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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80화 (80/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8. 휴식을 방해한 대가는 크다!

그토록 분노하며 타리온에게 얘기했던 것과 달리 카리엘은 그리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탈로스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소국 연합군을 자극하고, 공왕에게 서신 하나를 보냈을 뿐이다.

어차피 일은 밑에 사람들이 하는 법.

서신을 전하는 그림자들만 죽어날 뿐, 카리엘의 여유로운 상황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이 정도만 되어도 살 만하지.”

스테이크를 야무지게 썰어 먹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대차게 분노한 것치고는 크게 변하지 않는 풍경에 다들 김이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만족했다.

‘어떻게 얻은 평화로운 삶인데 쉽게 포기할까 보냐?’

반드시 이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카리엘은 스테이크를 더 전투적으로 씹어 댔다.

하지만 그런 그의 결심과 달리 제국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반란은 아무리 능력 좋은 대신들이라고 하더라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까지 신경 써야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카리엘이 만들어 놓은 판이 워낙 견고했기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만 제국민들조차도 슬슬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만큼 절대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다 보니 카리엘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군을 움직여야 하나?’

해적들을 움직일 때까진 좀 더 과감하게 군을 움직여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공왕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던 답변이 도착하자 카리엘은 빙그레 웃으면서 서신을 살펴보았다.

“좋아.”

공왕이 부탁을 들어준다는 내용이었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직접 가실 생각입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왕의 인맥이 상당했는지 해적 연합에서 중진급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이쪽도 직접 움직여 주어야 격이 맞는다.

“위험합니다.”

“괜찮아.”

타리온의 걱정 어린 말에 카리엘은 괜찮다는 듯 말한 후 피식 웃었다.

공왕도 걱정이 좀 되었는지, 믿을 만한 자를 중재자로 파견시키겠다는 말을 적어 놓았다.

“마스터가 있는데 뭐 어쩌겠어.”

“샤르도나 후작을 파견한다는 겁니까?”

“그래. 공왕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나 봐.”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카리엘.

확실히 제국 하나를 서대륙의 강국들이 쥐어 패고 있는 상황이니 마음에 들지 않을 만했다.

이러다 대규모 전쟁이라도 발발한다면 얼마 전 전쟁을 끝낸 공국 입장에선 난감할 만했다.

어떻게든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렇기에 카리엘의 계획은 공왕도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샤르도나 후작을…….”

“자기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내 계획을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겠지.”

“음…….”

확실히 공국 입장에선 손해 보는 게 없었다.

제국의 돈으로 해적들을 움직이는 것이고, 결과가 좋으면 자신들의 국력을 회복할 시간도 벌 수 있을 테니.

문제는 해적들이 카리엘을 위협할 경우였다.

그것만 사전에 차단하면 공국 입장에선 최상의 결과였기에 안전하게 샤르도나 후작을 파견한 것이다.

기사단을 움직이면 사람들에게 들킬 테니 마스터만 슬쩍 마실 나갔다 오는 것이다.

“으음…….”

마스터가 온다는데 타리온도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자! 그럼 오늘 할 일도 대충 끝났으니 놀러 갈까?”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질리지 않으십니까?”

“아직까지는?”

타리온의 물음에 웃으면서 답한 카리엘은 바닷가로 놀러 나갔다.

제국의 1황자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는 명성이 더해지면서 더더욱 유명해진 이 휴양지에는 공국의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영애들답지 않게 상당히 과감한 옷을 입고 해안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딱 봐도 누군가에게 보여 주려는 움직임이었다.

“오늘도 저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군요.”

“연기야.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지. 쯧쯧!”

카리엘이 혀를 찼다. 그러자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떻게 알아보시는 겁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근처에서 호종하던 기사들과 시종들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 출신인 타리온이야 전문적으로 훈련받았기에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었고, 황궁 기사들도 조금은 배웠기에 그럭저럭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카리엘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보다 더 잘 알아보고 있었다.

가끔은 타리온도 혹할 만한 여인들의 연기도 알아볼 정도였다.

“쯧쯧! 이 정도도 못 알아보면 호구 잡힌다.”

“저 여인이야 그렇다 치는데, 저번에 봤던 여인은 정말 저하를…….”

“그래서, 뒷조사해 봤더니 어땠지?”

카리엘의 말에 표정을 굳히는 타리온.

“크흠!”

타리온조차 속았을 정도의 여인이었다.

대충 조사했을 때는 상인 가문의 영애였고, 특이 사항은 없었다.

딱 카리엘이 좋아할 만한, 튀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은 신분에 차분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단호하게 그 여인을 쳐 내고 조사를 명했다.

그 결과, 상인 가문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키운 전문적인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졌다.

혈통은 맞았지만 정실의 혈통이 아니었던, 딱 이럴 때 써먹으려고 키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내 짬밥이 얼만데…….’

전생에 수없이 겪어 봤던 일이다.

황제가 된 이후 정신없던 와중에도 권력을 쥐어 보겠다고 달려든 귀족 가문들이 수없이 많았다.

연회만 열렸다 하면 카리엘을 노리고 달려드는 여인들.

비어 있는 황후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여인들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카리엘이었다.

