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9. 작은 항구에서 시작되는 심상치 않은 바람
이그니트 제국 역사상 동부 항구가 있었던 기간은 극히 적었다.
그런데 드디어 동부 항구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서대륙에서 가장 교역량이 많은 곳이 동대륙이다.
남부의 신대륙, 서부의 미지의 땅에서도 교역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동대륙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국은 동부에 위치한 항구를 간절히 바랐다.
그 간절한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활발하네.”
세일럼에 도착한 카리엘이 처음 본 풍경은 엄청나게 몰려온 제국민과 이곳에 있던 토착민들이 대규모 공사에 투입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건물이 올라가고 작은 배만 겨우 드나들 수 있었던 항구가 확장되어 가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이곳이 어떤 곳으로 발전하게 될지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
문제는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자가 바로 카리엘이라는 점이었다.
“……미치겠군.”
카리엘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얼굴을 구겼다.
중앙에서는 작정하고 이 항구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는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임시로 항구를 총괄하던 관료가 황급히 튀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공식적으로 분쟁 지역을 총괄하는 역할이었으나 어느 누구도 방금 튀어나온 관료가 총책임자라고 생각지 않았다.
모두 비공식적인 총괄자가 카리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침내 비공식적인 분쟁 지역 총사령관 자리는 공식적으로 카리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중앙에서 내려온 임명장입니다.”
“으음…….”
자신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임명장을 바치는 고위 관료를 보며 카리엘은 침음성을 삼켰다.
여태껏 미뤄 왔던 임명장.
본래 그에게 내려졌던 이 임명장을 휴양지에 처박히며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고위 관료가 ‘임시’로 이 임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것이 본래 받아야 할 자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후…….”
카리엘이 긴 숨을 토해 내면서 긴장한 표정으로 임명장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받는 순간 그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이상 망설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일 뿐.
굳은 표정으로 임명장을 받아 든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의 임명장을 받아 든 카리엘은 곧바로 일어나 명령을 내렸다.
“모든 관료들에게 3시간 이내로 집결하라고 해.”
“예!”
직무를 맡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왕 맡았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카리엘의 성정이었다.
“타리온.”
“예, 저하.”
“탈로스에 대한 압박은 멈추고 병력을 물려. 부사령관도 불러들이고.”
“예!”
타리온에게 명령을 내린 카리엘은 곧바로 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행정부로 이동해서 모든 관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도시 내에 흩어져 있던 고위 관료들이 전부 모이자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이곳을 책임지게 된 카리엘이라고 한다. 가장 먼저 그대들이 할 걱정을 덜어 주자면, 난 그대들이 하는 일에 크게 터치할 생각이 없다.”
카리엘의 말에 몇몇 관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도에서의 악명을 익히 알기에 쉬이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성과만 낸다면 크게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범죄는 제외해야겠지?”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둘러보면서 말하자 몇몇 관료들이 움찔거렸다.
노동자들을 더 굴려 볼 생각을 했다가 찔린 것이다.
“두 번째로 부족한 비용이 있으면 뭐든 말해. 합리적인 선이라면 중앙과 싸워서라도 자금을 대 주겠다.”
카리엘의 말에 다들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금과 물자, 노동력이 부족해 미뤄지고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성과급을 지금의 2배로 늘려 주지. 또한 성과를 보이면 휴가도 보장하마.”
카리엘의 말에 관료들의 표정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돈을 더 받고 싶나? 그럼 더 열심히 굴러라. 휴가를 가고 싶나? 그럼 성과를 내라.”
“정말 휴가를 주시는 겁니까?”
초췌한 표정의 한 관료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리엘에게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듯 카리엘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휴가를 받는 상위 50%까지는 유급휴가. 상위 10%는 휴가비도 별도 지급.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이는 자에게는 내 별장에서 특별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주지.”
카리엘의 말에 고위 관료들이 함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 물론 이건 고위 관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관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군부 역시 포함된다.”
그러자 자신들끼리만 경쟁할 줄 알았던 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경쟁이 빡세진 것이다.
바로 그때 한 젊은 관료가 손을 들어 말했다.
“관료들만 보상을 받는 겁니까?”
“아니. 당연히 노동자들도 보상을 받아야겠지.”
불만으로 가득했던 젊은 관료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신진 귀족 혹은 사회에 불만이 있는 젊은 지식층이 카리엘의 말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귀족들이나 관료들 중에 노동자를 특별히 신경 쓰는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리엘이 부패 척결에 앞장섰다고는 해도 노동자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거나 배려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가 기질이 있는 놈들이네.’
카리엘은 젊은 지식인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제국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위험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전생에 인재가 모자랐던 카리엘은 제국에 반발하는 지식인들까지 포섭해서 굴렸었다.
그만큼 쓸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내가 따로 추려서 보상할 생각이다.”
“……따로 말입니까?”
