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4. 일복 터진 황제님!
마침내 모든 일정이 끝나고 황제의 장례식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선황의 관이 무덤에 묻히는 순간, 카리엘을 비롯한 대신들은 밤낮없이 일했다.
변경백들과 토벌군들 역시 하나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국민들이 선황을 기리는 마지막 3일.
그 3일 동안 제국의 군대와 관료들은 서대륙에 일어날 거대한 흐름을 쫓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국가들의 사신들 역시 빠르게 자국으로 돌아갔다.
시작은 남부 쪽에서부터 일어났다.
“남부 왕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타리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하면서 서대륙의 전체적인 상황들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로테온이 움직였습니다. 현재 로테온의 군대는 아이론으로 집결 중입니다.”
“남부 변경백이 있을 텐데?”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이 자신들을 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인가? 아니면…….”
로테온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가던 카리엘이 멈칫했다.
“아이론 연맹 안에 로테온의 첩자들이 얼마나 있지?”
“천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줄었네?”
카리엘의 물음에 타리온이 흠칫했다.
제국이 친제국파를 만들기 위해 아이론에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테온이 인원을 줄인다?
뭔가 냄새가 좋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파악한 카리엘은 타리온을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아이론으로 들어간 특수군도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도록 조치해.”
“예.”
“아이론과 로테온에 눈에 띌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아이론에서는 친제국파와 반대파가 격렬하게 대립 중이었다.
반대파는 로테온과 탈로스에게 지원받고 있었고, 친제국파는 그걸 막기 위해 제국의 군대를 자국에 주둔하게 하는 강수까지 두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연기라면?
‘이미 그때부터 친제국파까지 배신했던 거였나?’
남부 왕국과 성국이 밀약을 맺을 당시 아이론 역시 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할 움직임이 있었다.
그 이후 세력이 약한 친제국파를 도우며 두 파벌로 나뉘게끔 작업해 놨는데, 그 모든 게 연기에 불과한 거라면 제국은 아이론에 돈만 퍼 준 셈이 되는 것이다.
“아이론을 ‘적’이라고 규정해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론 내부가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서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국의 정보부는 무능하지 않다.
만약 아이론에 진짜로 제국의 ‘적’만 남았다면 눈치챘을 것이다.
분명한 건 지금 아이론 내부에서는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돈이라면 환장할 상인들이 자신들의 상권이 박살 나는 것을 감수하고서 대립 중이다.
이미 아이론은 친제국파와 반대파의 대립만으로 실시간으로 막대한 자금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제국의 돈을 털어먹으려는 것치고는 규모가 너무 큰 것이다.
“이게 만약 장난질이라면 아이론의 배짱이 대단한 것이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다시금 일에 열중했다.
이미 남부 왕국들과는 확실히 갈라선 상태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제국 내부를 수습해야 했다.
서대륙은 이미 공국을 제외한 모든 곳이 제국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어야 했기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대신들도 그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만약을 상정하고 움직였다.
언제든 군수물자를 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물자를 빠르게 나를 수 있도록 도로를 정비할 준비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마탑과의 계약이었다.
“폐하.”
“재상인가?”
자신을 찾아온 윈스턴을 본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향했다.
늙은 윈스턴을 배려해서 서서 보고받지 않고 손님을 맞는 것처럼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준비시켰다.
“마탑에 관련된 보고서입니다.”
“저들이 내 의도를 알아차렸군?”
카리엘이 웃으며 말하자 윈스턴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듯싶습니다.”
현재 마탑이 갖고 있는 강력한 이권들.
카리엘이 보기에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였다.
공업 국가로 발전하다 보면 귀족들의 권리는 자연스레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마공학을 통해 기술을 습득했기에 ‘마탑’의 범위 내에서만 발전이 허용되었다.
마법이 아니면 구동될 수 없는 물품들이 수두룩했다.
굳이 마법이 아니어도 될 만한 것들 역시 마법을 넣어서 공학을 발전시키지 못하게끔 막아 왔다.
오직 자신들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자 모든 공학은 마법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며 현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지구에서의 삶을 살았던 카리엘이기에 전생엔 공학을 발전시킬 씨앗을 심고 키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마탑도 반쯤 붕괴된 상태였고, 제국 역시 맛이 간 상태여서 먹힌 것이었다.
지금의 마탑은 굳건하기에 준비가 필요했다.
“폐하, 지금 마탑을 건드리는 건 시기상조 같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그저 준비만 하는 것뿐이야.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먼 훗날이 될 거야.”
마탑도 대신들도, 언젠가는 카리엘이 개혁할 것임을 잘 알았다.
이미 동부 지역은 혁명 세력이 주요 사안들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고, 세일럼 항구에서는 대규모 공업단지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변 영지에 있던 영지민들이 대거 세일럼 항구로 몰려들면서 과세율로 쥐어짜던 영주들이 세금을 낮추고 영지민을 확보해 두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것이 제국 전역으로 확대된다면 하나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반발했던 것이지만 어설픈 저항으로 카리엘에게 손쉽게 꺾여 버렸다.
반면에 마탑은 달랐다. 귀족들이 반발할 때도 마탑은 조용했다.
