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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93화 (93/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2. 검을 뽑아 든 혈태자! (4)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황제가 되었다.

비공식이었지만 모든 권한이 이양된 이상 황제와 다름없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무의미해진 느낌에 카리온이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타리온은 재상과 대신들을 비밀리에 부르기 위해 그림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카리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폐…….”

“비공식이잖아.”

“흠흠! 전하, 대신들과 재상에게 연락해 두었습니다. 태자 궁으로 가시지요.”

폐하라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카리엘이 노려보자 타리온은 헛기침하며 정정했다.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기도 귀찮아. 그냥 여기로 오라고 해.”

“바람이 찹니다.”

타리온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카리엘은 걸을 힘도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타리온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근처에 있는 시종에게 명령해 두꺼운 외투를 가져와 카리엘에게 걸쳐 주었다.

살짝 쌀쌀한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이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 동안 대신들이 하나둘 황제 궁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노구를 이끌고 재상이 도착했다.

“전하? 여기서 뭐 하시는……?”

계단에 앉아 있는 카리엘을 중심으로 바닥에 앉은 대신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윈스턴.

“전할 게 있어서 불렀다. 다들 앉아.”

카리엘의 명령에 재상 윈스턴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았다.

눈치 빠른 타리온이 바닥에 방석을 놓아주자 그 위에 앉은 윈스턴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윈스턴의 물음에 카리엘이 조용히 손에 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대신들과 윈스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폐하께선 보름을 버티기 힘드실 것 같군.”

카리엘의 말에 윈스턴과 대신들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귀족회를 설득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윈스턴의 말에 다른 대신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후에 반드시 말이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걸 무기로 카리엘이 향후 계획하는 것들에 태클을 걸 수도 있을 터였다.

사실 재상이나 카리엘이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시종장.”

카리엘이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종장을 불러서 설명하게끔 했다.

그러자 늙은 시종장이 조용히 다가와 대신들과 재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 황제가 다음 황제를 위해 준비한 것들.

그것은 유언장과 황제의 반지만이 아니었다. 정당성에 조금의 균열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완벽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곁가지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전하.”

시종장의 부름에 작게 한숨을 쉰 카리엘은 화기를 끌어 올렸다.

그 순간 카리엘의 이마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문양.

“헉! 서…… 설마!”

가장 먼저 재상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뒤이어 대신들도 경악 어린 얼굴을 했다.

“준비할 수 있겠나?”

카리엘의 물음에 대신들과 재상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절차? 이제 그딴 건 필요가 없었다.

설령 사생아였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가능할 텐데, 장자에 황태자라는 신분에 심지어 자격을 갖춘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문양까지 있으니 귀족들이 반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양에 관해서는 가장 마지막에 공개하겠다.”

카리엘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하자 재상과 대신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공개한 후 빠르게 황위에 오를 준비를 하면 될 텐데 왜 그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검집은 아직 비어 있다.”

카리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밤하늘을 바라본 그 시간 동안 허탈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아직 자신이 뽑아 든 검이 검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분노를 연료 삼아 쓰레기들을 청소할 생각이었다.

분노로 인해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을 본 대신들과 재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아들었으면 최대한 빨리 진행해. 시간이 없다.”

“예.”

카리엘의 명령에 윈스턴이 대표로 고개를 숙이고는 대신들과 함께 재빨리 흩어졌다.

황제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했다.

하지만 완벽한 준비 따윈 필요 없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는 이상 조금 손색이 있더라도 빠르게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 *

바로 다음 날.

제국의 광장에 공영 신문이 뿌려졌다.

출근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기던 제국민들과 귀족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간으로 나온 따끈한 신문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다!」

대문짝만 하게 나온 신문의 제목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황제의 상태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과 다음 황제로 카리엘을 낙점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재상이 대신들과 회의한 결과를 발표했다.

“현 황태자인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전하를 차기 황제로 옹립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소.”

재상의 발표에 귀족회가 반발했다.

자신들과 상의 하나 없이 갑자기 이런 발표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발표는 귀족회와 상의한 후 일정을 잡아 동시에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중앙 정부에서 그 관례를 깨 버린 것이다.

「귀족회는 이 발표를 인정할 수 없다」

「황태자 전하는 훌륭하시지만 절차는 지켜져야 한다!」

「절차에 따라 귀족회의 동의를 얻어 정당하게 황위에 올라야 한다!」

물론 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카리엘과 이야기를 끝낸 후 재상과 대신들은 곧바로 귀족회에 이 사실을 말했고, 고위 귀족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빠르게 다음 황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안정시키자는 것.

하지만 귀족들은 관례를 들먹이면서 반대했다.

카리엘이 황제로 옹립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절차에 따라 진행하자는 것.

명분은 맞았다.

황태자인 카리엘이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절차를 지켜서 정당성을 지키자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계속 질질 끌면서 카리엘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1. 범죄 집단 및 혁명가들을 쳐 낼 것.

2. 귀족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

크게 이 두 가지를 원할 것이다.

제국이 위기에 처했고 그로 인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카리엘이지만, 그렇기에 귀족들 역시 카리엘과 협상할 명분이 있었다.