그러니 수많은 유혹을 겪어 본 카리엘 입장에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소로운 것에 불과했다.

“귀엽긴 하네.”

어설픈 연기를 하는 여인들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지나가는 카리엘.

그 모습을 보며 타리온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하께선 사실…… 남들과 다른 취향이…….’

순간 타리온은 불순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지워 냈다.

토토를 볼 때면 징그러워하던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냥 관심 자체가 없다는 건데…….

‘고자도 아니고…….’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왜 다 늙은 노인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는지가 이상했다.

그래도 주군이었기에 타리온은 애써 모른 척하면서 오늘도 카리엘의 힐링에 동참해 주었다.

* * *

그렇게 며칠간 소소한 일 처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서 놀던 카리엘이 마침내 먼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야, 옆 도시잖아. 이렇게까지 준비할 일이야?”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습니까.”

해적을 휴양지에서 만나기는 좀 그랬기에 공국의 영토 내에 있는 도시에서 만나기로 했다.

문제는 그곳이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왕 가시는 거, 도시에서 며칠 지내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습니까?”

“흠…….”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휴양지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처음이야 아름다웠겠지만,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매일같이 해변가를 거닐고 도시를 구경하는 것도 슬슬 지루해진 것이다.

“……그럴까?”

사실 카리엘도 슬슬 물리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욜로 라이프를 즐기려면 어디 한 군데 박혀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 이참에 옆 도시에서 차분하게 구경을 해 볼까?’란 생각을 하며 휴양지를 벗어났다.

딱 봐도 발전했다는 것이 보이는 거대한 도시에 들어서자 마차를 숙소에 대고는 곧바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1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반갑소.”

카리엘이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듯 샤르도나 후작과 악수했다.

“접선 장소는 어디요?”

“저쪽 건물 지하에 있습니다.”

샤르도나 후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타리온과 함께 움직였다.

너무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의심을 살 수 있기에 평범한 관광객인 척 움직이는 시종들과 황궁 기사들이 주변 건물들의 상점에 음식을 시키고는 대기했다.

“……해적들입니다.”

“예상보다 많네?”

아닌 척하지만 타리온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해적으로 보이는 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위장하고 곳곳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타리온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고위급 간부라는 건가?”

“그걸 감안해도 좀 많긴 합니다. 수준도 높은 편이고.”

타리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카리엘은 웃으면서 슬쩍 샤르도나 후작을 바라보았다.

마스터가 옆에 있는데 걱정하는 게 우스웠다.

중재자인 후작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평범한 펍이었는데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는지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비워 둔 건물에서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로 향하자 한 명의 해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음…….”

타리온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저하, 저자의 실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긴장된 얼굴로 작게 말하는 타리엘의 목소리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최소 저와 동급입니다.”

그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스터를 제외하고 세 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추정되는 타리온이다.

그런 타리온이 긴장할 정도라면 거의 마스터에 근접한 자라고 봐야 했다.

해적들 중에 이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해적왕인가?”

“소문이 사실이었군. 반갑소. 해적들을 이끌고 있는 존 키드라고 하오.”

“……제국의 1황자 카리엘이오.”

상대가 해적왕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법.

하대하지 않는 카리엘을 보며 해적왕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대를 해도 괜찮소만…….”

“해적왕이라면 마땅히 대접해야 하는 법이오. 무엇보다 부탁하는 처지이니 굽히고 들어가야지.”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해적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재밌는 분이셨구려.”

“뭐 잡담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일부터 처리하는 게 어떻겠소?”

“좋소.”

해적왕도 그편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리엘의 눈이 빛났다.

해적왕이 직접 왔다면 이쪽도 판돈을 올려야 하는 법.

‘계획을 바꿔야겠어.’

해적들이 진심인 것을 확인한 카리엘은 탈로스를 더 괴롭힐 방법이 생각났다.

“계약금으로 10만 골드를 줄 생각이오.”

“으음…….”

“적다고 생각하시오?”

웬만한 영지 정도는 그냥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해적왕을 움직이기엔 모자랐다.

예상보다 적은 돈에 해적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내가 움직일 만한 돈은 아니오.”

“알고 있소.”

그걸 알면서 왜 이런 금액을 제시했냐고 묻는 듯한 해적왕.

“부족한 건 거래로 대신할 생각이오.”

“……거래?”

“그렇소, 탈로스를 괴롭히는 건 제국뿐만 아니라 그쪽도 원할 것이니…….”

카리엘의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 해적왕.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대포. 언제까지 비싼 값에 몰래 사들일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해적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우리가 팔겠소.”

확답을 주듯 말하는 카리엘의 모습에 해적왕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샤르도나 후작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대포와 마도포 기술은 잘 알 것이오.”

“그걸 정말 우리에게 팔겠다는 것이오?”

“물론이오. 참고로 내가 준 계약금은 앞으로 동대륙과 거래할 우리 선단의 보호비요.”

카리엘은 어딘가 산뜻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 모르는 자는 없었다.

“언제까지 해적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살 것이오? 이제 정식 국가로 발돋움할 때가 되지 않았소?”

카리엘의 말에 천하의 해적왕이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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