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9. 제국에서 불어오는 변혁의 바람이 아이론까지?
제이론의 아성을 넘보기 위해 로테온과 손을 잡은 이들.
그리고 이들을 벌하기 위해 제국의 군대를 들여온 아이론 정부.
둘 다 이번 일로 인해서 아이론이 분열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제이론이 제국과 손잡기로 한 후부터, 어쩌면 홀로 압도적인 상단을 거느리기 시작할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최악이군.”
친제국파나, 반제국파도 아닌 중립에 위치한 중소 규모의 상단주들이 늙은 한 상단주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거대 상단들의 싸움의 여파로 중소 상단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손해를 보는 선에서 끝나지만 중소 상단은 그 여파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국가가 이리되었지?”
늙은 상단주가 과거의 아이론을 회상했다.
시작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론 내부에서 돈에 의해 신분이 나뉘면서 제국보다 더한 지옥이 되어 버렸다.
그토록 경멸하던 노예들.
권력이 싫어 나왔음에도 스스로 권력을 휘둘러 억압하는 이들.
그걸 이용하는 온갖 범죄 조직들.
이 모든 게 아이론이라는 국가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기엔 자유로운 국가처럼 보이는 것은 수많은 상단들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면서 도시 전체를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연맹체에는 한계란 존재하는 법.
각자의 이득에 따라 일부만 합의를 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그토록 경멸하는 제국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이런 상황이 한 명의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자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제이론 폴.’
압도적인 상인의 재능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이론 내에서 가장 강력한 상단으로 키워 냈다.
그 이후, 지역 상인 협회장에서 아이론 전체를 대표하는 연맹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조금씩이지만,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처우를 개선시켜 나갔다.
스스로 가장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연맹체 내의 상단들로부터 일정 부분의 돈을 뜯어내 일반 사람들의 처우를 개선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이미 썩어 버린 밑바닥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고, 아이론 내의 수많은 상단들 역시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과의 일이 터진 것이다.
제이론이 처음으로 패배한 이후 그의 절대적인 위치가 흔들렸고, 결국 불만이 있던 상단주들이 반기를 들면서 현재로 이어졌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터질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 아쉽군.”
늙은 상인이 점점 망해 가는 아이론을 보면서 탄식했다.
그러자 다른 상인들 역시 한숨을 쉬었다.
서대륙 유일의 상인들을 위한 나라. 그 위대한 나라가 탐욕으로 인해 무너져 가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그렇게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안타까워할 때였다.
아이론에 로테온과 탈로스의 군대가 들어오고, 제국군이 그것을 방어하면서 전쟁이 확대되어 갈 무렵, 제국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제국이 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군.”
아이론에 있는 모든 상인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소문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유일한 동부의 항구, 세일럼에 혁명 세력이 자리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현재 제국 내 혁명을 만드는 주체가 세일럼이었고, 그것을 만든 것이 현 황제 카리엘이었다.
그 황제가 이제는 중앙 정보에도 변혁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아이론 내부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이론은 끝났다! 탐욕에 미친 자들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다시 부활하는 제국으로 돌아가자!」
수도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벽보였지만,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들 이 소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일럼을 다녀온 상인들이 말한 소문조차도 거짓으로 치부했는데, 제국이 변한다는 사실을 믿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나온 상인들의 마음속에는 제국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론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길은 더 번지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아이론에도 제국에 대한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고, 이것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거대한 불길로 변할 거라는 점이다.
그것을 알기에 아이론 내부에 있는 혁명 세력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 위대한 제국에 다시금 돌아갈 그날을 위해서…….
그렇게 아이론이 혼란에 빠져들 때, 제국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심인 황궁은 매일같이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폐하, 아이론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타리온이 아이론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자 지친 표정으로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카리엘.
“……반응이 예상 이상인데?”
“저 역시 보고를 받고 몇 번이나 의심했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 역시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 영향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이 모인 아이론이라면 제국에 부는 바람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세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유를 갈망하여 서쪽으로 떠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이제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심을 잡아 줄 존재가 없는 자유는 높이 비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끝도 없는 무저갱이 빠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제국은 매력적이었다.
변혁 속에서 중심이 되는 카리엘이라는 존재가 바닥을 만들어 줄 것이고, 비록 아이론만큼은 아닐 테지만,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된 제국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하지만 남부 왕국들은 달랐다.
여전히 귀족의 정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들은 아이론에게는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비록 아이론의 힘은 상위권에 있는 상단들이 독식한다지만 그들조차 바닥을 깔아 주는 수많은 상인들이 없다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이들이 제국을 지지하기만 한다면…….
