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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87화 (87/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0. 카리엘의 위험한 계획 (3)

대전에서 나오자마자 황제의 궁으로 향하는 카리엘.

오랜만에 황제의 궁에 도착한 카리엘은 자신을 마중 나온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다르다. 하지만…… 익숙하군.’

전생에 자신을 마지막까지 보필했던 시종장.

그와 비슷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을 본 카리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비밀 수호대인가?”

카리엘의 중얼거림에 시종장이 웃는 표정 그대로 빤히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시종장의 말에 잠시 그를 한 번 더 쳐다본 카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

이젠 앉아 있을 힘도 없어 보이는지 간신히 눈을 떠 카리엘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오랜만이구나.”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나?”

그 모습을 본 카리엘이 시종장에게 눈길을 주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노인.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이미 때를 놓친 셈이니…….”

황제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이젠 정말 희망이 없어 보였다.

“어찌 된 것입니까?”

“숨겨진 저주가 있었더구나.”

“……저주 말입니까?”

흑마법사들이 만든 마약. 그것은 단순한 독약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리엘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지독했다.

보아하니 이런 상태가 된 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정보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황제가 의도적으로 막았다는 뜻이다.

‘변경백과 고위 귀족들은 알고 있었군.’

카리엘은 이를 갈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면 네가 도망갔겠지.”

황제의 말에 카리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얼마나 남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황제가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카리엘은 고개를 돌려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길어야 6개월이옵니다.”

대답을 들은 카리엘은 한참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건 앞으로 3~4개월 정도면 황제는 죽는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불렀다면 그 의도는 뻔했다.

“너라면 짐이 왜 이곳에 불렀는지 다 알아챘을 것이다.”

“……귀족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황제의 의도는 명확했다.

카리엘에게 황위를 물려주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어그러지게 생긴 것이다. 카리엘이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무난하게 그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하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엘이 일을 벌여 버린 탓에 귀족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새로이 판을 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황궁에 직접 불러들인 것이다.

“이미 변경백들, 고위 귀족들과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된 것이군요.”

“……그래.”

“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카리엘의 물음에 황제가 피식 웃으면서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밖으로 나간 시종장이 보고서를 들고 왔다.

카리엘은 특급으로 기밀 처리된 보고서를 앉은 자리에서 읽어 나갔다.

“…….”

“두 황자가 걷는 길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가 치고 나가는 법도 없지.”

황제의 웃음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말처럼 두 동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하나는 외교와 군부를, 다른 하나는 내실과 감찰을 장악했다.

각자가 잘하는 방향에서 슬슬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를 더 잘한다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게다가 아직 미숙한 점이 더러 보이는 것을 보니 시간이 더 필요하기는 했다.

문제는 황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

“……남은 건 무엇입니까?”

“조율.”

황제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본래 이것은 황제가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현재 황제는 장시간 귀족들을 만나며 조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책임하다 생각하느냐?”

젊었을 때는 암군이었으며, 카리엘이 활동할 때쯤엔 모든 일을 미루고 잠적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모든 일을 미루는 무책임한 황제.

그것이 현 황제였다.

“…….”

“네 생각처럼 난 암군이요,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끈 망군이다.”

그토록 자존심 강한 황제가 순순히 인정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카리엘은 황급히 황제를 부축했다.

갑자기 기침하면서 피를 토해 냈기 때문이다.

한참을 격한 기침을 하던 황제가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신 것인가?”

“예, 고통에 기절하셨을 뿐이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다 흠칫했다.

고통에 기절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뉘앙스의 말. 그건 그보다 심한 일이 있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힘드실 것이옵니다.”

“저주 때문인가?”

“본래 심약하신 분에게 저주가 깃들었습니다. 게다가 마약을 처방하고 있사오니 더욱 힘드실 것입니다.”

마약을 완전히 끊을 수 없는 몸.

거기다 저주가 함께한다.

그런데 가뜩이나 의심이 많고 질투심으로 가득한 황제가 가까스로 그것을 버티고 있었다.

시종장이 옆에 있었기에 간신히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정확히 뭐지?”

황위를 주고 싶다는 뻔한 것을 묻는 게 아니었다.

“그건 황위에 오르신다면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시는 순간 황가의 모든 비밀을 알 자격을 얻으실 것이옵니다.”

시종장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폐하께서는…….”

카리엘의 물음에 시종장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결국 황가의 비밀을 전부 알지 못했다.

‘시종장이 어떻게 황제의 마음을 붙잡았는지 알겠군.’

황가의 비밀을 다시금 세상에 드러낸 황제.

동시에 위대한 제국을 일으킬 기반을 만든 황제.

그렇게 기억되길 원하는 것이다.

또한 죽기 전 황가의 비밀을 엿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꼬였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무거운 마음으로 황제궁을 나오자 두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저하를 뵙습니다.”

귀족파의 거두인 두 공작이 직접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카리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내 궁으로 갑시다.”

