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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91화 (91/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2. 검을 뽑아 든 혈태자!

타리온의 충격적인 발표는 수도를 크게 뒤흔들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기 마련.

불륜, 비밀 같은 이슈에 관심이 많은 귀족들은 순식간에 이 이슈를 퍼뜨려 나갔다.

단 하루 만에 데릭에 관한 사실이 수도 전체에 퍼져 나갔다.

사실 이 정도했으면 그만이다. 어느 정도 명분은 쥐어졌으니까.

하지만 카리엘은 확실하게 하고자 황실의 비사를 더 풀어냈다.

「황실 비사의 주인공 데릭. 그의 비밀은?」

무려 황실 공영신문에 거창한 제목으로 나온 비밀.

현 황제의 동생과 미리엘의 어미인 3황비.

본래 이들은 연인이었다.

하지만 현 황제는 상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3황비의 가문과 동생이 결합된다면 추후 자신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균형을 맞춘다는 미명 아래 중립파의 대표 격으로 3황비와의 혼인을 추진했다.

중립파의 거두인 시카리오 후작가 출신의 황후가 죽었기에 명분까지 있었다.

그 이후는 누구나 알고 있듯 위협이 되었던 동생은 벨푸르스 가문과 혼인했고, 황비는 미리엘을 낳고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극적인 이야기.

악당은 현 황제였고, 주인공은 벨푸르스 가주와 3황비여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선을 넘었다.

타리온은 모든 비밀을 밝히면서 다시 한번 기자들 앞에서 강력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사정은 딱하지만 흑마법사와 손잡고 반란을 주도한 벨푸르스 가문과 데릭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대역 죄인이다.’”

타리온의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타리온은 표정 변화 없이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께선 과거의 과오를 통감하며 몇 번이나 기회를 주셨다. 더 이상의 자비는 기대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한 장의 문서를 들어 올렸다.

원한다면 데릭을 벨푸르스 가주의 아들로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글과 ‘황족’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힌 증서.

거기에 짧지만 황제의 사과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리온의 발표에 데릭을 불쌍하게만 보던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정은 딱하지만 무려 제국의 황제가 손수 사과문까지 작성했음에도 무시한 것이다.

그러자 감춰 왔던 진실이 보였다.

데릭이 ‘4황자’라는 신분에 집착했던 이유와, 혼란을 의도적으로 길게 끌고 왔던 이유가.

“데릭에 관한 발표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현 시간부로 반란군에 협조하는 모든 세력은 참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타리온이 회견장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웅성거리는 기자들.

“4황자에 집착하는 게 이상하네.”

“그러게.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다더니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생각일까?”

분면 그의 사정은 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자신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무너뜨리려는 자에게 더 이상의 자비나 동정심 같은 것은 없었다.

기자들의 이런 생각은 곧바로 기사로 작성되었고, 그것을 보는 제국민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데릭! 그자가 진짜 원하는 것은 제국의 혼란?」

「흑마법사의 하수인에 불과한 데릭. 그는 영웅이 아니다」

신문사들이 연이어서 데릭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여론은 서서히 바뀌어 갔다.

바로 그때 카리엘이 직접 나섰다.

“억울하다면 홀로 수도로 오라. 그대가 원하는 바를 들어 보겠다. 또한 지금 멈춘다면 반란군에 대한 모든 죄를 사해 주겠다.”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것 같은 카리엘의 발표.

하지만 반란군에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그 시점에서 갈팡질팡하던 제국민들은 온전히 카리엘에게 돌아섰다.

이제 데릭은 반란군의 수장일 뿐 더 이상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 * *

“여론이 바뀌었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과거.

데릭이나 벨푸르스 가주가 풀었다면 혼란이 예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황실이 먼저 풀어 버리면서 이미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음을 강조하며 저들의 의도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폐하를 설득한 시점에서 사실상 명분은 끝난 셈이지.”

명분을 쌓기 위해 황제를 만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리엘은 황제의 비사를 공개하기를 원했다.

과거의 과오를 들춰내는 것은 죽음을 앞둔 황제라 해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카리엘은 기어코 황제를 설득했다.

강력한 명분을 쥐고 저들을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닌 반역자들로 몰아가겠다고. 동시에 황제가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제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겠노라 약속했다.

그 덕에 겨우 황제의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고, 현 상황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데릭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큼지막한 놈인 건 놀랍지만 거기까지지.’

카리엘이 전생에 얻은 정보는 데릭이 진짜 ‘황족’이라는 것뿐이었다. 황족의 특징을 전부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황족 특유의 마력 파장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4황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후에 발견된 황제의 일기장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혼인한 황후와 황비들을 제외하곤 자식들을 낳지 않았다는 것.

자신의 사생아라 소문난 이들에 대한 억울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데에 씨를 뿌리지 않았다는 것은 잘한 일이지만 평가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동생의 여인을 가로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황제의 평가가 수직하락하고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게 카리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여전히 카리엘에 대한 제국민들의 신뢰는 굳건한 덕이었다.

“후…… 어찌어찌 일은 해결됐네. 이제 토벌군이 흔들리는 일은 없겠지?”

“그럴 겁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엘이 가장 걱정했던 것.

