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5. 대관식! (2)
마침내 들려온 승전보에 모두가 환호할 때, 미루고 미룬 카리엘의 대관식 역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아이론 연맹 역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국 연합이 패하면서 공식적으로 소국들의 영토를 점령한 제국이 이제 남부 왕국들과 국경선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론에 진을 치고 있던 로테온이 애매해졌다.
소국들을 집어삼킨 군대가 단숨에 로테온의 국경선으로 침입할 것처럼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탈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과 직접적으로 군대를 마주한 남부 왕국들의 긴장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대관식이 열리는 것이다.
“폐하.”
시종장의 부름에 오랜만에 서류 지옥에서 벗어난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간 마사지도 받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느 정도 미모가 돌아온 카리엘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그런 상황에서 보랏빛 망토와 함께 황제를 상징하는 홀을 들고 반지를 꼈다.
이제 남은 건 황관을 쓰는 것뿐.
“토벌군은?”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가자.”
승전보를 울린 군대를 직접 맞이하기 위해 마차에 오른 카리엘이 광장을 지나 성문으로 향했다.
과거의 영토를 되찾은 영광스러운 군대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카리엘은 성문에서 기다렸다.
곧이어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군대가 성문으로 진입했다.
근처 영지에서 미리 준비한 옷들로 갈아입은 병력이 성문을 지나 황제 앞에 멈춰 섰다.
“새로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 고생했다. 영광을 되찾은 이들에게 광영이 있으라.”
황제의 축복에 부복한 병력 모두가 무기를 두 손으로 들며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영광을 폐하께 바칩니다.”
제국의 모든 영광을 홀로 받은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한 백마에 올라탔다.
마침내 승전군과 함께 영광의 길을 걸으며 대관식으로 향하자 제국민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내전과 외부의 위협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혼란을 정리한 황제.
그 황제가 승전군과 함께 광장을 지났다.
본래라면 황궁으로 향해야 했으나 이번엔 달랐다. 역대 황제들 중 증명된 자들만이 갈 수 있었던 곳.
비밀 수호대에 의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초대 황제를 기리는 불의 탑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불의 탑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그러자 승전군의 표정에 환희가 차올랐다.
개선식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유구한 제국의 역사 중에서도 몇 없는 불의 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제국의 영광을 되찾은 이들과 함께 갈 것이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자격을 갖춘 황제.
그의 명령에 비밀 수호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면서 길을 비켰다.
그러자 영광의 길을 수많은 병력이 함께 올랐다.
4인의 변경백, 3인의 마스터 그리고 제국의 위기를 몇 차례나 벗어나게 해 준 영웅의 가문은 대공가와 가주와 소가주, 마지막으로 직계 황족인 두 황자와 황녀만이 그 길에 함께할 수 있었다.
재상과 대신들마저 자리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공간에 승전군이 꽉 들어차자 카리엘이 말에서 내려 위에 배치된 성화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그 순간 카리엘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뻗어 나오면서 계단의 양옆에 위치한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륵!
올라갈 때마다 천천히 타오르는 불들이 성화대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카리엘의 이마에 붉은 문양이 떠오르며 빛이 쏘아지더니 성화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삼대에 걸친 암흑기와 그 이전 수십 년간 꺼져 있던 거대한 성화대에 불길이 일기 시작하면서 수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불이 만들어졌다.
그 순간, 또다시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황실의 약속을 이행할 모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자격을 갖춘 자에 한해 전해지는 계약이 이행됩니다.]
[지옥의 문지기를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이 깃듭니다.]
[맹약에 따라 황실의 숨겨진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태초의 불이 안정됩니다. 이제 태초의 불은 당신의 말을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반투명한 창을 본 순간 몽롱한 표정이 된 카리엘의 위로 붉은 기둥이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바로 그 순간 또 한 번 반투명한 창이 생성되었다.
[??? 신과의 또 다른 계약이 있습니다. 계약이 중첩됩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 ??? 신의 숨겨진 특별 선물이 주어집니다.]
[??? 신의 숨겨진 계약에 대한 보상이 성과에 따라 주어집니다.]
[예상 이상의 성과로 보상이 주어집니다.]
[1. 흑마법사를 제국에서 몰아내기.
2. 고대의 맹약 부활시키기.
3. 서대륙에서 흑마법사 멸절시키기.
※위의 세 가지 업적을 이뤄 내셨으므로 추가 보상을 드립니다.]
[앞으로 지옥에 관련된 모든 위험을 알림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계약자들의 성장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허공에 펼쳐져 있는 창의 메시지를 멍하니 읽어 내려가던 카리엘에게 그에게만 들리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예약되어 있던 ??? 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들으시겠습니까?]
알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앞에 있던 창들이 사라지면서 신의 메시지가 담긴 창이 새로이 나타났다.
[설마설마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 몰랐네.
