방위로 권력을 휘두르던 감찰부의 기세 역시 한풀 꺾였다.

당연히 강도 높은 업무로 압박을 받던 귀족원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잔뜩 움츠러들었던 상인들 역시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폐하 한 명이 없을 뿐인데…….”

재상이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멍하니 재상부를 바라보았다.

분명 황제가 몸져누운 것은 제국에게 있어서 뼈아픈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황도 아니고, 전쟁 중에 황제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제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창 전쟁 중인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윈스턴이 헛기침을 하자 황급히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크흠!”

가끔 윈스턴이 눈치를 주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했지만, 정작 재상 자신도 가끔가다 미소가 지어졌다.

황제의 부재로 일이 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대놓고 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이 조금 밀려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제국의 예상과 달리 남부 왕국들의 저항은 끈질겼다.

황제의 부재로 대전을 사용할 수 없기에 대신 재상부에서 주요 회의가 열릴 수밖에 없었고, 오늘도 재상이 대표로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회의실의 중앙에 앉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하나둘 회의실에 도착하자 재상이 입을 열었다.

“일단 남부 왕국들에 대한 보고부터 들어 보지.”

재상의 말에 타리온이 그동안 진행된 일들을 보고했다.

“예상보다 끈질기군.”

카리엘을 대신해 타리온의 보고를 받은 윈스턴이 한숨을 쉬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던 로테온이 끈질기게 제국의 정보부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로테온 입장에서도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재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입장에선 적당히 물러서 줬으면 좋겠지만, 로테온 입장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탈로스 역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서 기어코 범죄 집단 일부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인지 제국과 탈로스의 접경 지역에는 막대한 자금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론 내에 있는 반란군 역시 기세가 죽지 않았다. 남부 왕국들이 버텨 주니 반란군도 항복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만 제국이라도 견제해야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제국에 호의적인 해적왕과 달리 해적들 일부가 제국의 계획에 동참하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해적들 입장에선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가 딱 좋았다.

“개판이군.”

“해적들이니 아무리 해적왕이라도 완전히 통솔하는 건 힘들겠지요.”

타리온의 말에 윈스턴이 한숨을 쉬었다.

굳이 나라를 만들어서 제국의 개가 되기보단 지금과 같은 포지션에 남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로만의 인접 국가를 지원하는 계획이 자꾸 미뤄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제국 내부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천하의 제국이라도 막대한 예산을 언제까지고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선순위를 정해 기존의 계획들을 미루거나 엎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는 것이다.

강력한 황권을 가진 황제가 밀고 나가면 좋겠지만, 그들을 이끌 황제는 과로로 쓰러진 상황이다.

그리고 그 빈틈을 마탑이 노리고 있었다.

“저들이 점점 선을 넘는 것 같은데…….”

“놔두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재무대신의 말에 윈스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자들은 카리엘이 개별적으로 명령을 내려놨다.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정해 둔 덕분에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슬슬 위험한 것 같은데 폐하께 알려야 하지 않겠나?”

윈스턴이 친위대장이자 황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타리온을 보면서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시종장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으음…….”

일개 시종장의 판단.

이곳에 모인 대신들 입장에선 굴욕을 느낄 수도 있다.

모두 고위급 귀족들 혹은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카리엘을 보필하는 시종장은 일반적인 부류가 아니다.

시종장이 비밀 수호대의 일원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존중받기 충분했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카리엘은 현재의 시종장을 위해 그의 권한을 대폭 높여 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재상인 윈스턴조차 그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마탑이 완전히 선을 넘은 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후…… 그렇기는 하네만…… 슬슬 위험하네.”

윈스턴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과 달리 지금은 중앙 부처에도 태클을 걸어오고 있었다.

슬슬 제국의 계획에도 간섭하려는 마탑을 보면 더 놔뒀다가는 나중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세력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귀족원에서 마탑을 규탄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내무대신이 귀족원에서 보낸 탄원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황제에게 굴복한 중앙 귀족들을 믿을 수 없다며 마탑에 붙은 지방 귀족들이 많아지면서 귀족원의 영향력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자 그에 위기감을 느낀 귀족원이 마탑에 대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탄원서를 넣기 시작한 것이다.

감찰부의 솜방망이 처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스스로 마탑과 관련된 비리들을 찾아 중앙 부처로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개별적으로 보내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식으로 회의를 거쳐 내무대신에게 탄원서를 보낸 것이다.

“이로써 명분은 충분히 쌓였군.”

탄원서를 전부 읽은 재상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남은 건 폐하의 비밀 계획뿐입니다.”

“시작은 그때인가?”

재무대신의 말에 재상이 포돌스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비밀 계획이 완성되면 감찰부부터 움직이라 명하셨습니다.”