귀족들의 협조 없이는 제국이 이 위기를 온전히 타개해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기에,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대신들과 재상은 곧바로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카리엘 역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폐하께서 나를 다음 황제로 지목하셨으나 현재 제국은 위기 상황이다. 모든 일은 이 혼란이 끝난 후로 미룰 것이다. 다만 현재 폐하께서 국정을 운영하시기 어렵기에 현 시간부로 폐하의 모든 권한은 내가 이행한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황제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이양했다는 것을 밝히며 황제의 홀과 반지를 공식 석상에서 보여 주었다.

제국의 위기 상황이기에 몸이 아픈 황제 대신 황태자가 모든 권한을 쥐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에도 강행하는 모습은 카리엘이 귀족들의 협상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에 귀족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카리엘을 지지했던 중립파조차 귀족회에 참여하여 카리엘의 독단적인 행보를 규탄하는 데에 참여할 정도였다.

“전하, 귀족회에서 찾아왔습니다.”

시종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공작과 주요 귀족들이 빠진 후, 귀족회를 이끌어 나가는 캉테 백작이 들어왔다.

“앉지.”

카리엘의 말에 캉테 백작은 조심스럽게 앉았다.

“무엇 때문에 찾아왔지?”

카리엘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캉테 백작은 조심스럽게 귀족회의 의견을 전했다.

“절차를 지키려면 귀족회를 설득시켜라. 이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비록 주요 귀족들이 빠져나간 귀족회지만 대표로 온 자답게 캉테 백작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의 긴장했던 표정과 달리 단호함이 깃든 두 눈을 마주하며 카리엘이 말했다.

“쓸데없이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말하겠다.”

카리엘은 보고서 하나를 캉테 백작에게 내밀었다.

“이건…….”

“현재 세일럼 항구의 발전 속도와 계획이다.”

그리고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캉테 백작에게 물었다.

“만약 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 정도 속도를 낼 수 있었을까?”

“그건…….”

“그리고 분명히 약속했을 텐데? 난 약속대로 세일럼 항구 내에서만 범죄자들과 혁명 세력을 기용하고 있다.”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는 카리엘.

그렇기에 귀족들은 더 불안했다.

조금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이 황태자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귀족들을 얼마나 박살 낼지.

그렇기에 지금 무리해서라도 자신들의 안전을 약속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오나 귀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위기 상황을 이용해 발목을 잡는 건 아니지 않나?”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에 캉테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족회도 전하를 옹립하고자 하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정당성을 갖추고 절차에 따라 옹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고 공작들과 변경백 일부, 그리고 황자분들이 참석한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러야겠지요.”

“그런다고 하지 않았나?”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권한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사옵니다.”

캉테 백작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자신들과 상의해서 일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귀족들의 권한을 보장할 방법을 찾고 혁명 세력을 밀어내 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지금도 카리엘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면서 귀족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건 제국민들한테는 좋을지 몰라도 귀족들에게는 행동반경을 좁히는 결과를 낳으니 막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카리엘의 체제에서 한자리를 차지해 보겠다는 몇몇 귀족들의 욕심도 숨어 있었다.

그걸 잘 아는 카리엘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권한을 넘기셨다. 이것 외에 무슨 정당성이 필요하지?”

카리엘의 물음에 캉테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국의 중심을 지키는 건 황실이오나 제국을 지탱하는 한 축에 귀족들이 있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지요. 유구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관례를 깨신다면 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옵니까?”

“공작들이 돌아온 후를 얘기하는 것인가?”

“…….”

침묵하는 캉테 백작을 보면서 카리엘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두 공작이 카리엘에게 우호적이라 해도 귀족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황태자를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보이는 자신감이었다.

분명 제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는 귀족들의 반발을 강제로 누르고 황제가 된 이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황좌에 집착했기에 일어난 일.

카리엘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를 끌어내린다? 오히려 좋았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든 해 보게. 그대들이 이긴다면 군말 없이 요구를 들어주지.”

비웃음이 담긴 카리엘의 말에 캉테 백작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 * *

그렇게 캉테가 물러난 지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귀족들의 반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절차에 따라 진행하자는 요구와 함께 그들은 관료들의 업무를 사사건건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리엘은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반발하는 귀족들만 골라서 잡아들였다. 귀족이기에 넘어갔던 사소한 죄목들을 근거 삼아 잡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관망하던 귀족들도 반발했다.

마치 평민처럼 사소한 것으로 잡아들이는 카리엘의 모습에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귀족회의 주장이 대전 회의의 정식 안건이 되면서 정식으로 회의가 열렸다.

“긴말할 것 없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타리온을 불렀다.

“폐하의 유언장이다. 이미 변경백들과 대신들의 동의를 얻은 상황이지. 남은 건 귀족회뿐이야.”

카리엘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변경백들까지 모두 동의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었다.

완벽한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선 결국 귀족회가 필요했다.

바로 그때 카리엘의 몸에 붉은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마에 떠오르는 선명한 문장.

“저…… 저건!”

한 귀족이 카리엘의 이마에서 빛나는 문양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재상과 대신들, 그리고 시종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을 뵈옵니다!”

초대 황제의 인정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인사에 귀족들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카리엘이 황제가 된 이후 반발할 귀족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덫을 놓았음을.

그것을 증명하듯, 귀족들이 대전에 모여 있는 동안 감찰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넘어가 주었던 귀족들의 범죄를 하나하나 집어내 잡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기회는 충분히 준 것 같군.”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대전을 나가는 카리엘.

그런 그를 보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귀족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미 기회는 충분히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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