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8. 휴식을 방해한 대가는 크다! (3)
해적왕을 구워삶은 언변, 그리고 판을 읽는 능력.
도대체 저 나이에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싶은 능력이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과 갑작스러운 해적왕의 제안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항상 냉철한 샤르도나조차도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말로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았으나, 곁에서 직접 거래 현장을 지켜본 샤르도나는 처음으로 사람 자체에게 흥미가 생겼다.
“1황자라…….”
어렸을 적부터 괴물로 불렸던 그녀가 이제야 진짜 괴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다시 뵙기를…….”
귀한 구경을 시켜 준 카리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는 본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재빠르게 도시에서 벗어났다.
* * *
그렇게 공왕이 보낸 중재자마저 도시를 벗어난 후, 카리엘 일행은 편안히 도시를 돌아다녔다.
큰일을 하나 처리했으니 느긋하게 휴식을 취해 보려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저하.”
“왜? 이번엔 또 뭐야?”
검은 봉투를 보자마자 질색하는 카리엘.
하지만 결국은 특급 보고서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발악인가?”
보고서에 적혀 있는 것은 수도에서 혼란을 일으켰던 데릭이라는 자가 정식으로 ‘데리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제국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반란을 진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의 사생아와 신분을 숨겨야만 했던 자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황자일지도’ 모르는 자가 나와서 주장하고 반란을 평화적으로 진압하면서 중앙에 핍박받던 이들의 요구를 대언하는 상황이라 함부로 잡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중앙 집중형 국가라도 명분은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벨푸르스를 뒷배로 두었더라도 여기까지는 용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이것들이 완전히 선을 넘었네.”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보고서를 구겼다.
남부 왕국들이 ‘데리엘에게 직접’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제국의 정보부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거기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국 역시 이 명분 싸움에 한 발 걸쳤다.
「성국은 평화로운 행보를 보는 ‘데리엘’에게 ‘성자’의 칭호를 부여해 그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한다.」
교황이 직접 데릭도 아닌 데리엘이라고 직접 말하며 성자의 칭호를 부여해 이 싸움에 발을 들이민 것이다.
이건 제국에 대놓고 한 방 때린 격이었는데, 사실상 성국이 제국과 갈라서기로 했음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법이다.
사생아 출신의 황자가 성자의 칭호를 받고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영웅적인 행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버려지다시피 했던 황자가 스스로 성장해서 이런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민들 중에서도 ‘데리엘’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가 늘어났다.
“가만 놔둬도 되겠습니까?”
“때가 되면 폐하께서 나서시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본래라면 황제가 죽은 후에 쓸 패가 바로 ‘데리엘’이었다.
황제가 살아 있는 상황에선 쓰기 힘들었던 이유가 바로 데리엘이 진짜 사생아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결국 이 패를 일찍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이 사안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도 한 방 먹긴 했네.”
흑마법사들의 이 혼란을 주도하면서 의도했던 것.
첫 번째로 주력들이 동대륙으로 넘어갈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카리엘이 황궁 기사단을 움직여 주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혀서 판정승을 거두었다.
가장 중요했던 부분에서 한 방 먹였으니 카리엘이 승리를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로 서대륙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
이 부분에서 벨푸르스를 중심으로 생각보다 질질 끌게끔 만들어 가고 있었으나 제국에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만약 지금 상황이 쭉 이어졌다면 해적들을 움직여 남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카리엘이 승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리엘의 영웅화에 적국이 되다시피 한 남부 연합과 성국이 힘을 보태면서 장기화되었다.
결국 카리엘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혼란의 씨앗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졌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카리엘이 승리한 것이지만 두 번째에서 판정패를 당하긴 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래를 알고 대응했음에도 판정패라…….’
심기가 불편해지만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무기를 가지고도 판정패를 당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카리엘은 표정을 구겼다.
“……저하?”
“조용히 쉬려고 했더니 자꾸 귀찮게 하네.”
카리엘의 중얼거림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타리온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후! 그냥 복귀해 버릴까?”
카리엘의 물음에 타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사실 이 사태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카리엘이 중앙에 복귀하는 것이었다.
중앙에 복귀하는 순간 모든 관심은 카리엘에게 쏟아질 것이고, 그의 주도하에 제국이 움직인다면 이런 장난질쯤은 순식간에 끝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잘못했다간 황제가 될 수도 있지.’
카리엘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다.
그렇기에 제국에서 지금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제국민들이 자신을 얼마나 지지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변경백들이 공식적으로 지지 선언을 한다면?
두 공작가가 뒤늦게 힘을 합해 본들 의미가 없어진다.
‘조금 귀찮다고 황제가 될 순 없지.’
속으로 중얼거린 카리엘이 긴 숨을 토해 내면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자꾸만 자신의 휴식을 방해하는 이들 때문에 순간적으로 미친 짓을 벌일 뻔했으나 빠르게 정신을 차린 덕분에 다행히 천추의 한이 될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중앙의 일에는 신경 꺼.”
“하오나…….”
카리엘이 구긴 보고서 맨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본 타리온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라도 복귀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냥 수도에 관광이라도 와 주십시오!」
정보부장의 간절함이 담긴 말에 그와 안면이 있는 타리온은 한 번 더 청해 볼 생각을 했으나 카리엘의 의지가 너무나도 단호했다.
