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0. 카리엘의 위험한 계획 (4)
다시금 시작된 대전 회의.
이번에도 죄인처럼 중앙에 선 카리엘이 가만히 신임 재상 윈스턴을 노려보았다.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화려한 언변으로 압박해 오는 윈스턴.
저런 자가 왜 기억에 없었는지, 카리엘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무솔리니에 밀려 물러나야만 했던 과거의 망령.
낙향해서 작은 영지를 꾸려 나가던 망령을 다시 중앙으로 끌고 온 것이다.
전생에서라면 아직까지 무솔리니의 시대였을 테니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그 이후에는 늙어 죽었거나 몬스터에 죽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역시 망령이어도 경험은 무시 못 하는 건가?’
철저하게 귀족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국의 체제를 기반으로 카리엘의 말에 반박해 나가는 윈스턴.
무솔리니처럼 허를 찌르는 한 방은 없었다.
하지만 경험과 연륜이라는 두터운 방어는 카리엘조차 쉽게 뚫을 수 없었다.
1황자라는 신분으로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자신을 상대하는 모습에 카리엘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네.’
보통 이 정도 했으면 조금쯤은 물러나서 일부를 허용하고 나머지는 막는 전략을 취하는 게 일반적인데, 윈스턴은 조금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상이 원하는 게 한창 일하고 있는 인재들을 전부 쫓아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그만두어야겠군.”
카리엘이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1황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유지되는 균형.
그것을 맞추려면 황자들 중 하나가 가야만 했다. 아니면 대신들 중 하나가 가서 항구 재건을 위해 힘써야 하는데, 가 봤자 욕만 먹을 자리에 가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탈로스도 견제해야 하고, 분쟁 지역에서 알짱거리는 소국들도 신경 써야 했다.
“……저하.”
“나를 부려 먹으려 했으면 준비라도 해 두든가. 아무것도 없이 항구에 처박아서 발전시키라 명했으면 뭐라도 지원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카리엘의 말에도 윈스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이 얼굴에 가득 담겨 있자 카리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세일럼에 한해서만 기용하도록 하지. 여기까지가 내가 물러날 수 있는 최선이다.”
“후…… 다른 건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대역 죄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제국에 어떤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 알 수 없사옵니다. 게다가 이미 그들 중 일부가 흑마법사와 연루된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철저히 감시해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윈스턴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저렇게 둘 수는 없지 않나? 선대가 지은 죄로 계속해서 저리 놔둔다면 범죄자만 될 뿐이야. 기회를 주어서 죄를 씻고 나오게끔 한다면 자연스레 교화되지 않겠나?”
“이상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글쎄…… 그걸 세일럼에서 확인하면 되지 않겠나?”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설득은 끝났다.
어차피 재상이 있는 이상 완벽한 설득은 어렵다. 이럴 때는 그저 최소한의 명분을 만들고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후…… 폐하를 뵙고 왔다.”
황제라는 최강의 패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윈스턴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족들을 무시하고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귀족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설득 같은 걸 하지도 않았겠지.”
그 말에 카리엘의 스타일을 잘 아는 대신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중앙에서 카리엘을 겪어 본 귀족들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회를 주게. 저들이 능력을 증명하고 제국의 체제에 동화될 수 있는 기회.”
“후…… 지방의 귀족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공을 세우더라도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뺏을 수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영지를 가진 영주들의 권한.
그것을 지켜 준다는 말에 몇몇 귀족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카리엘이 쐐기를 박았다.
“귀족들 중에 사생아를 만든 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도 보내라. 능력이 있다면 알뜰하게 써 주마.”
그제야 윈스턴도 더는 막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깔끔하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 애초에 그 역시 딱 이 정도로 타협하길 원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련한 양반이군.’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양반이지만 물러서야 될 때를 정확히 알았다.
무솔리니에 비하면 약간 처지기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균형 정도는 잡아 줄 것 같으니까.
재상이 물러나니 다른 귀족들도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 모든 귀족들의 동의를 이끌어 낸 카리엘은 다시 한번 귀족들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말과 함께 대전을 빠져나갔다.
“곧바로 가실 생각입니까?”
뒤따라 나온 월크셔 공작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죽음이 머지않았기에 시간이 없었다.
항구를 발전시킬 계획만 세우고 곧바로 황궁으로 넘어와야 했다.
“동생 놈들에게 이것 좀 전해 주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제국이 나아갈 방향.”
그 말을 끝으로 동부 항구로 떠날 채비를 하러 떠나는 카리엘.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월크셔 공작은 데이비어 공작과 함께 서둘러 두 황자들을 만나러 갔다.
* * *
오늘도 미리엘 황녀의 궁에는 두 황자가 모여 있었다.
“바로 떠나셨단 말입니까?”
“……예.”
2황자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답한 월크셔 공작이 갑자기 떠나 서운해하는 2황자를 위로하는 대신 품속에서 카리엘이 맡긴 서신을 건네주었다.
