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8. 서서히 시작되는 혁명! (2)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그에게 시종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서신 하나를 건네주었다.
“세일럼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카리엘이 황급히 마르크스가 직접 쓴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폐하, 소신의 제자를 올려보냅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은 아이지만 인력 부족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제자의 이름은 루터 W 비스마르크이옵니다.」
짧게 적힌 서신을 보면서 카리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 녀석이…….”
카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전생에 자신이 제국을 다스리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던 녀석이 수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릴 텐데…….”
자신이 아는 녀석이 맞다면 아직 어리다. 그걸 알기에 카리엘도 당장 인재가 급해도 천천히 찾아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폐하, 세일럼 시장이 보낸 자가 찾아왔습니다.”
“들라 하라.”
카리엘의 명령에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아직 어린 청년 하나가 찾아왔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어린 청년을 보면서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귀엽네.’
전생에선 삶에 찌들었는지 매일 뚱한 표정을 하고 다니던 녀석이 지금은 겁을 잔뜩 먹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마르크스의 제자라고?”
“과…… 과분하게도 그렇사옵니다.”
“흠……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온 것은 가상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구나.”
카리엘의 말에 루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은 카리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르크스가 이곳으로 보냈다면 그걸 감안하고서도 쓸 만한 인재라는 뜻이겠지?”
그 말에 루터의 안색이 다시금 환해졌다.
“같이 온 자들 중에 너처럼 어린 자들이 있느냐?”
“소…… 소인이 제일 어리옵니다. 다만 다섯 살 이내로 차이 나는 사람들은 꽤 있습니다.”
루터의 말을 들은 카리엘이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참에 아카데미도 개혁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은 루터를 향해 말했다.
“아무리 마르크스의 추천이 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등용하기는 어렵다. 나이가 너무 어리구나.”
카리엘은 또다시 시무룩해지는 루터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증명을 해 보거라.”
“증……명 말이옵니까?”
“그래. 네가 어린 나이에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거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시종장을 불렀다.
“이 녀석과 같이 온 자들을 전부 모아서 아카데미로 보내게.”
“예.”
카리엘의 명령에 시종장이 대답과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
“아카데미가 썩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 아카데미를 한번 개혁해 보거라. 오직 능력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는 아카데미. 그것을 만들어 보거라.”
카리엘이 명확한 목표를 던져 주자 루터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전생에도 그랬던 것처럼 명확한 목표에 루터의 표정이 달라졌다. 긴장했던 모습을 사라지고 반드시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는 의자가 눈에 깃들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한들 지원이 없다면 힘들겠지. 너희들의 학비는 전부 내가 대 주겠다. 또한 너희들이 아카데미를 개혁할 수 있도록 도울 이를 보낼 것이다.”
“도울 이…… 말입니까?”
“그래. 너와 함께 아카데미로 가서 개혁을 이끌 이들은 바로 내 동생들이다.”
카리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터.
“두 황자님들이…….”
“그러니 잘해 보거라. 아카데미가 개혁된다면 너를 중히 쓰마.”
“……반드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하는 루터를 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이 그를 내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시종을 시켜 두 동생들을 불렀다.
지금도 각 부처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는 동생들이었지만, 사실 포지션이 애매했다. 황자들이었지만, 여전히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들 입장에선 그동안 나름 굴렀다고 생각하겠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기에 배워야 할 처지였다.
예전이야 황위에 오를 자를 정하기 위해서 반강제로 일을 시켰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카리엘도 한동안은 은퇴 생각은 저 멀리 던져두었으니, 동생들이 진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자신들을 부른 카리엘이 빙그레 웃고만 있자 루피엘과 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류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지?”
카리엘의 물음에 움찔하는 동생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잠시나마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
은근한 어투로 제안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두 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라.”
“예?”
“갑자기 아카데미에요?”
카리엘의 말에 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와서 아카데미라니?
사실 둘의 수준은 이미 아카데미의 수준을 넘어섰다. 한때 오랜만에 등장한 천재 황족들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만큼 둘 모두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전쟁을 경험하면서 둘 다 기사나 정식 마법사에 준하는 실력을 갖췄고, 무엇보다 행정 업무 역시 초짜 관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다만 카리엘이 굴려 대는 중앙 부처의 관료들이 워낙 유능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못나 보일 뿐인 것이다.
“그냥 가라는 게 아니야. 임무를 하나 줄 거야.”
“임무 말입니까?”
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엘 넌 황립 아카데미를 개혁해야 한다. 학생회장을 맡아서 썩어 버린 교사들부터 학생들까지 전부 쳐 내.”
카리엘의 명령에 세리엘이 생각보다 큰 임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임무의 위중함은 잘 알겠지?”
“……예.”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예, 꼭 성공하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엘을 본 카리엘은 루피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임무는 세리엘보다 더 중요해.”
“아카데미 개혁보다 더 말입니까?”
루피엘이 그런 게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데미 내에서 저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가서 마법학부를 장악해.”
“그 정도는…….”
“교사들조차 간섭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장악해야 해.”