‘아이론을 집어삼킬 수도 있겠군.’
아이론을 공국처럼 동맹이나 속국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아닌 제국에 완전히 ‘복속’을 시킨다면 카리엘이 구상한 계획보다 훨씬 빠른 성장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아이론이 갖고 있는 신대륙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세일럼을 통해 동대륙과의 교역에 성공만 한다면…….’
동대륙과 신대륙의 문물이 제국의 수도에 모인다.
그렇다는 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때, 마탑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마공학을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전생의 발전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죽으란 법은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카리엘에게 타리온이 조심스레 품에 안고 있는 보고서 하나를 더 건넸다.
“그리고…… 폐하, 여기 공국의 요청서입니다.”
“요청서?”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국의 요청서를 본 순간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공국에서 이걸 요구했다고?
“네.”
“이거 공국에서 온 거 맞아?”
“예.”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이어서 묻는 카리엘을 보며 타리온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국은 동부군의 상시 주둔을 원합니다.」
간략한 내용.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근시일 내에 나와 공녀가 혼인하기를 원하는 건가?”
“그런 건 아닌 듯합니다. 그쪽 역시 미래에 폐하와 맺어지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있긴 하오나 지금 당장 이뤄지기란 힘들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럼 순수하게 요청한다는 것인데…….”
카리엘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맹이라도 제국군이 공국 안에 상시 주둔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국의 군대가 한 나라 안에서 계속 머무른다는 것은, 그 국가가 제국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소국도 아니고 공국이 그것을 원했다.
“공국의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건데…….”
“사실 현재의 공국의 상황이 좋지 않기는 하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일럼의 발전으로 공국의 경제도 살아났을 텐데?”
현재 세일럼 항구에 사용되는 막대한 양의 자원들은 순전히 제국 내에서만 공수해 오는 게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공국에서 빠르게 가져오는 게 많았다.
그로 인해 막대한 자금이 공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카리엘이 저번에 보고받기로는 근시일 내로 흑마법사들에게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도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탈로스가 공국에 대한 지원을 끊었습니다.”
“……로만과 밀약을 맺었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겠다는 건가?”
남부 왕국들은 서대륙의 일원으로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행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숨겨도 모자랄 판국에 공국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공국에 대한 지원을 끊은 시점부터 서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마저 각오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건가?”
“……예.”
“로테온도 공국에 대한 지원을 접겠군.”
“문제는 성국입니다.”
돈이야 제국에서 버는 것으로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성국은 다르다. 그들이 파견한 사제들이 없으면 공국의 군사력은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이 파는 물약, 그리고 신성력을 통한 치유를 통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도 철벽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성국이 사제들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군사력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로만의 대군을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국 내에 성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관들이 얼마나 되지?”
“성국 출신의 사제들 대비 15퍼센트 정도 됩니다.”
“아직 미비하네.”
“하오나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보고서의 뒷장을 넘기자 엄청난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숫자들이 보였다.
과거 불을 섬기던 제국의 순수한 신앙.
성국에 의해 민간신앙으로 여겨질 정도로 격이 떨어졌던 그것이 카리엘에게 지원을 받으면서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그런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았다.
“불의 신성력을 각성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빠르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공국이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이 정도 성장세를 갖추고 있는 건 모를 겁니다. 다만 현재 동부에 제국의 사제들이 늘고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일럼에서 마법으로 포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에 관심을 보인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공국이 성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성국 대신 제국의 그림자에 들어오겠다는 것인가?’
제국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스스로 속국이 되는 것마저 감수하겠다는 공국의 의지.
그만큼 현재 공국이 처한 상황은 위태로웠다.
“……일단 동부 사령관에게 연락해서 공국을 도우라고 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들어줘.”
“예.”
“그리고 불의 신전에도 협조를 요청해.”
“알겠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타리온.
“후……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겠는걸.”
기존에 카리엘이 가지고 있던 계획.
그것은 아이론과 공국을 강력한 동맹으로 묶어서 일종의 연방 형태로 만들고 서대륙의 다른 국가들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남부 왕국들과 성국을 패퇴시키면서 그들의 지도자를 친제국파로 갈아 치우면서 정치적으로 서대륙을 통일하는 것.
그 이후 동대륙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카리엘이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완전한 대륙 통일이라…….”
혼잣말로 중얼거린 카리엘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상징적인 의미의 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정말로 위대했던 제국의 그 시절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