그것은 반란군의 세 치 혀로 토벌군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 황실의 비사까지 풀었으니 그가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월크셔 공작과 동생이 최대한 빨리 토벌하는 것뿐이었다.

“성국은?”

“아직 움직임은 없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카리오 후작이 전력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있으니 성국도 쉽게 움직이긴 힘들 것이다.

서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륙 최강을 다투는 제국의 서부 함대가 집결하기 시작했으니 아이론도 눈치를 보기는 할 것이다.

문제는 남부였다.

“탈로스와 로테온의 병력들이 접경지역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마스터들은?”

“아직까진 움직임이 없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또 다른 보고서를 읽어 나갔다.

“해적들 때문인가? 예상외로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네.”

해적들에 의한 피해가 누적되면서 탈로스와 로테온 둘 다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미 해군을 모아서 대응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뿌리를 뽑으려면 아이사 군도까지 가야 했으나,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국이 공세적으로 나오는데 국경선을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열 받은 제국이 국경을 칠 수도 있기에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마스터들을 이용해 바다를 지키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뿐이다.

“제국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겁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카리엘이 걱정하는 시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군과 소국 연합과의 전쟁 중 황제가 숨을 거둘 때.

바로 그때가 걱정이었다.

탈로스와 로테온이 제국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어떻게 이용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 밟아 놔야 했다.

“변경백들이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겠어.”

마지막까지 걱정했던 남부는 알아서 잘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카리엘은 중앙만 신경 쓰면 된다는 뜻.

“지금부터 우리는 만약을 대비해서 움직인다. 타리온.”

“예.”

“나한테 불만 있는 귀족 놈들을 전부 파악해 놔.”

“잡아들이실 생각입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신다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 파악은 해 두어야지.”

“그들 위주로 정보 요원들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래.”

명령을 받은 타리온이 밖으로 나가자 카리엘은 이번엔 시종을 불러서 재상을 불렀다.

황제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시종장이 세심하게 보살피고 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두 달만 더 버텨 주셨으면 좋겠지만…….”

많이도 바라지 않았다.

두 달만 더 버텨 주어도 좋겠지만 예상과 달리 황제는 한 달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위중했다.

어쩌면 반란군이 전부 토벌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카리엘은 그것을 준비해야 했다.

“부르셨습니까.”

카리엘의 부름에 늙은 몸으로 황급히 달려온 재상.

그에게 앉으라고 권한 카리엘은 숨을 돌릴 시간을 충분히 준 후에 입을 열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폐하께서 위중하시오.”

“……얼마나 남으신 것입니까?”

단번에 카리엘의 말한 바를 눈치채고 묻는 윈스턴.

“두 달을 예상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소.”

“……다음을 준비해야겠군요.”

윈스턴의 말에 카리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슬슬 준비해야 했다.

중립파가 카리엘을 지지하고 두 공작마저 카리엘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밀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의 불만을 사전에 막으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신다면 정식으로 공표할 것이지만…… 그러시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야 하오.”

이미 시종장을 통해 어느 정도 준비는 끝내 놨지만 보다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뒷말이 없도록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황제.

이왕 황제가 되려면 완벽한 황제가 되어야만 이 혼란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재상을 통해 그 준비를 맡기려는 것이다.

“모든 준비는 재상에게 일임하겠소.”

“전하께오선…….”

“난 검을 뽑을 것이오.”

단호함이 깃든 카리엘의 눈을 본 윈스턴은 본능적으로 피바람이 불 것을 깨달았다.

* * *

그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윈스턴에게 내정을 맡긴 카리엘이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혼란이 될 씨앗은 시작부터 밟아야 하는 법.

반란군에 동조한 이들은 모두 죽여 버릴 기세로 카리엘이 직접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황실을 능멸하고 제국에 혼란을 가중시킨 죄. 참형이다.”

제국 내에서 데릭을 도와 여론을 만들었던 범죄 조직의 수장을 카리엘이 직접 참형에 처했다.

귀족 신분으로 재판을 기다렸던 자들 역시 카리엘이 직접 즉결 처형을 시켜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신속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판단이 애매한 자들은 카리엘이 직접 처리해 주니 재판관들도 더 기다릴 것 없이 빠르게 재판을 한 것이다.

반역죄에는 자비가 없음을 카리엘이 몸소 보여 주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수도 내에서 데릭을 따랐던 자들을 직접 처단한 후 황궁으로 돌아온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물었다.

“후…… 미리엘은?”

지친 표정으로 묻는 카리엘을 보며 타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미리엘의 귀에도 황실의 비사가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

자신의 어미에 관한 진실을 알 권리가 있기에 막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늦게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카리엘의 바람과 달리 일찍 진실을 알게 된 미리엘.

카리엘이 울고 있을 미리엘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타리온이 막아섰다.

“전하.”

“왜?”

“씻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몸을 바라본 카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옷 여기저기에 묻은 피를 본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혈태자가 되어 버렸네.”

씁쓸함이 담긴 카리엘의 모습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인 타리온.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카리엘은 씻고 나와서 곧바로 미리엘이 머물고 있는 궁으로 향했다.

모든 진실을 직접 알려 주고 데릭에 대한 처분을 말해 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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