“저들이 과격하게 나온다면…….”

“군을 움직여서 마탑들부터 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엔 군부대신이 말했다.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마탑이 선을 넘는다면 제국에서 마탑의 역사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들도 그걸 아는지,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될까?

욕심에 눈먼 자들이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려 하고 있었고, 가끔가다 넘어도 처벌이 약하다면 좀 더 많이 넘게 될 것이다.

그게 반복되다 보면 나중엔 죽을 자리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완전히 선을 넘게 될 것이다.

“부디……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재상의 말에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제국의 중요한 자원이다. 그런 존재들이 선을 넘어 죽어 버린다면 제국의 발전 동력 하나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머리로는 저들이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왠지 재상은 저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재상의 예상은 불행하게도 맞아 들어갔다.

* * *

카리엘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마침내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과로로 쓰러졌다던 황제가 생각보다 길게 누워 있자,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렸을 적에 걸렸던 병이 재발했다는 것부터, 화산 폭발을 막는 과정에서 얻은 내상이 원인이라는 것까지 오만 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카리엘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헛소문마저 돌면서 제국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제국이 흔들리자 중앙 부처 역시 흔들렸다.

감찰부 역시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영향으로 감찰부의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마탑은 마도구 일부를 남부에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마탑 입장에서는 정말 별거 아닌 마도구였다.

문제는 그 마도구는 가공할 경우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이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부에서 오는 자원 일부를 마도구로 대납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대상이 현재 전쟁을 벌이는 적국이라는 게 문제였다.

절대 팔지 말라는 경고에도 결국 마탑은 욕심을 참지 못했고, 감찰부의 보고를 받은 재상이 움직였다.

윈스턴이 보기엔 선을 완전히 넘은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폐하께 보고해야 할 타이밍 같소.”

“알겠습니다.”

재상이 직접 찾아와 말하자 동의한다는 듯 늙은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들이 밀수를 통해 남부에 주요 마도구를 팔려는 정황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다린 이유는 카리엘의 비밀 계획 때문이다.

재상이 돌아가자 황궁 기사들로 하여금 앞을 막게 하고는 황제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관을 작동시켜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를 만들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지하에 만들어진 거대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때가 된 듯합니다. 폐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러지.

문 앞을 지키는 작은 불덩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얘기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불덩이가 문 앞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철문이 열리자 보이는 건 사방에 퍼뜨려진 수많은 불덩이와 그것을 컨트롤하고 있는 카리엘의 모습이었다.

수련실을 가득 메웠던 불덩이들이 하나둘, 카리엘의 몸으로 스며들면서 이내 완전히 사라지자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

“마탑이 선을 넘었나?”

“재상은 그리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밀 계획은?”

“완성 단계라 하옵니다.”

“때가 되었군.”

카리엘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때가 되었음에 눈을 빛냈다.

“먼저 올라가서 비밀리에 대신들을 소집해.”

“예! 폐하.”

명령을 내리자마자 곧장 올라가는 시종장을 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카리엘은 천천히 수련장을 벗어났다.

마침내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서대륙을 완전히 점령할 첫 단추는 바로 마탑을 제압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올라온 카리엘은 기관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그곳에 혼자만 간직하던 원대한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단계

마탑 무너뜨리기-마공학 및 공업 발전-중산층 확대-신분제 무너뜨리기

↓2단계

아이론의 혁명-남부 왕국 균열-남부 왕국의 점령 혹은 속국화

↓3단계

성국 압박-대륙 장악-통일

견고했던 신분제에 균열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만으로 각 국에 억눌러 살던 수많은 사람들을 저항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거기까지만 도달하면 정말로 서대륙을 통일하는 것도 꿈이 아닌 것이다.

“마탑이라…….”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뤄 줄 첫 제물이 될 마탑을 생각하면서 카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동안 자신이 만든 계획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리엘은 시종장의 부름에 기관을 작동시키고는 밖으로 나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재상과 대신들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엄한 상관이 복귀했지만, 그동안 자신들에게 간섭하려 드는 건방진 마탑 녀석들을 혼내 줄 존재이기도 했다.

“준비는?”

“전부 끝냈습니다.”

재상의 대답에 미소를 지은 카리엘이 대신들을 보며 명을 내렸다.

“건방진 마탑을 혼쭐내 줄 때가 되었지. 시작해라.”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카리엘의 명을 받은 대신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는 대신들이 전방위적으로 마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앙 부처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잠시 당황했던 마탑이지만, 때가 되었다는 듯 자신들이 모은 세력을 통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국 내부가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 때, 공영 신문이 광장에 뿌려졌다.

「폐하께서 복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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