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2. 검을 뽑아 든 혈태자! (2)
아직 미리엘이 듣기엔 잔혹한 진실.
자신의 오빠일지도 모르는 이가 반란군의 수장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들려주어야 한다.
아직 어린 미리엘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샤워를 하고도 혹시 피 냄새가 남았을까 싶어 향수까지 뿌리고 미리엘의 궁으로 출발한 카리엘.
오랜만에 카리엘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반가워하며 달려온 미리엘은 심상치 않은 카리엘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엘.”
겨우 미리엘을 부른 카리엘이 주변을 물렸다.
단둘이 의자에 앉은 카리엘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오빠가 미리엘이 꼭 알아야 될 진실을 알려 줄 거야. 듣기 어려울 수도 있어. 그러니…… 힘들면 멈추라고 꼭 말해. 알았지?”
카리엘의 말에 미리엘이 떨리는 눈동자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숨을 쉬면서 머뭇거리던 카리엘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져 버린 소문이기에 언젠가는 미리엘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직접 설명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설명하고는 있었지만 점차 울먹거리는 모습이 되어 가는 미리엘을 보고 있자니 설명하기가 고역스러워졌다.
“……그만할까?”
카리엘의 물음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미리엘.
진실을 전부 알고 싶다는 듯, 울먹이면서도 전부 듣고자 했다.
결국 전부 설명을 끝낸 카리엘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리엘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아?”
카리엘이 조심스레 묻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미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 내 오빠 아니야.”
“……응?”
“내 오빠는 세 명이야.”
미리엘의 말에 카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맞아. 그 사람, 미리엘 오빠 아니야.”
* * *
떨리는 손으로 꿋꿋하게 말하는 미리엘을 진정시키고자 한동안 그녀의 궁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낸 카리엘은 밤이 되자 조용히 궁에서 나왔다.
“황녀 저하는…….”
“자고 있어.”
카리엘의 답에 타리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사실일 텐데도 꿋꿋하게 버텨 준 미리엘을 위해서라도 좀 더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황녀 궁의 시녀들을 잘 단속하라고 전해.”
“예.”
카리엘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충격받은 것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각별히 신경 쓰라고 시종들에게 일러 둔 참이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곧장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폐하께선 주무시나?”
“아직 깨어 계십니다.”
시종장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조용히 황제와의 독대를 청했다.
카리엘은 침상에 누워 있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 뒤, 의자를 가져다 황제 옆에 앉았다.
“……미리엘은?”
“잘 견디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황제가 자신의 업보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황좌에서 물러나 다른 동생들처럼 암습을 받거나 독을 먹고 죽을 것이다.
특히 장자인 자신이라면 황제가 된 동생들이 반드시 죽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이 지금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민심은 돌렸습니다. 남은 건 토벌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뿐입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을 낳는 것에도, 혼인하는 것에도 모두 정치적으로만 임했던 황제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침묵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황제가 피식 웃었다.
황위에 올라 기뻐해야 함이 분명하건만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카리엘을 보면 신기했다.
자신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의 아들이 분명하건만 어째서 이렇게 다른 성격을 가진 자식이 태어났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종장.”
“예.”
황제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며 다가온 시종장이 품속에서 금색 봉투를 꺼내 들었다.
“눈치 빠른 놈. 그래, 짐의 유언장이다.”
단번에 눈치챈 카리엘을 보면서 미소를 지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의 유언장이다. 이미 4대 변경백의 동의를 받아 두었다.”
다음 황위를 카리엘에게 물려주기 위한 준비.
국경을 지키는 4대 변경백이 동의한다는 직인이 유언장에 찍힌 시점에서 다음 대 황위에 대한 정당성은 거의 다 확보되었다.
황궁 기사단장인 아켈리오의 직인까지 찍혀 있으니 남은 건 대신들과 재상, 그리고 귀족원의 동의뿐이었다.
재상을 통해 급변 사태를 준비하라고 했으니 사실상 귀족들의 동의만 있으면 되지만, 그건 황제가 마지막 순간에 직접 요청할 생각인 듯싶었다.
“짐의 몸이 두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는 버티지 못할 듯싶구나.”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늙은 시종장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카리엘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한 달은 넘게 남았다고 알고 있었네만…….”
“몸이 급격히 나빠지셨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 카리엘.
그가 죽기 직전 얼굴과 비슷했다.
전체적으로 홍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볼과 입술.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최근 들어 가장 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게 건강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님을, 카리엘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말 얼마 안 남으셨군.’
황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고 있음을 알기에 카리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카리엘을 보며 황제가 무서운 입술을 뗐다.
“아마 이게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 테지.”
그렇게 말한 황제가 카리엘의 손을 잡았다.
“오늘부로 짐의 모든 권한을 넘긴다.”
“그게 무슨…….”
카리엘이 당혹스러워하는 사이에 그의 손안에 놓인 하나의 반지.
대전에 있는 옥새 보관함을 열 수 있는 열쇠.