“이건…….”
“……이게 가능합니까?”
서신을 같이 읽은 3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러자 두 공작들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리엘의 계획은 굉장히 위험했다.
제국 내부적으로 봐도, 그리고 서대륙 전체로 봐도 위험했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제국은 안정을, 타국은 내부의 불안함을 떠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하루라도 빨리 제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신다는 거군요.”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세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하루라도 빨리 황위를 내려놓겠다는 의지가 담긴 계획이었다.
“……돌아오시면 또다시 피바람이 불겠습니다.”
“에휴…….”
두 황자들의 한숨에 두 공작들은 쓴웃음만 지었다.
카리엘이 돌아오는 순간 고생길이 훤히 열릴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두 황자들의 모습에 공작들의 눈빛은 묘하게 변했다.
* * *
그렇게 황궁에서 두 황자와 공작들이 카리엘이 남겨 준 숙제를 보면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카리엘은 다음 계획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정보다 너무 빠르다.”
황제가 전생보다 너무 빨리 죽는다.
그것 때문에 카리엘의 계획이 죄다 꼬여 버렸다.
이제야 어째서 황제가 자신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는 황제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황제가 갑자기 죽는다면 제국은 갈라질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카리엘의 완전한 은퇴를 미뤄 왔던 것이다.
‘시종장의 계책이겠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황제가 매번 카리엘을 막아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밑그림은 시종장이 그리고 황제는 정신이 온전할 때마다 명령을 내리면서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했을 것이다.
“미치겠군.”
카리엘이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비공선에 올라탔다.
차라리 미리 알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경우 아주 잠시 누렸던 행복마저 깨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돌아간다.’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로 굳게 결심하며, 카리엘은 세일럼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모든 관료들을 불러 모았다.
“계획을 앞당겨야겠다.”
“저하! 지금도…….”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카리엘.
그 모습에서 일이 잘못됐음을 깨달은 관료들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현재 계획은 어디까지 잡혔지?”
“2년입니다.”
“4년까지 늘린다. 그리고 기존 계획은 조금씩 앞당길 생각이야.”
“지금도 인원들이 하루도 안 쉬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원 충원을 해야지. 중앙에서 허락받고 왔으니 곧 몰려들 거야.”
카리엘의 말에 관료들의 표정이 죽을 것같이 변했다.
노동자들이 몰려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그들을 분류하고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것은 그들이 할 일이다.
결국 일이 늘어다는 뜻이었다.
“관료들도 충원해 줄 테니 죽을상 그만하고 나가 봐. 아, 자네는 남게.”
카리엘의 말에 마르크스 베버는 홀로 집무실에 남았다.
“해결은 봤다. 이 도시에 한해서라면 자유를 주지.”
“아…….”
“단! 증명을 해야 할 거야.”
단호함이 깃든 카리엘의 음성에 마르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유는 사라진다.”
“그런…….”
“잔인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카리엘의 말에 마르크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곳에 머물 기간은 두 달. 그 안에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돼. 숨은 혁명가들을 더 부르든 범죄자들을 빠르게 집결시키든, 두 달 안에 무엇으로라도 증명해.”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 기회를 잡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마르크스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뒤이어 타리온이 들어왔다.
“저하.”
“일이 급해졌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중앙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결국…… 이리되는군요.”
“후…… 짜증 나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지.”
제국이 분열되면 안 된다.
이것은 카리엘의 욜로 라이프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제국이 멸망한다면 아무리 얌전히 사는 카리엘이라도 결국 죽이려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은 굳건해야 했다.
“얌전히 살려고 하는데 자꾸 건드네.”
은퇴해서 얌전히 살겠다는데 세상이 그런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다.
처음엔 흑마법사가, 이번엔 타국들이 방해했다.
그렇기에 다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이참에 소국들을 쓸어버리고, 남부나 성국도 우리를 신경 쓰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야.”
다시 한번 결심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론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벌써?”
“예.”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를 적어 나갔다.
“남부를 조지기 전에 이 녀석들부터 처리해야겠네.”
카리엘의 계획에 뭔가가 추가되었다.
“타리온.”
“예.”
“올라가면 네가 정보부 수장을 맡게 될 거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흠칫했다.
“참고로 황실 직속 그림자들을 정보부에 통합할 생각이다.”
“위험합니다.”
“이대로 따로따로 운영하는 건 효율이 개판이야. 그러니까 각오해. 중앙으로 올라가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거야.”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 지금보다 더 말입니까!’
타리온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속으로 절규했다.
하지만 칭얼거릴 수는 없었다.
카리엘 역시 그 못지않게 일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두 달 내로 이곳을 뜬다. 그리고 폐하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소국들을 정리할 생각이야.”
“……빠듯하군요.”
“해내야 해. 그다음 계획들도 만만하지 않으니까.”
“예.”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책상에 놓인 카리엘의 노트.
그곳에 적힌 계획들을 보면 소국을 정리하는 것은 그저 사소한 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