잠시 복귀한다는 게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는 법이다.
그러다 잘못해서 다시 황태자가 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답이 없었다.
황제라는 호랑이의 등에 타서 다시는 내릴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귀찮더라도 돌아가야지.”
“……예.”
카리엘의 단호한 음성에 결국 말 한마디 꺼내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타리온.
그런 그를 시종들과 황궁 기사들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잠시 실수할 뻔했으나 제정신을 차린 카리엘은 보름 정도 도시 구경을 할 계획을 철회하고 휴양지로 복귀했다.
“현재 아이사르만에 지어지고 있는 도시가 어디지?”
“세일럼입니다.”
공국에서 방치하다시피 한 작은 마을.
워낙 탈로스와 분쟁을 많이 벌여 쓸 만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발전시킬 생각조차 못 했던 그곳을 제국이 점령하면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으로 간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리엘이 세일럼으로 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제 막 발전하는 도시였고, 제국에서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는 만큼 중요 도시로 성장할 것이기에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다 분쟁 지역에 파견된 제국군의 사령부가 들어설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카리엘이 가는 순간 일복이 터질 것이다.
그렇기에 여태껏 휴양지의 별장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받아 왔던 것이다.
“중앙으로 가는 것보단 낫지.”
대신들이 굳이 카리엘에게 보고서를 보내오면서 사정사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카리엘의 중앙 복귀 각을 위해 명분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몇 번 더 해서 명분을 쌓고, 제국의 위기라며 황제를 통해 카리엘의 복귀를 명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카리엘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일을 해야 했다.
“이제부터 탈로스를 적으로 규정하고 움직인다.”
“……괜찮겠습니까?”
“저들은 완전히 선을 넘었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데리엘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시점에서 내정간섭을 한 거야.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해 줘야지.”
역지사지.
지들도 당해 봐야 제국이 겪는 게 얼마나 좆같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부 변경백에게 연락해서 남부 쪽 상단주들과의 연락망을 개설해.”
“예.”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자 카리엘은 그림자들에게도 명했다.
“지금부터 바빠질 거야. 이 일이 끝나기 전에 너희들의 휴가는 없는 셈이야.”
카리엘의 말에 그림자들과 황궁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활활 불타는 듯한 카리엘의 눈동자에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화가 돌아올까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자신과 같은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한 카리엘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휴식을 방해한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 주자고.”
“예!”
카리엘의 말에 우렁차게 답하는 이들.
그런 그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카리엘은 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모든 정리를 끝내고 가만히 별장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소중한 보금자리.
반드시 이곳에 돌아와 욜로 라이프를 즐길 것이라 다짐하면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제국의 신도시 세일럼으로 움직였다.
* * *
그렇게 카리엘이 별장을 떠나자 얼마 뒤, 카리엘에 대한 소식이 공국을 거쳐 제국에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두문불출한 1황자?」
「별장이 비었다!」
매일같이 모습을 보였던 카리엘이 휴양지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것만으로 공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혼자 느긋하게 휴양지에서 쉬고 있던 1황자.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모두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세일럼에 모습을 드러낸 1황자」
「드디어 1황자가 칩거를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국의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린 1황자에 대한 내용.
이미 제국에서는 수도 전체가 이 소식으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움직였나?”
잠자던 사자가 마침내 움직였다.
이것만으로도 대륙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귀찮아 뒤에서 해적을 움직여 견제만 하던 이가 기어코 직접 움직이게 된 것이다.
비록 분쟁 지역에 한한다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을 보여 줄 생각이신가?”
자신의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젊은 청년이 보여 줄 모습에 공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기대감을 품은 것은 제국의 행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저하께서 움직이셨군.”
“후…… 이것으로 데리엘에 관한 건 어느 정도 견제되겠군.”
내무대신의 말에 치안대장이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저하께 기댈 수는 없는 법인데…….”
“어쩌겠나. 안정될 때까진 저하의 휴식을 방해하는 수밖에…….”
외무대신의 말에 내무대신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폐하께서 일찍 나서 주셨다면 편했을 것을…….”
그렇게 말하며 그는 혀를 찼다.
이제야 움직일 준비를 하는 황제.
만약 좀 더 일찍 데리엘 문제를 매듭지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내무대신이었다.
그러자 외무대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어쩌면 폐하께선……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게 아닐까 싶네만…….”
외무대신들의 말에 각 부처의 대신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매번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저하를 찾지 않았나.”
“그렇지.”
“혹시 이것이 다시금 1황자 저하를 황태자로 복직시키려는 큰 그림이…….”
“에헤이! 그랬다가 무슨 사달을 내려고?”
외무대신의 말에 내무대신이 큰일 날 소리는 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다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럴듯했다.
벌써 1황자의 이름을 팔아먹은 게 몇 번이던가?
대신들이 칭얼거릴 때마다 황제는 은근히 카리엘을 팔아먹으라고 제안하고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귀족들조차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더 반복된다면?
귀족 파에서도 차라리 그냥 카리엘이 황제가 되면 어떻겠냐는 여론이 조성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