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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94화 (94/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3. 황제의 죽음

스스로 황위에 가장 가까운 이유를 증명한 카리엘에게 더 이상 자비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본격적으로 감찰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치안대와 군부까지 이용해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대비했다.

물론 아무나 잡아들이진 않았다.

지금까지 용인되었던 것을 전부 잡아들이면 귀족들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카리엘에게 반발했던 이들만을 콕 집어서 잡아들였다.

그러나 귀족들 중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이들이 있었다. 특히 고위 귀족 출신들이 그러했는데, 그럴 경우 카리엘이 직접 행차했다.

“저, 전하! 한 번만 자비를…….”

“나에게 자비를 기대하나?”

이미 대전에서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것이라 천명한 순간 그들은 끝이었다. 옆에 있는 감찰관에게서 죄목을 직접 확인한 카리엘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악질이군.”

카리엘이 이번에 잡힌 고위 귀족을 바라보았다.

자비를 구걸하는 귀족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목숨만 살려 달라 구걸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번 한 번만 넘어가 달라고 청하는 쓰레기.

다른 이들은 사소한 범죄들이었다면 이 녀석은 아주 악질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돈을 갚으라는 명목으로 노예처럼 부렸다. 게다가 몇 다리를 건너서 남부로 향하는 밀수업자들에게 투자하기도 했다.

그나마 그간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투자해서 걸리지 않았던 것이 이번에 재수 없게 걸린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중앙과 남부를 한번 뒤집었는데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자가 본래 동부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는 곱게 죽이면 안 되겠군.”

“재판관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옆에 있는 감찰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것을 듣고 있던 귀족이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하! 살려 주십쇼! 전하!”

“다들 왜 한 박자씩 늦는지 모르겠어.”

이제 와서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비는 범죄자를 보면서 싸늘한 미소를 지은 카리엘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잡아가. 특급 범죄자이니 반항하면 반쯤 죽여도 좋다.”

카리엘의 명령에 거칠게 반항하던 귀족이 얌전해졌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희망이 어려 있었다.

귀족의 한쪽 팔을 붙잡던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 쳤다.

이런 반응을 보인 귀족들은 지금 황궁의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문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지금 반항해서 죽는 게 좋을지도…….’

속으로 귀족의 명복을 빌어 주며 기사는 조용히 감옥으로 연행했다.

그렇게 오늘도 반항하는 귀족 하나를 직접 연행시킨 카리엘은 궁으로 돌아와 다시금 일에 매진했다.

그렇게 점심마저 거르고 일할 때, 타리온이 다급히 들어왔다.

“폐…… 아니 전하!”

“왜?”

싸늘하게 바라보는 카리엘의 눈빛에 황급히 말을 바꾼 타리온은 조용히 보고서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제 와서 용서라…….”

“폐하의 유언장에 귀족회가 동의했습니다.”

유언장에 동의하면서 이제 와 용서를 구하는 귀족들.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귀족회에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찬성했지만 카리엘은 지금하고 있는 것들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더 채찍질을 가할 생각이다.

“나중에 딴생각 못 하게 해. 지들이 지은 죄가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타리온.

그는 명령대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이용해 귀족들을 얌전하게 만들어 놨다.

적어도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꼼짝달싹 못 하게끔 묶어 놨기에 한동안은 다른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카리엘은 말끝을 흐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죽는 순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비공식 황제라고 세뇌하듯 중얼거리면서 현실도피하고 있지만 그것도 곧 끝날 예정이었다.

「진정한 황제의 탄생!」

오늘 자 조간으로 발행된 신문 1면에 실린 헤드라인.

대전 회의에서 카리엘이 황실의 문양을 부활시켰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기에 대놓고 탄압당하는데도 귀족들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다.

얼마 만에 부활한 황실 문양인가?

그런 고귀한 혈통을 가진 카리엘에게 반기를 든다?

뒤져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하면 후에 문제가 생길 건 분명하다. 지금이야 고개를 숙이고 있다지만 분명 앙심을 품고 있을테니, 틈을 보이면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엘은 강압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하.”

늦은 밤까지 일하던 카리엘에 조용히 찾아온 황제 궁의 시종장.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토록 미루고 싶었던 때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바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동생들은?”

“연락은 취해 놓았습니다. 사정이 된다면 수도로 복귀하겠다 하옵니다.”

시종장의 대답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들과 두 공작에게 비밀리에 연락해 현 상황을 알렸다.

그럼에도 복귀하지 못한 것은 반란군 진압과 소국 연합을 진압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었다.

“끝까지 방해하는군.”

대부분의 주력이 동대륙으로 빠져나갔음에도 여전히 서대륙을 활개 치고 있는 흑마법사들의 잔존 세력.

그들의 힘이 소국 연합과 반란군에 더해지자 상당히 까다로운 적이 되어 버렸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차근차근 토벌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시간이 좀 더 걸릴 듯싶었다.