여태껏 시종장을 통해 잠시 빌려 왔던 그 반지가 정식으로 카리엘에게 넘겨진 것이다.
황제의 입에서 권한을 넘긴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황제의 피가 묻은 반지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 순간 카리엘의 몸에서 화기가 내뿜어지며 반지에 흘러들어 갔다.
“큭!”
고통스러워하는 카리엘을 본 황제가 가만히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이것인가?”
“예.”
비밀 수호대가 그토록 기다렸던, 자격을 가진 자.
현 황제는 물론이고 몇 대에 이르는 동안 단 한 명도 가지지 못했던 자격을 갖춘 자가 마침내 정식으로 초대 황제의 반지의 인정을 받았다.
“……아쉽군. 짐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황궁 안에 숨겨진 비밀.
그 모든 것을 보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약과 흑마력에 오염된 정신을 정화했으나 완벽하게 정화하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격을 갖춘 카리엘의 뒤를 따라 비밀을 엿보고자 했으나 오염된 황제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기에 결국 이렇게나마 볼 수밖에 없었다.
“저분이…… 초대 황제신가?”
“그렇사옵니다.”
카리엘의 머리 위로 나타난 붉은 형체.
초상화에 나온 초대 황제의 형체가 싸늘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동안 지은 죄를 꾸중하듯 냉엄하게 바라보던 이내 카리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붉은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인정한다는 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카리엘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붉은 기운에 의해 수르트와 정령왕의 파편, 그리고 스콜이 형체를 이루며 카리엘의 몸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재밌군.”
카리엘이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내며 얻은 것들.
그것들이 카리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붉은 파장은 황제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 서서히 카리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헉…… 헉…….”
“문양이 나타났군.”
오래전에 사라졌던 황실의 문양.
그것이 카리엘의 이마에 나타났다.
그것을 확인한 시종장이 그 즉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을 뵙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황제의 눈치를 보는 카리엘.
하지만 황제는 괜찮다는 듯 웃기만 했다.
대가 끊어진 줄 알았던 황실의 힘이 다시 부활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관대했다.
“짐이 부활시킨 것이다. 바로 짐이!”
끝내 비밀 수호대에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괜찮았다.
오염된 정신과 썩은 내가 진동하는 몸으로도 기어코 황실의 진정한 힘을 부활시켰으니까.
이것만으로도 그동안 지은 죄 대부분은 잊힐 수 있을 것이다.
“되었다……. 이것으로 되었어.”
황제가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폐하!”
“괜찮습니다. 기절하신 것뿐이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계신데 어찌 그런 행동을 한 것이지?”
“저희 비밀 수호대는 인정을 받은 자만을 황제로 모십니다.”
“……자네.”
“폐하께서도 그걸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저리도 기뻐하신 것이지요.”
마침내 부활한 진정한 황제.
그걸 알기에 현 황제가 기뻐한 것이다.
카리엘이 표정을 구긴 채 가만히 서 있자 그런 그를 향해 시종장이 황제의 마지막 명령을 전했다.
“폐하께서 사전에 내리신 마지막 명령입니다.”
다음 대 황제에게 부탁하는 마지막 명령. 유언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다음 대 황제가 꼭 지켜 주어야 하는 게 제국의 관습이었다.
설사 찬탈당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명령만큼은 웬만하면 들어주어야 했다.
그렇기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무릎을 꿇었다.
“태자가 초대 황제의 인정을 받았음을 제국 전역에 알려라. 이는 짐이 죽기 전에 내리는 마지막 명령일지니…… 부디 들어주기를 바라노라.”
황제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명령.
이 명령을 들어줄 경우 카리엘의 정통성에는 절대적인 힘이 생긴다.
하지만 그만큼 황위를 물려주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사라졌던 황실의 문양이 부활했는데 그 누가 감히 카리엘의 황권을 의심할까.
이것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참고로 폐하께선 들어주시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
카리엘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제이기에 마지막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시종장의 말을 들은 카리엘은 이를 갈면서 부디 동생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힘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국 믿을 건 동생들뿐이다. 믿는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폐하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시종장은 품속에서 정식 명령서를 꺼내 건네주고는 허리를 숙였다.
* * *
황제의 반지와 마지막 명령서를 들고 황제의 궁을 나온 카리엘은 피곤한 표정으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지금 당장 대신들과 재상한테 보잔다고 전해.”
“혹 폐하께서……?”
타리온이 사색이 된 채 묻자 카리엘이 고개를 젓고선 황제의 반지를 보여 주었다.
“아…….”
황제의 반지를 손에 쥔 카리엘. 그것이 어떤 뜻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타리온은 황급히 두 무릎을 꿇고 외쳤다.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타리온의 외침에 눈치 빠른 시종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똑같이 외쳤다.
그러자 뒤이어 기사들과 시녀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외침에 카리엘의 표정이 점점 더 썩어 들었다.
그토록 피하고자 했음에도 결국 이 자리로 되돌아온 현실에 카리엘은 이를 갈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