이 메시지가 보인다는 건 나와 초대 황제가 한 고대 맹약이 부활했다는 뜻이겠지.
이 맹약을 지킬지 안 지킬지는 네 선택에 달렸지만 이행하는 걸 추천할게.]
신의 메시지를 본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에도 은근슬쩍 떠넘기려는 신을 보면서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당연히 맹약을 지킬 마음도 없었다.
지금도 죽겠는데 맹약이란 걸 지키다간 은퇴는 평생 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네가 지켜 냈던 제국은 결국 멸망했어.]
이 문장을 본 순간 카리엘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
자신도 모르게 되묻자 메시지가 다시금 허공에 나타났다.
[이유가 궁금하지?
네 동생 미리엘이 나름 잘 이끌었는데 결국 멸망했어.
마왕군이 다시금 나타났거든.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났냐고?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거든. 마왕이란 직책은 그녀의 사도와 다름없어.
그녀를 막지 못하면 언젠가 대륙은 지옥에 점령당할 거야.]
여기까지 읽은 순간 카리엘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서대륙의 위기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참고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건 나의 사도밖에 없어.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네가 내 사도야.
마음에 안 들겠지만 요건 어쩔 수 없어.]
“이런 개…….”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카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화나겠지만 어쩌겠니.
이 세계를 지키려면 네가 굴러야 한다는데…….
그러니 이번엔 지켜 봐. 욜로 라이프는 즐기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이 말을 끝으로 신의 메시지는 끝이 났다.
[증명을 갖춘 자가 세계의 진실을 들었습니다. 사도가 갖출 모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지옥의 여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사도의 등장으로 제국에 있는 불의 사제들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불의 정령들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과 연관된 모든 재능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지옥의 하수인들이 동대륙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훗날의 위기에 대비하십시오.]
훗날의 위기에 대비하라는 글과 함께 반투명한 창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바로 그때 반투명한 창이 다시금 나타났다.
[??? 신의 특별 선물로 멸망의 잔재를 습득하셨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생에 그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진짜 멸망했다고?”
전생에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지켜 냈던 제국이다.
그런 제국이 결국 멸망했다.
나름 재능이 있던 미리엘이 엄청난 기술 발전을 이룩하면서 결국 마스터들까지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몬스터들로 인해 멸망했다.
동대륙은 물론이고 서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멸망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수도를 거점으로 항전했던 미리엘.
하지만 결국 수도가 무너지면서 제국과 함께 목숨을 거뒀다.
그 이후 신대륙과 남쪽의 섬들도 전부 지옥에 집어삼켜졌다.
‘……회귀시킨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신이 지구의 신에게 무엇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이 자신에게 사기 쳐서까지 회귀시킨 것이 멸망이 예견된 미래를 바꿔 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맹약에 지옥의 수문장이 있다는 것.
어쩌면 그 수문장이 지옥이 넘어오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기에 카리엘은 몸을 돌려서 승전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비밀 수호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저…… 저 문양은!”
카리엘의 이마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
그 문양이 변화했다.
초대 황제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문양으로 변화한 후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동시에 누가 봐도 성스러운 빛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성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한 카리엘이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와 양쪽으로 갈라선 승전군이 만든 길을 따라 탑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대신들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카리엘을 향해 엎드리자 재상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카리엘의 머리에 황관을 씌웠다.
그러자 황제의 홀과 반지, 황관이 붉은 빛을 발하면서 주변에 붉은 파장을 뿜어냈다.
인정받은 자한테만 반응한다는 황실의 보물이 빛을 뿜자 근방에 몰려들었던 제국민들까지 모두 엎드렸다.
“이로써 이그니트의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정식 등극하셨습니다.”
재상이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하고는 엎드리자 카리엘만이 오롯이 선 채 모두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이들.
이런 이들을 향해 한 가지는 약속해 주고 싶었다.
“그대들에게 한 가지는 약속하지. 짐이 제위에 있는 동안 제국의 영광이 지는 일은 없을 거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던 전생의 제국.
고생만 하고 제국과 함께 명을 달리했던 미리엘과 글렌.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생엔 반드시 이 제국을 지켜보고자 했다.
‘은퇴는 더 멀어져 버렸군.’
황제가 된 순간 은퇴는 저 멀리 가 버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진실을 안 순간, 과연 자신이 마흔 살 전에 은퇴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엘은 관료들과 제국민들이 만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모두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초대 황제 폐하에 버금가는 존재가 나타난 건 아닐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는 초대 황제.
어느새 카리엘은 제국민들에게 그의 아성에 도전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보다 더 위험한 생각을 품었다.
어쩌면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를 모시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초대 황제조차 십 대에 이 정도 활약을 보여 주지는 못했기에 충분히 근거가 있는 생각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카리엘이란 존재가 이미 제국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의 업적을 세웠다는 점이다.
그런 이를 위해 제국의 모든 신문사는 똑같은 제목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제국을 빛낼 위대한 황제를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