카리엘의 말에 루피엘이 이 임무가 어떤 것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마탑의 견제를 이겨 내라는 말입니까?”
“그래.”
마법학부의 교사들은 마탑 출신들이 많은 만큼 루피엘이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방해할 가능성이 있었다.
루피엘은 그 모든 걸 이겨 내고 마법학부를 완전히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장악이 끝이 아니야. 마공학과 공학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봐. 아카데미로 쓸 만한 인재들을 보낼 테니 그들을 이용해.”
“설마…… 마탑을 치려는 것입니까?”
루피엘의 물음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공학으로 인해 제국의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마탑.
철저한 중립으로 어떠한 파벌 싸움에서도 피해 없이 이득만을 취해 왔던 마탑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영향력도 커져서 이제는 제국에 암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네 외가를 끌어들이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든, 뭔 짓을 해도 상관없어.”
“……가장 쉬운 방법은 교수들을 끌어들이는 것이겠군요.”
“할 수 있다면.”
“후…… 한번 해 보겠습니다.”
루피엘이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의 임무가 중요해. 향후 아카데미에서 졸업한 인재들이 이 나라를 장악하게끔 할 거야.”
“정말로 혁명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세리엘의 말에 카리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 큰 위기가 오고 있어. 현재의 상태로는 그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
“……더 큰 위기…….”
“후…….”
지금보다 더 큰 위기가 온다는 말에 상상이 잘 안 되는 듯 한숨을 쉬는 동생들.
“위기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알려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아카데미에만 집중해.”
“예.”
“네.”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동생들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희들만 믿는다.”
두 사람은 어딘가 축 처진 모습으로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부담을 팍팍 준 것이었기에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불덩이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아직 멀었냐?
“좀 남았어.”
오랜만에 나타난 수르트를 보면서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쯧!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미적거리기는…….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황제인 자신이 손을 놓아 버리면 안 될 시기였다. 적어도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는 자신이 계속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직접 관리해야 했다.
“어차피 나 혼자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제국을 발전시켜야 그나마 희망이라도 걸어 볼 수 있지.”
-에휴…… 나나 스콜처럼 쉽게 생각하면 안 돼. 가름은 지금 잠들어 있을 뿐이야.
“알아.”
-온전한 힘을 가진 녀석에게 지금의 네가 맹약을 들이민다 해도 들어먹히지 않을 거다.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어야 해.
수르트의 조언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름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그것을 갖추기 위해선 지금 당장이라도 수련에 들어가야 했다.
태초의 불을 더 키우고 그 힘을 몸에 완벽히 안착시켜야 했다.
“조금만 시간을 더 줘.”
-후…… 그래.
그 말과 함께 다시금 허공에서 사라지는 수르트.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은 카리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멸망이 다가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앞이 깜깜해서 막막하기만 길을 등불 하나에 의지하며 천천히 걸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해내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전생의 미리엘이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면서 인류를 지키고자 했던 미리엘.
그런 그녀를 지키던 글렌이 무너지고 미리엘 역시 무너지면서 제국은 무너졌다.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더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오랜만에 미리엘이나 보러 갈까?”
그때 집무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재상이 폐하를 뵙고자 하옵니다.”
‘오늘도 미리엘을 보는 건 글렀군.’
보나마나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을 거라는 생각에, 오늘도 야근 각임을 깨달은 카리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류 지옥 속에 다시금 빠져든 카리엘.
그리고 그런 카리엘을 늙은 몸으로 뒤따르는 윈스턴.
이들의 희생 속에서 오늘도 제국은 어찌어찌 돌아가고 있었다.
* * *
그렇게 카리엘을 비롯한 대신과 관료들이 밤낮없이 일하는 동안 마침내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하나둘 부처에 배속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부에서 올라온 인재들 역시 자체 시험을 통과해 나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채용하며 데리고 가는 관료들의 모습에 태클을 걸어 보려던 귀족들까지 헛기침하면서 물러났을 정도였다.
“폐하, 사람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예.”
오늘도 사람이 부족하다고 찾아온 재상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카리엘.
“귀족원에 이관할 수 있는 업무가 뭐가 있지?”
“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평민들과 혁명 세력을 등용한 이상 전처럼 귀족원을 배제할 필요가 없었다.
등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등용했음에도 인력이 부족하다?
그럼 놀고 있는 자들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재상도 이에 동의하는 듯, 각 부처에서 귀족원에 넘길 수 있는 모든 업무를 이관시킬 준비를 했다.
그러자 당황한 건 귀족원이었다.
자신들을 견제하기만 했던 카리엘이 업무를 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귀족들이 카리엘을 찾았지만 오히려 업무만 더 늘어났다.
“혁명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다며? 귀족들의 권위를 지키려면 노력을 해야지. 안 그래?”
카리엘의 말에 벙어리처럼 입이 다물린 귀족들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것도 좀 가져가라?”
그렇게 말하면서 방긋 웃는 카리엘.
분명 위대한 황제이건만 왜 그의 얼굴에서 악마가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