오히려 그 시기에 카리엘이 쉽사리 자신들의 이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그렇기에 섣부르게 마탑을 건드렸다간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윈스턴은 바로 이 점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대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카리엘 역시 윈스턴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기에 계획만 세워 둘 뿐 어떠한 것도 시행하지 않았다.
마탑을 치기엔 명분도, 힘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지금은 사전 준비만 할 것이다.
지금 비밀리에 준비하는 모든 계획들은 반란군이 정리된 후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 때 시행할 것들이다.
‘모든 계획들이 이뤄지면 귀족이란 신분을 명예직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눈을 빛냈다.
세일럼을 시작으로 주요 도시에서 부유층을 대거 만들어 내면서 귀족들을 허울뿐인 존재로 만든다.
그 이후에 ‘마법’을 지금의 절대적 위치에서 공학이나 다른 학문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 존재로 끌어내린다.
그 순간 제국은 변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들이 진행되기 전까진 귀족들이나 마법사들 같은 기존의 고위층의 반발을 최대한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리엘은 윈스턴을 바라보았다.
“품 안에 든 것이 사직서라면 넣어 두게.”
“폐하, 소신은 너무 늙었습니다. 앞서 보고한 바와 같이 능력 있는 이들 중 하나를 재상에 임명하시는 편이 앞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에 편할 것이옵니다.”
윈스턴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는 건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네가 빠지면?”
카리엘의 말에 윈스턴의 입이 다물렸다.
“나도 앞으론 무리하게 귀족들이 반발할 정책들은 시행하지 않을 생각이야. 모든 계획은 내부가 정리된 이후일 테니 그때까지만 힘내 주게.”
“그때는…….”
“그대의 사직서를 받아 주겠네.”
카리엘의 대답에 한참을 품속에 있는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던 윈스턴이 고개를 숙였다.
“후…… 알겠습니다.”
오늘도 사직서를 들고 찾아온 윈스턴을 잘 달래서 돌려보낸 카리엘.
마음 같아선 능력 있는 자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윈스턴의 능력 역시 쓸 만하다는 점이다.
일단 귀족들이 천거한 인물답게 귀족원이 윈스턴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들어먹는기도 했고, 윈스턴 본인도 정치 생활을 오래 한 인물답게 눈치가 빨랐다.
카리엘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읽어 내면서 사전에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매듭을 지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카리엘의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윈스턴이 재상의 자리를 지켜 주어야 했다.
문제는 카리엘이 보기에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몇 년은 걸릴 장기 계획이라는 점.
그렇다는 건 윈스턴은 최소 그 시간 동안은 재상의 자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보단 빨리 은퇴할 테니 원망 말게.”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자신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서류 더미로 가득 찬 풍경은 관료들조차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카리엘은 그나마 약과였다.
대신들과 중앙 관료들은 이보다 더한 풍경 속에 있으리라.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없는 것처럼 보여도 막상 찾아보면 넘치는 게 일인 것처럼, 그동안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갔던 일들도 자세히 들춰 보니 문제가 많았다.
하나하나는 사소한 것이지만, 전부 모아서 보면 거대한 문제가 되는 법.
카리엘 입장에서도 이런 것은 덮어 두고 넘어가고 싶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기에 지출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사소한 것들을 고쳐 나가면서 그동안 관례처럼 여겨지던 작은 비리들까지 모조리 틀어막아 버리자 무려 제국의 1분기 예산의 20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1분기 예산의 20분의 1이라고 하니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토벌군을 1년 내내 지원할 수 있을 만큼 막대한 돈이었다.
결과가 이렇게 나오니 매일 야근으로 불만을 표하던 관료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과 소국 연합이 끝이 아니라 불안한 서대륙의 정세까지 생각하면 앞으로 아낄 수 있는 돈은 아끼고 봐야 했기에 과로로 죽을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끌고 나와 일했다.
그 결과 황제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부 좀비처럼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게 되었다.
이미 수도에는 중앙 부처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하는 1순위 부서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 * *
“지옥이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서류 지옥.
그곳에 갇혀 있던 카리엘은 어느 날 밤늦게 미리엘을 찾아갔다.
졸린 눈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미리엘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나마 밤마다 미리엘을 보면서 힐링을 해서 다행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모든 분노를 담아 관료들을 굴렸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관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전부 미리엘 덕분이었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도울 거예요.”
“음…… 그래도 어렸을 땐 놀아야지. 너무 공부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카리엘이 미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볼을 부풀리는 미리엘.
“나만 놀긴 싫어요.”
오빠들은 전부 열심히 일하는데 자기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미안한지 자꾸 공부하려는 미리엘.
그런 그녀를 보며 오히려 카리엘은 노는 시간을 더 늘려 버렸다.
미리엘만큼은 이 지옥에 빨리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어렸을 때만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이 되면 지금을 그리워할 거야.”
볼을 부풀리는 미리엘과 놀아 주던 카리엘은 그녀를 재워 놓고 밖으로 나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황제 궁에 도착하자 늙은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 북부에서 까마귀가 왔습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카리엘은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까마귀가 무릎을 꿇은 채 검은 종이를 바쳤다. 서신이었다.
카리엘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마침내 움직였군.”
마침내 성국이 움직였다.
그렇다는 건 성국의 늙은 여우가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일 터.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선황에 의해 만들어졌던 잠시간의 평화가 끝나고 본격적인 격전의 시대에 돌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