거기다 변경백들 역시 참석하기 힘들었다.

몸을 뺄 수 있는 변경백들이라도 부르려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부 왕국들과 성국은 물론이고, 아이론 연맹에조차 내부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퍼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내부 반란이라…….’

상인 연합으로 시작된 아이론 연맹.

그러다 보니 각자의 이득에 따라 파벌이 수시로 바뀌는 국가였다. 그런 곳에 충성심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벌써부터 아이론 연맹 내부에서 친제국파인 제이론을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로테온이 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어쩌면 제국이 반란군을 토벌하고 소국 연합을 박살 낸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아이론 연맹에 급변 사태가 터진다면 가장 먼저 서부군이 위험에 빠질 것이기에 서부 변경백 역시 움직일 수 없었다.

‘변경백과 공작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장례식이라…….’

황제의 장례식에 주요 귀족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굴욕에 가까웠다. 전생에 암군이라 불렸던 카리엘조차 임종 직전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수도에 모여 있었다.

그렇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가지.”

“예.”

시종장을 따라 황제의 궁에 도착한 카리엘은 지체 없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신관과 의사 들이 모여 있었다.

“상태는 어떠시지?”

“……오늘 밤을 넘기시긴 어려울 듯싶습니다.”

의사의 대답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좀 더 버티실 방법은 없나?”

카리엘의 물음에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리엘은 늙은 시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역시 작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길 바랐다.

많이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사태를 진정시킬 때까지만이라도 버텨 주길 바랐지만 결국 황제는 예정보다도 빨리 눈감을 생각인 것 같다.

그렇다면 결정해야 했다.

강행 돌파를 할지, 아니면 황제의 죽음을 미룰 것인지.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알리고 모든 귀족들을 불러 모아라.”

“예.”

카리엘은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린 후 착잡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죽음을 숨겼다가 위기가 끝난 이후에 발표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론 연맹이라는 폭탄이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황제의 죽음을 미루는 것에는 의미가 없었다.

* * *

얼마 후, 타리온이 도착하자마자 카리엘은 명령을 내렸다.

“공영 신문을 통해 폐하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라.”

“예.”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다는 내용이 신문을 통해 전해졌고, 광장에서 황제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이 실시간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깜깜한 밤에도 국민들이 하나둘 랜턴과 횃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귀족들 역시 다급하게 개방된 황궁을 통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신들과 고위 귀족들이 전부 모였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켈리오를 비롯한 모든 황궁 기사들이 황제의 궁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림자를 이끌고 타리온이 황제의 궁을 둘러쌌다.

그렇게 달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 황제가 눈을 떴다.

“폐하!”

황제가 의식을 차린 것을 보자마자 카리엘이 황급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구나.”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끝까지 황위를 물려받기 싫어하는 자신의 아들을 보고 피식 웃은 황제.

“좀……더 버텨 보고…… 싶었으나…… 내 정신이 더는 버티질 못하는구나.”

황제가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없는 황제는 죽어 가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지치는군. 그만 이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된 것 같다.”

그토록 원했지만, 막상 앉고 나서는 고통의 길을 걷게 했던 황좌.

이제 이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안식의 길로 떠날 때가 된 것 같았다.

“큭큭~ 억지로 앉혀 놓고 이런 말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마른 목소리로 웃은 황제가 떨리는 손으로 카리엘의 손을 붙잡고선 말했다.

“고생하거라.”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최대한 빨리 황좌에 내려오기를…… 저승에서…… 기원하마.”

그 말을 끝으로 웃고 있던 황제는 눈이 서서히 감기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는 시종장과 치료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폐하!”

방 안에서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귀족들과 대신들 역시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황제가 승하했음을 알렸다.

암군이라 불렸던 황제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다.

몇 대에 걸친 암군으로 인해 밑바닥을 찍었던 제국.

하지만 제국의 암흑기는 이제 끝이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황실의 문양을 부활시킨 제국의 영웅이 황좌에 오르기 때문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모든 이들이 카리엘을 폐하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권한을 받았지만 황제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폐하’라는 호칭을 극구 반대했던 카리엘.

하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임종을 지킨 카리엘이 황제의 궁에 나오자마자 모든 귀족들과 대신들이 일제히 카리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수많은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새로운 황제로 정식으로 인정받은 카리엘이 첫 명령을 내렸다.

“제국의 모든 이들에게 선황 폐하의 죽음을 알려라. 앞으로 열흘간 폐하의 장례식이 진행될 것이며 그 기간 동안은 폐하께 조문하러 오는 모든 이에게 황궁을 개방할 것이다. 또한! 모든 전쟁은 멈출 것이며, 설령 적국이라 하더라도 사신단을 보내온다면 막지 않을 것이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카리엘의 명령에 모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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