카리엘의 말에 두 공작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 * *

“저하!”

궁으로 향하자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시종들과 기사들, 그리고 친위대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카리엘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내 방은 비어 있나?”

“예…… 옙!”

“차 좀 준비해 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카리엘이 두 공작과 함께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자 얼마 뒤 티 세트가 들어왔다.

“두 공작은 어디까지 아는 것이오?”

“폐하께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까지 아옵니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월크셔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무얼 원하는 것이오?”

“저하께서 황위를 받으시길 원하옵니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월크셔 공작.”

“……예, 폐하.”

“우리가 약속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닐 텐데?”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는 월크셔 공작.

데이비어 공작 역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둘의 모습에 잠시 분노하던 카리엘은 감정을 다스렸다.

“일단 들어 봅시다.”

카리엘이 진정했다 여겼는지 데이비어 공작이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두 공작과 변경백들이 황제의 상태를 알게 된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카리엘이 수도를 떠나고 하나둘 알게 되면서 준비를 시작했으니까.

“폐하는 상당히 오랜 시간 준비하셨군.”

“시종장이 바뀐 뒤부터 준비하신 것 같사옵니다.”

월크셔 공작의 말에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의 죽음.

이것은 카리엘이 일으킨 문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혼란을 조기에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카리엘이 중앙을 휘어잡아야 했다.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황제가 정식으로 선위를 약속해야 했다.

제국의 빈틈을 노리는 타국들을 막기 위해선 중앙의 안정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했다.

카리엘은 이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두 공작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이오?”

“어차피 황위에 오래 계시지 않을 거 잘 압니다.”

“이 혼란이 잠재워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두 공작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고? 또 큰일이 터지면 내 은퇴는 또 뒤로 미뤄지는 것 아니오?”

“…….”

“…….”

카리엘의 물음에 두 공작의 입이 다물렸다.

“후…… 제국의 위기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내가 황위를 물려받는다 칩시다. 귀족들이 인정하겠소?”

이 사달을 낸 카리엘을 갑자기 황제로 옹립한다?

귀족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소신들과 변경백들이 억누를 것입니다.”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반란군에 가담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어차피 쭉정이들일 것입니다.”

카리엘의 말에 월크셔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쭉정이들이 반란군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제국 입장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자들이기에 오히려 그김에 정리되면 카리엘이 국정 운영하기가 더 편해질 것이다.

이미 월크셔 공작의 머릿속에는 여기까지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제국 내 내전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카리엘은 어렵더라도 그들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다.

‘공정하게 무너뜨려 주어야지.’

그들이 무시했던 평민들의 재능. 그것만으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귀족들을 하나둘 무너뜨리는 것.

그렇게 제국의 체제 자체를 바꿔 버리는 게 나았다.

“내가 거절한다고 해도 강제로 황위에 앉힐 생각이겠지.”

카리엘의 말에 두 공작은 침묵했다.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1황자라는 상징성 하나만 가지고도 제국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두 공작과 변경백들이 강제로라도 카리엘을 황위에 앉히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공녀와 결혼시켜 공왕 자리에 올려놓은 뒤 공국을 점령하는 한이 있더라도 황좌에 앉힐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야 한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지금의 계획을 밀어붙일 것이오.”

“뜻대로 하십시오.”

“상관없사옵니다.”

두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애초부터 고위 귀족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변경백들은 지방에서, 고위 귀족들은 중앙에서 가주 자리를 위해 숱한 싸움을 해 왔다.

고위 귀족 자리에서 밀려난 자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하위 귀족이 되었을 때에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능력은 없으면서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들, 또는 가문에서 밀려난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자들.

카리엘이 한차례 정리했음에도 제국에는 아직 이런 쓰레기들이 많았다.

“정말 괜찮겠소?”

“전 상관없습니다.”

월크셔 공작은 다시금 자신의 마음은 확고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카리엘이 계획한 것을 시행했을 때 자신의 가문이 어느 정도 이득을 볼 수 있는지, 그리고 파벌을 정리당했을 때의 손해까지 손익을 계산한 것이다.

데이비어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들과 카리엘이 시행할 계획들과의 연관성을 계산해 본 결과 이득이 더 많았다.

귀족파의 거두들이 찬성했으니 중립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이들이 찬성하는 건 카리엘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일단 돌아가겠소.”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월크셔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분. 그것을 쌓을 것이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두 공작을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는 황위를 못 받겠다는 의지였다.

“난 일 더미에 파묻히고 싶지 않소.”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두 공작들 역시 최근 엄청난 일 더미에 파묻혔기에 동의해 주었다.

혁명가든 범죄자든 끌어다 쓰기 위해서는 그들의 능력을 증명해 명분을 쌓아야 했다.

두 공작들과 딜을 했으니 남은 건 대전 회의뿐.

사실상 결론이 난 회의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귀족들을 위해서 ‘연기’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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