“그래. 관료들이랑 같이 경쟁하면 노동자들이 불리하지. 그러니 따로 보상안을 마련할 것이다.”
카리엘의 말에 젊은 지식인들의 눈에 불신감이 깃들었다.
카리엘 역시 다른 관료들처럼 겉으로 보기만 그럴듯한 보상안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5천 골드. 노동자들에게 성과급으로 줄 총금액이다.”
“헉!”
구체적인 금액을 밝히자 불신으로 물들던 젊은 지식인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 금액이 다른 데 도용될까 불안한가? 그럼 너희들이 직접 확인해라.”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카리엘의 말에 젊은 지식인들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불만만 갖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기회는 주겠다.”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주었다.
“노동자들의 성과급을 정확히 나눌 수 있도록 너희들이 직접 계획안을 마련해라. 또한 무리한 일을 시키지 않도록 적당한 일을 분배해야겠지? 마지막으로 도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역시 조사해라,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씩 처리해 나갈 수 있도록.”
카리엘의 말에 젊은 지식인들이 황급히 펜과 종이를 들고 적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한 고위 관료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하! 정식 관료 시험을 치르지도 않은 자들에게……!”
“용병으로 고용하는 거다. 불만 있나?”
용병이라고 못 박으며 고위 관료의 입을 다물려 버린 카리엘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말했다.
“정식 관료가 아닌 것이 불만이라면 시험에 통과해. 그럼 그 자리 그대로 정식 고용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눈을 돌려 저 멀리서 보고 있을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었겠지?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려라. 적어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차별받지 않는 환경을 제공해 주마.”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그렇게 충격적인 말을 연이어 내뱉은 카리엘이 사라지자 멀리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이 사실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집무실에 있는 창문으로 지켜보던 카리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성과급, 그리고 휴가.
직장인들이 가장 원하는 두 가지를 모두 제시했고, 관료들과 노동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제 저들은 알아서 밤낮없이 일할 것이다.
돈에 미친 자들은 성과급에 눈이 돌아갈 것이고 휴가를 원하는 자들 역시 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1황자가 머물렀던 별장에서 특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
그게 아니더라도 별도의 휴가비나 하다못해 유급휴가라도 받기 위해 알아서 구를 것이다.
“……지금 표정은 살짝 사악해 보이십니다.”
“사악하다니. 열심히 일할 노동자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얼굴이잖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리엘의 모습에 타리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도 수도에서 열심히 굴렀기 때문이다.
‘황궁에 계실 때보다 더한 것 같은데.’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강제로 굴리고 성과급을 던져 주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자발적인 노예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타리온이 카리엘이 굴리는 모습에 두려워할 때, 정작 카리엘은 더 수준 높은 노예를 찾고 있었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으려나?’
전생에 황제로 즉위해 있던 시절 온갖 시위에 등장했던 젊은 지식인이 생각났다.
결국 잘 구슬려서 열심히 써먹었었다.
아마 그가 죽은 이후 미리엘의 시대에 재상이 되어 열심히 굴렀을 것이다.
“혁명을 원하나? 그런데 어쩌지? 네 힘은 하찮은데.”
“…….”
“세상을 바꾸고 싶나? 그럼 밖에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직접 바꿔 봐라.”
“제국은 썩었습니다.”
“그 썩은 곳을 직접 바꾸라는 말이다. 자신 없나?”
“…….”
“말로만 혁명을 외치는 겁쟁이였나? 아니면 막상 해 보려니까 엄두가 안 나는 것이냐?”
살살 긁어 대면서 자극하자 곧바로 낚여서 관료 체계에 들어온 천재.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까지 한꺼번에 영입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혁명가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살살 긁어 주면 알아서 기어 들어와 개처럼 일했다.
한 사람만 영입하지 않고 대거 영입해서 뭐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발판만 만들어 주면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일했다.
그렇기에 개판이었던 제국이 겨우 재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리온.”
“예.”
“아무래도 이곳에는 인재가 부족한 것 같지?”
“음…… 그런 것 같긴 합니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더 많은 사람이 몰리고 더 커질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제국에 소문을 내 봐.”
“소문…… 말입니까?”
“그래, 제국의 현 체제에 불만이 있는 자들을 1황자가 고용했다고. 한번 바꿔 보라고 기회를 줬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흘려 봐.”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위험한 놈들 아닙니까? 굳이 그런 놈들을…….”
“쓸 만한 놈들은 중앙에서 죄다 데려갔잖아. 그러니 이런 애들이라도 써야지.”
현재 정신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는 제국이기에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봤던 이들까지 박박 긁어서 일을 시키는 중이었다.
그러니 사상이 불순한 놈이나 또라이로 불리는 놈들만 남은 것이다.
다급한 제국에서도 도저히 데려갈 엄두가 안 나는 놈들.
카리엘은 바로 그런 놈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